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은
1894년(고종 31) 반봉건(反封建)·반침략(反侵略)의 기치하에 조선 봉건사회해체기의 제문제를 변혁하려 했던 농민들의 사회개혁운동으로
동학 지도자들과 농민들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제1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2차)로 나뉜다.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만석보(萬石洑)의 고율수세를 비롯하여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농민들을 착취했다. 고부농민들은 1893년 11월경에 조병갑에게 민장(民狀)을 제출하여 시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봉준은 새로 온 고부군수 이은용에게 고부군의 폐정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군아의 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9일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재부임하게 되자,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 1894년(고종 31) 음력 1월 10일(양력 2월 15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가. 관아를 습격·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부민란은 아직 국지적인 민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지만,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봉건적인 폐정을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보다 확대된 민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여기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빌미로, 요호부민들을 잡아다 난의 주모자로 몰고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등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무장을 갖추고, 김개남, 손화중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 봉기라고도 불리는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강령과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민중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에 태인·금구(金溝)·부안 등지에서도 농민들이 합세하여 그 수가 수천에 도달했다. 동학군의 봉기는 이로부터 본격화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남쪽으로 향하였다.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으나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음력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음력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전주성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에 놀란 정부는 자력으로 농민군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4월 29일에 청에 원병을 청했다. 이에 따라 청군과 일본군은 농민전쟁을 구실로 조선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개혁안을 제시,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측이 이에 응하여 5월 7일(양력 6. 10)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었다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음력 5월 6일(양력 6월 9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시켰다.
음력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일어난 청일전쟁은 일본이 승리한다.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했으므로 농민군의 지도부는 군량과 군기를 정비하면서 삼례에 투쟁본부를 두고 재봉기를 확정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등이 다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전봉준은 종전 제1차 봉기 때 반대하던 입장을 지녔던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했다.
9월 하순 논산에 모인 남접· 북접 연합군 총 20만여명은 공주를 향해 북상을 개시했다.
당시 공주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 1주일 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가운데 500여 명의 생존자가 전주 남쪽의 금구 원평(院坪)으로 후퇴하였다.
조일 연합군은 음력 11월 14일에 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졌다.
금구·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핵심부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황해도·경상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양반·부호·관료·이서층이 조직한 민보군에 의해 철저히 괴멸되었다. 민보군·수성군들은 도주한 농민군의 집에 방화하고, 귀순한 동학도들까지도 체포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농민군세력을 초토화했다.
마침내 음력 11월에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일본 공사의 재판을 받고 사형되었으며(1895년 음력 3월),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 이로써 동학농민전쟁은 거병한 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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