'1900년 이전'에 해당되는 글 170건
- 2010.01.09 한성조약(漢城條約, 일본어: 日朝 漢城条約)
- 2010.01.03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 2010.01.02 거문도 사건
- 2010.01.02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년 ~ 1901년)
한성조약(漢城條約, 일본어: 日朝 漢城条約)
한성조약(漢城條約, 일본어: 日朝 漢城条約)은 1885년 1월 9일 조선의 한성부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를 위해서 체결된 조약이다.
1884년(고종 21) 12월(음력 10월)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청나라 군대의 출동하여 일본 제국의 육군을 섬멸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개화파가 일본 제국으로 망명하자, 흥분한 민중이 한성부에 있는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일본 거류민들을 죽였다. 이에 따라, 조선 내에서의 일본의 입지가 좁아지자, 일본은 고압적인 자세로 일본의 피해와 책임을 조선에게 떠넘겼다.
이에 일본은 1884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1월 초(1884년 음력 11월)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전권대신에게 2개 대대의 병력을 주어 조선에 파견하여, 1885년 1월 3일(1884년 음력 11월 18일) 인천에 상륙하고 한성부로 진주했다. 이노우에는 직접 낙선재로 가서 고종을 예방하고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니 고종은 좌의정 김홍집을 전권대신으로 하여 협상에 응하게 하였다. 1월 7일(1884년 음력 11월 22일)부터 양국 대표는 의정부 안에서 협상을 개시했으나 사건의 책임 소재를 양국이 서로 상대국에게 전가하여 논란이 격화되다가 드디어는 일본 측의 무력적 위협에 굴복하여 1885년 1월 9일(1884년 음력 11월 24일) 조약을 체결케 되었다.
김홍집
井上馨
홍집
한성조약의 주요한 조목은 아래와 같다.
1.조선 측은 국서를 일본국으로 보내어 사죄의 뜻을 알린다.
2.사거한 일본국의 인민의 유족과 피해입은 부상자에 대해 진휼하고, 일본국 상인들의 화물이 파손된 것에 관해 조선국이 10만 원을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3.조선국은 일본군의 소바야시(기림, 磯林) 대위를 살육한 난도(亂徒)를 체포하여 엄벌로 다스린다.
4.일본 공사관이 심각하게 파괴된 바, 조선국은 응당 건물을 교부하여 일본국이 공관으로 이용케 할 것이며, 그것의 증축을 위해서 2만 원을 일본국에 지불한다.
5.일본국 공관 호위병의 병영은 공관 부지에서 선택하도록 하고, 제물포 조약의 제5관에 의거하여 시행토록 한다.
이 조약의 결과로 일본은 한국(조선) 침략의 기반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1900년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갑오개혁 [甲午改革] (0) | 2010.01.12 |
---|---|
청일 전쟁(淸日戰爭) (0) | 2010.01.12 |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0) | 2010.01.03 |
거문도 사건 (0) | 2010.01.02 |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년 ~ 1901년) (0) | 2010.01.02 |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은
1894년(고종 31) 반봉건(反封建)·반침략(反侵略)의 기치하에 조선 봉건사회해체기의 제문제를 변혁하려 했던 농민들의 사회개혁운동으로
동학 지도자들과 농민들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제1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2차)로 나뉜다.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만석보(萬石洑)의 고율수세를 비롯하여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농민들을 착취했다. 고부농민들은 1893년 11월경에 조병갑에게 민장(民狀)을 제출하여 시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봉준은 새로 온 고부군수 이은용에게 고부군의 폐정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군아의 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9일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재부임하게 되자,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 1894년(고종 31) 음력 1월 10일(양력 2월 15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가. 관아를 습격·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부민란은 아직 국지적인 민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지만,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봉건적인 폐정을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보다 확대된 민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여기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빌미로, 요호부민들을 잡아다 난의 주모자로 몰고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등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무장을 갖추고, 김개남, 손화중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 봉기라고도 불리는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강령과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민중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에 태인·금구(金溝)·부안 등지에서도 농민들이 합세하여 그 수가 수천에 도달했다. 동학군의 봉기는 이로부터 본격화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남쪽으로 향하였다.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으나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음력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음력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전주성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에 놀란 정부는 자력으로 농민군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4월 29일에 청에 원병을 청했다. 이에 따라 청군과 일본군은 농민전쟁을 구실로 조선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개혁안을 제시,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측이 이에 응하여 5월 7일(양력 6. 10)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었다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음력 5월 6일(양력 6월 9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시켰다.
음력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일어난 청일전쟁은 일본이 승리한다.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했으므로 농민군의 지도부는 군량과 군기를 정비하면서 삼례에 투쟁본부를 두고 재봉기를 확정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등이 다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전봉준은 종전 제1차 봉기 때 반대하던 입장을 지녔던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했다.
9월 하순 논산에 모인 남접· 북접 연합군 총 20만여명은 공주를 향해 북상을 개시했다.
당시 공주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 1주일 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가운데 500여 명의 생존자가 전주 남쪽의 금구 원평(院坪)으로 후퇴하였다.
조일 연합군은 음력 11월 14일에 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졌다.
금구·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핵심부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황해도·경상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양반·부호·관료·이서층이 조직한 민보군에 의해 철저히 괴멸되었다. 민보군·수성군들은 도주한 농민군의 집에 방화하고, 귀순한 동학도들까지도 체포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농민군세력을 초토화했다.
마침내 음력 11월에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일본 공사의 재판을 받고 사형되었으며(1895년 음력 3월),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 이로써 동학농민전쟁은 거병한 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http://ko.wikipedia.org/wiki/%EB%8F%99%ED%95%99_%EB%86%8D%EB%AF%BC_%EC%9A%B4%EB%8F%99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i=110662
'1900년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일 전쟁(淸日戰爭) (0) | 2010.01.12 |
---|---|
한성조약(漢城條約, 일본어: 日朝 漢城条約) (0) | 2010.01.09 |
거문도 사건 (0) | 2010.01.02 |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년 ~ 1901년) (0) | 2010.01.02 |
제물포조약 (濟物浦條約) (0) | 2010.01.02 |
1885년 4월14일 영국 해군성은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던 도웰(Dowell) 중국해 사령관에게 거문도를 점령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러시아가 점령할 지 모르니까 먼저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이튿날 아가멤넌 호 등 영국 군함들은 거문도를 점령했습니다. ‘거문도 사건’의 시작입니다.
'SKETCHES FROM KOREA, EASTERN ASIA - PORT HAMILTON, KOREA'. This half page view was published by the Illustrated London News in 1865.
http://www.antiquemapsandprints.com/iln124.jpg
거문도사건당시의 기록사진.
영국 정부는 1885년 4월20일, 중국과 일본 정부에 거문도 점령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조선 조정에는 5월20일에야 통보했습니다. 그것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을 예방코자 거문도를 잠시 거수(居守)한다’는 의례적인 내용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야만인들이어서 점령하는 데에 아무런 의식도 필요 없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던 거지요. 거문도 사건은 영국과 러시아가 1885년 3월 30일 아프가니스탄 펜제(그레이트 게임에서는 펜데라고 번역했습니다)에서 충돌한 사건에서 비롯됐습니다. 러시아군은 영국군의 훈련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는 방안을 모색합니다. 영국의 윌리스 제독은 거문도 점령은 방어적인 것이 아니라 침략적인 것이며, 거문도는 러시아의 극동지역에 대한 공격기지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사건 직후 조선조정은 외교 고문인 묄렌도르프와 엄세영을 나가사키에 보내 도웰 사령관에게 항의했습니다. 통서 독판 김윤식은 영국은 물론 중국 총판, 미국, 독일, 일본 공사에게 거문도 점령이 공법에 어긋난다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조선을 무시하고, 중국 정부를 교섭 상대로 택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한반도에서 영향력이 강화된 청나라의 입장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물론 중국도 조선의 종주권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거문도 사건을 활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거문도 문제에 관한 영국의 협상은 천진(天津)의 직예총독 이홍장과 이루어졌고, 조선은 당사국이면서도 국외자로 전락했지요.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이홍장의 조선 지배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겁니다. 영국도 러시아가 향후 10년간 한반도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최대의 피해자는 조선입니다. 1885년에 이미 강대국의 쟁탈과 타협의 대상으로 전락한 겁니다. 1910년 경술국치의 예고편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러시아가 장차 조선의 영토를 점거할 의사가 없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영국 함대는 1887년(고종 24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영국해군 소속 선박
"데어링호"의 데이비스선장(가운데)과 펫가서스호(데이비스선장의 우측) 그렌펠선장이 거문도 주민들과 찍은 자료사진.
'1900년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성조약(漢城條約, 일본어: 日朝 漢城条約) (0) | 2010.01.09 |
---|---|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0) | 2010.01.03 |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년 ~ 1901년) (0) | 2010.01.02 |
제물포조약 (濟物浦條約) (0) | 2010.01.02 |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 ] (0) | 2010.01.02 |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독일어: 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년 ~ 1901년) 혹은 한국이름 목인덕(穆麟德)은 독일의 외교 고문이다.
독일 작센 출신으로 할레 대학에서 동양어와 법률을 배우고, 청나라 주재 독일 영사관에 근무하였다.
1882년(고종 19년) 청나라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의 통리아문 협판이 되어 외교와 세관 업무를 담당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수구파에 협조하여 독립당과 반목하였으며, 한성조약을 체결한 뒤 일본의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합세하여 러시아 세력을 조선에 끌어들였다. 당시 조선 정부의 특파전권대신 서상우의 부대신으로 도일하여 외교활동을 하였으며, 한러수호통상조약을 성사시켰다.
1884 묄렌도르프 저택 - 홍영식과 외부관원
이 조약의 결과 조선에서의 청국과 일본의 세력이 러시아에게 견제당하게 되매, 이홍장이 그를 청국으로 소환하였다.
'1900년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0) | 2010.01.03 |
---|---|
거문도 사건 (0) | 2010.01.02 |
제물포조약 (濟物浦條約) (0) | 2010.01.02 |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 ] (0) | 2010.01.02 |
임오군란 (壬午軍亂) (0) | 2010.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