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2. 04:46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战争 / 中日甲午戰爭),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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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편 전쟁과 청불 전쟁의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청나라는 약해졌고 서양 열국의 간섭과 잠식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일본은 이를 조선에서 청나라 대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조선은 일본의 강요로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고, 대외적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해야 했다.


수구파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나라에서 파견한 위안스카이의 도움으로 재집권한다.


1884년, 개화파가 친청 경향의 보수 관료들을 일본군을 이용, 유혈충돌을 통해 몰아내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과정에서 청나라와 일본 군대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고,

1885년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양측은 ①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키고 ②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훈련교관을 보내지 않으며 ③ 변란 등의 중요 사건으로 어느 한 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했다.


189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혁세력인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되었다. 일본은 그 유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청나라를 이를 막고 청나라의 전함에 실려 조선으로 보냈고, 조선에서 그는 다시 능지처참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에 조선 정부가 청나라 정부에 지원병을 요청하자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 정부에 알렸고, 원세개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2,8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일본은 일본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원정군인 오시마(大島義昌) 휘하의 8,000 병력을 조선으로 보냈다.


이들은 조선의 항의에도 1894년 6월 9일 조선과 청나라는 항의하였으나, 약 4,500명의 일본 군대가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1894년 6월 11일, 동학농민운동이 종료되었다.

1894년 6월 13일,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이 기회를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할 기회로 판단하였고, 조선에서의 일본군의 지휘를 담당한 오토리 게이스케(大鳥 圭介) 공사에 가능하면 오랫동안 조선에 남을 것을 전달하였다.

1894년 6월 22일, 일본으로부터의 추가 병력이 조선에 도착하였다.

1894년 7월 3일, 오토리 공사가 조선의 정치 체제를 바꿀 것을 제안하였으나, 보수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894년 7월 7일, 청나라 주재 영국 대사에 의해 청나라와 일본 간의 중재가 있었으나 결렬되었다.

1894년 7월 19일, 일본 해군의 거의 모든 선박으로 구성된 일본의 연합함대가 전쟁에 대비하여 구성되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한양에 진입, 경복궁을 점령하여 새로운 친일 내각을 구성하였다. 새 내각은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


1894년 7월, 조선 내의 청나라 군대는 약 3,000 ~ 3,500명 정도였으며, 아산만을 통해서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일본의 목표는 우선 아산의 청국군을 봉쇄하고 일본 육군으로 포위하는 것이었다.


1894년 7월 25일, 아산 근해를 순찰하던 순양함 요시노(吉野), 나니와(浪速), 아키츠시마(秋津洲)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가 청나라 순양함 제원(済遠)과 군함 광을(広乙)과 마주쳤다.

1시간의 전투 끝에,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하여 암초에 좌초되고 제원호는 탈출하였다.


친일 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을 부여받은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약 4,000명의 일본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이동하여 아산과 성환(현재의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


1894년 7월 28일, 양측 군대는 아산 외곽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전투를 벌였다. 청나라 군대는 점차로 병력을 잃어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사상자는 500명에 달하였으나, 일본군 측은 82명에 불과했다.


8월 1일에는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일본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8월 4일 이전에 조선에 남은 청나라의 병력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고, 청나라로부터 파견된 병력과 합류하였다.


1894년 9월 15일, 일본군은 평양을 습격하여 청나라 군대를 항복시켰다.


일본군은 1894년 9월 16일 아침, 평양에 입성하였다. 평양 전투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다. 이로부터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1894년 9월 17일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의 함대와 압록강 하구에서 맞서 청나라측은 화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었으며, 85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4척 파손에 사망자 90명, 부상은 200명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4,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 부근에 상륙하였다. 북양함대는 여순항으로 피신하였다.

1894년 10월 25, 일본군은 단둥 동쪽 호산의 주둔기지를 공격하였다. 오후 10시 30분, 청나라 군대는 방어 위치를 버리고 다음날까지 단둥으로 후퇴하였다.


1894년 11월 21일까지, 일본군은 여순항을 점령하였다.

1894년 12월 10일까지 요동의 건양이 일본군 1사단에 점령되었다.

북양함대는 여순항을 거쳐 웨이하이 요새로 피신하였으나,1895년 1월 20일 웨이하이 요새는 일본군에 함락되었다.

1895년 3월, 일본군은 타이완에 상륙, 점령하였다.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는 조선을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고, 배상금 2억 냥(兩)을 일본에 지불하였으며, 요동반도·대만(臺灣)·팽호열도(彭湖列島) 등을 할양하였으며,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는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국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고, 일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표시하여 필연적으로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요동반도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 간섭으로 반환되었다.


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은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겨졌으며, 청나라 조정과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관에 치명타를 주었다.


조선의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일본은 이에 큰 위협을 느꼈고, 1895년 음력 6월 21일에는 일본 공사 마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의 2개 대대가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에게 왕비의 폐출 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그것을 거부하자 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조선을 압박하여 을미개혁을 실행하였으나, 민중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조선 내에서 일본의 세력은 감소하였다. 이듬해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한민족의 국가는 고대 이래 중국의 국가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는 독립성이 비교적 강할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다.


'만국공법'이란 이름으로 근대 국제법이 들어오기 이전,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국제 질서의 기반은 중국 중심의 천하 체제였다.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내려온 '천명(天命)' 관념을 중심으로 한 이 체제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로부터 각 지역의 군주가 정치적 권위를 위임받는다는 유기론적 세계관이었다. 진시황의 통일 이후 이 체제가 계속 확장된 결과 7세기 이후로는 동아시아 거의 전역이 편입되어 있었다.


만국공법의 원자론적 세계관과 달리 유기론적 세계관의 천하 체제에는 완전한 '독립'의 관념이 없었다. 지상 최고의 권위자인 천자조차 천명에 종속된 존재였다. 천자가 천명을 저버릴 때는 혁명의 대상이 되었다. 한민족 사회는 7세기에 이 체제에 편입되었고, 그 후로 역사의 대부분 기간을 통해 이 체제 안에서 허용되는 최대한의 독립성을 누려 왔다.


천하 체제의 종주국인 중국 왕조는 조공국의 급격한 변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공국의 왕조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민족 국가의 왕조 교체가 중국의 보호가 끊어질 때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다. 신라의 종주국 당나라가 멸망할 때 고려로의 왕조 교체가 있었고, 고려의 종주국 원나라가 망할 때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큰 부담을 무릅쓰고 출병했으며, 개항기에 청나라가 조선과의 관계에 집착한 이유의 상당 부분도 이 역할에 입각한 것이었다


천하체제의 붕괴가 완전히 확인된 계기는 청일전쟁(1894~95)이었다. 이 체제의 붕괴는 개별 국가의 쇠퇴와 멸망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존재 양식을 청산하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조공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존재 양식도 이로써 단절을 맞았고, 여기에 조선 망국의 큰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본다. 그 후 대한제국으로의 전환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려는 시도였지만, 그 시도가 성과를 거두기 위한 조건이 극히 열악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 왕조와 식민지 시대 사이의 과도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의 망국에 두 개 단계를 본다. 첫 단계인 천하 체제의 붕괴는 조선 왕국이나 한민족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가 함께 겪은 일이다.


대한제국(1897~1910)


망국의 두 단계 국권 상실

천하 체제의 붕괴를 계기로 사회, 경제, 문화, 정치의 모든 질서가 넓고 깊은, 그리고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러 방면의 빠른 변화를 효과적으로 조율해 나가지 못하는 사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침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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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