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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22 1910년대 한국의 기록필름 (서울)
- 2017.12.03 청와대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불상
- 2015.09.14 독일 신부 렌즈에 잡힌 1911년
Roy Chapman Andrews 1912 Film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US Manhat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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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불상’으로 알려진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은 말 그대로 구중궁궐에 깊숙이 감춰져 있다.
청와대 앞 검문소와 연풍문(방문객 출입구)을 차례로 통과해 비서동 앞에 들어서면 춘추관(청와대 출입기자실)으로 이어지는 큰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면 외국 손님을 맞는 상춘재가 보이며, 여기서 다시 직진해 대통령 관저 뒤쪽으로 가면 한자로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세상에서 가장 길한 명당)라고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바위에서 청와대 유일의 정자인 오운정 건너편으로 나아가면 단청 지붕의 보호각 아래 가부좌를 틀고 있는 불상을 볼 수 있다. 보안구역이라 청와대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이 가볼 수도 없다.
신라 왕경에 봉안된 불상이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를 거쳐 청와대까지 온 과정에는 암울한 한국 근현대사가 투영돼 있다. 이야기는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언론과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1912년 11월 2박 3일 일정으로 경주 곳곳을 순시했다. 이때 데라우치는 지역 금융조합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의 정원에 놓인 불상을 보고 관심을 보였다.
사업상 총독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던 고다이라는 눈치껏 불상을 경성 왜성대(倭城臺·현 서울 남산 일대)에 있던 총독 관저로 보냈다. 총독부는 1939년 총독 관저를 왜성대에서 지금의 청와대가 있는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광복 이후 불상이 청와대 경내에 머물게 된 연유다.
흥미로운 건 일제강점기에도 최고 권부에 좌정한 불상의 거취가 논란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 즐풍욕우(櫛風浴雨) 참아가며 총독 관저 대수하(大樹下)에’ 제목의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이 불상은 경주 골짜기에 안치돼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해 견딜 수가 없다”는 총독부박물관 관계자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이어 “박물관에서는 불상을 가져왔으면 하고 있으나 이미 총독 관저의 물건이 된 이상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총독의 허가를 얻어 박물관에 진열해 보려고 희망하는 중이다”라고 덧붙였다. 전문기관이 아닌 총독 관저에 있다 보니 불상에 대한 보존 조치가 미흡했지만 총독 눈치를 보느라 박물관이 속만 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청와대 불상의 출처는 경주에서 온 것은 확실하지만 구체적인 사찰 터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삼국사기 등 사료와 일제강점기 기록들에 따르면 청와대 불상의 출처는 경주 남산이나 이거사(移車寺)터, 유덕사(有德寺)터 중 한 곳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모두 흔적만 남아있는 이른바 폐사지(廢寺址·절터)들이다. 이 때문에 보존 관리를 위해 전문 인력이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문화재는 제자리에 두는 게 원칙”이라는 반론도 제기된다.
경주 남산설은 앞서 언급한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 중 “(청와대 불상이) 총독부박물관 홀에 진열돼 있는 약사여래와 같은 골짜기에 안치돼 있었다”는 총독부박물관 관계자의 발언에 근거한다. 여기서 언급된 약사여래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청와대 불상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남산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http://news.donga.com/East/MainNews/3/all/20170930/86600981/1#csidx9ae2dcb386b10cda8a0ce17da339a19
청와대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불상(서울시 유형문화재)이 일제강점기인
1913년 경주에서 서울 예장동 왜성대 조선총독 관저 근처로 옮겨진 직후 열린 개안식 행사사진들이 처음 세상에 나왔다.
청와대 불상을 담은 옛 사진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찍은 것들로, 데라우치 마사다케(1852~1919) 초대 총독이 고개 숙여 배례하는 장면 등이 담겨 눈길을 끈다.
데라우치 총독이 옮겨온 경주불상 앞에서 배례하는 장면. 1913년 2월 서울 남산 총독부 관저 부근에서 개안식을 열면서 찍은 것이다. 총독의 뒤에 참석한 승려들도 보인다.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도쿄대 박물관 소장유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청와대불상의 옛 개안식 사진 2점을 발견했다며 3일 사진들을 <한겨레>에 공개했다. 이 사진들은 1910년대 조선 고적조사를 벌였던 건축사가 세키노 타다스의 자료들 속에서 찾아낸 것들이라고 한다. 정 교수는 “당시 세키노와 함께 조사하며 사진 촬영을 전담했던 식민사학자 야쓰이 세이이츠가 찍은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공개된 사진 2점은 식장에서 데라우치 총독이 배례하는 장면과 예물이 놓여진 불상을 측면에서 찍은 장면을 각각 담고있다. 모두 별도의 보존용 종이에 끼워진 것이 특징이다. 데라우치 총독이 등장하는 사진의 경우, 눈이 덮힌 바위 앞에 안치된 불상 앞에 예단 탁자를 놓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배례를 하는 데라우치와 지켜보는 일본 승려 2명의 뒷모습이 보인다. 실제로 데라우치는 1913년 2월16일치 일기에서 관저 앞 절벽 아래 안치된 불상 앞에서 승려 마루야마 화상의 주재로 야마가타 정무총감, 아카시 장군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안식을 열었다고 기록해, 사진의 장면과 부합된다. 데라우치가 경주에서 반출된 불상을 별도의식까지 치르며 맞아들였고, 야쓰이 등의 관학자까지 불러와 사진을 찍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사진에서는 상대만 있는 대좌 위에 앉은 당당한 불좌상의 모습과 그 아래 개안식 예물로 올린 접시의 과일들과 촛대를 볼 수 있다. 사진을 끼운 보존지에 ‘조선총독부신라석불개안식’‘데라우치총독예배’라는 설명을 적어 총독부가 주도한 개안식임을 일러준다.
정 교수는 “불상은 1912년 11월 총독의 경주 순시 당시 환심을 사려는 현지의 일본인 유지에 의해 몰래 반출됐고, 개안식 뒤에도 이 사실이 오래 묻혀있다가 21년이 지난 1934년 3월 <매일신보>에 총독부박물관이 불상 소재를 찾았다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면서 “사진들은 데라우치가 개안식을 통해 불법반출된 불상을 사유화하고, 조선 유적지에서 암약하던 일본인들의 문화재 밀반출 행위에 사실상 면죄부를 주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청와대 불상은 1939년 북악산 기슭의 청와대 자리에 새 총독관저가 지어지자 다시 옮겨져 현재에 이른다. 지난 9월 서울시문화재위원회가 불상의 국가보물지정건의안을 의결한 뒤로 문화재청 전문가들이 지정여부를 가리기위한 조사작업을 벌이고 있다.
http://v.media.daum.net/v/2017120317561195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정인성 교수 제공
눈덮힌 서울 남산 기슭의 총독관저 옆 계곡에 안치된 경주 석불.
‘조선총독부신라석불개안식’이라고 쓰여진 불상사진 보존지(커버). 데라우치 총독이 예배했다는 문구도 그 아래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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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m10956&logNo=221098511457&categoryNo=0&parentCateg
https://archive.org/details/imlandedermorgen00webe/page/88/mode/2up
https://archive.org/details/imlandedermorgen00webe/page/88/mode/2up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총원장이 1915년 출간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Im Lande der Morgenstille)』초판에 사용한 원본 사진 13장이 처음으로 언론에 별도 묶음으로 공개됐습니다.
이들 사진은 학술 목적의 사진집 발간 같은 특별한 사업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알려지거나 노출된 적이 있지만, 책자 수록용으로 추려져 언론에 다수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들 사진은 선교를 위해 1911년 2월부터 4개월 동안 한국을 찾은 베버 총원장이 부산에서부터 서울, 경기, 천안, 공주, 해주, 평양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촬영한 것들입니다.
이번 사진은 당대 갑남을녀가 소나 농사기구를 이용해 노동하고 부엌에서 솥단지를 걸어놓고 불을 지피는 모습이나 서양식 담배와 장죽을 함께 든 형상 등 평범한 생활상을 담았습니다.
문화인류학과 문학에 밝고 예술적 감각도 탁월했던 베버 총원장은 일제에 강점당하기 시작한 조선이 민속문화와 전통가치를 침식당하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 사진들에 그런 것들을 담아내려고 진력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1925년 6월 두 번째 한국 방문 때에는 35㎜ 필름 1만 5천m 분량의 영상을 찍고, 독일 현지에서 이를 무성영화로 만들어 상영함으로써 당시 조선을 독일에 알리는 데에도 기여했습니다.
그는 특히 이 2차 방문 기간 금강산을 여행하고 나서 『In den Diamantbergen Koreas(1927년. 이후 1999년 김영자 역 '수도사와 금강산')』라는 책을 또 냈고, 두 차례 한국 방문에서 모두 갖가지 민속품을 모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박물관으로 넘김으로써 이후 한국 근대문화사 연구에 상당한 도움을 줬습니다.
1915년 초판이 나온『고요한 아침의 나라(Im Lande der Morgenstille)』는 원색사진 24장과 일반사진 279장 등 다양한 사진을 활용한 방대한 저서로서 2013년 한국어로도 번역돼 출판됐습니다.
(SBS 뉴미디어부)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169208&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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