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2. 16:37

- 성 베네딕토 독일의 총아빠스 신부가 남긴 귀중한 한국 기록영상

- 독일어 원서 자료 : https://archive.org/details/imlandede...


Full text of 

"Im Lande der Morgenstille : Reiseerinnerungen an Korea"



https://archive.org/stream/imlandedermorgen00webe/imlandedermorgen00webe_djvu.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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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7. 4. 19. 07:21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J.Shepping 한국명 서서평 徐舒平 1880~1934)

 

그녀의 초년은 불행했다.

1880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가 1살 때 사망하자 어머니는 미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던 그는 할머니마저 사망한 후 고아가 된 아홉 살의 쉐핑은 1892년 어머니를 찾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쉐핑은 미국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데 성공하고 뉴욕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간호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탓인지 불쌍한 이웃을 돕는데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낮엔 간호사로, 밤에는 선교사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이때 쉐핑이 기독교로 개종하며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와 충돌이 있었고 결국 둘은 갈라서게 됩니다.(1929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갓 1살 된 자신을 할머니에게 버려두고 떠났던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니 몰골이 내 딸이라 하기에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서서평을 내쳤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 쉐핑에게 친구가 조선에 훈련된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주었습니다. 그녀는 조선으로 갈 결심을 했고 기독교 교파인 남장로회에서 파견해주었습니다.

1912332살의 나이에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 제 백성 돌볼 엄두도 못 내던 나라

조선에 온 독일 출신 미국인 간호 선교사 엘리자베스 셰핑(Elisabeth.J.Shepping 한국명 서서평 1880~1934)

 

그녀는 한국어를 배우고 이름도 한국식으로 서서평이라고 지었습니다. 간호 선교사로 새로운 삶을 맞는 기대 가득한 시점이지만 그녀에게는 조선인들의 현실이 참담하기만 했습니다.

 

처음 맡은 일은 전라도에서 간호사 양성과 기독교 선교활동이었고,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이 터지자 조선인들을 치료해 주고 독립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해주었다는 이유로 일제는 서울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1920년대에는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방문 간호와 공중위생에 힘썼으며 인신매매나 공창폐지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머리가 지저분한 여성을 보면 손수 빗질해주고, 속옷이 보이거나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성이 있다면 옷매무시를 고쳐주었다고 합니다.

 

1922년 미국인 친구 로이스 니일(Lois Neel)의 후원을 얻어 그의 이름을 따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Neel Bible college 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처음엔 학대받는 여성들, 배울 기회를 못 가진 여성들을 계몽하기 위해 침실에 모여 공부하곤 했습니다.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은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했다. 조선사람들에겐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1923년엔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국제간호협의회(ICN)에 가입하려 노력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지금의 한국 간호협회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19285월 조선간호부회 총회에서 이렇게 설교했다.“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의 종교에서 구제를 제해버린다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구제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제 아무리 십자가를 드높이 치켜들고 목이 질 만큼 예수를 부르짖고 기독교 신자가 자처한다 할지라도 구제가 없다면 그것은 참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19295월 조선간호부회 제 7차 총회에서 서서평은 "예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강조한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니라(12: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18:18-25)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케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

 

서서평은 당시 중산층 선교사들, 특히 문물수입으로 부와 영광을 누린 선교사들과는 달리,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헌신하는 선교사로 살았다. 그는 1928510일 평양에서 열린 한국간호협회 6회 총회에서 사도행전 2017-35절을 본문으로 바울의 모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질문명이 발달한 서양 태생이면서도 동양의 청빈 사상을 더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두 벌 옷도 갖지 않으셨을 만큼 청빈하셨기 때문입니다.”

 

 

1920-30년대 광주·전남은

45만가구 220만 인구 가운데 굶주리는 인구가 무려 88만명, 걸인이 11만명에 이르렀다

 

한 번 순회 진료와 전도 여행을 나서면 한 달 이상 말을 타고 270이상 거리를 돌았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머리에 이고 백릿길을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그는 한 나환우가 역시 나환우였던 아내가 죽자 병든 자신이 더이상 키울 수 없어 버리려던 아이를 데려다 양아들로 삼은 것을 비롯해 버려진 아이 14명을 양아들·양딸로 삼았다. 소박맞거나 오갈 데도 없는 미망인 38명도 데려와 한집에서 함께 살았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14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해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냥 데려다 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좋은 곳으로 시집가도록 돕고, 소박이라도 맞으면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1933년에는 서서평은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50여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을 시작했다.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다. 서울의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에 달했다. 결국 총독부도 두 손을 다 들었다. 소록도 한센병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됐다.

 

19346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이미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눴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

 

서서평이 별세하자 선교사 동료들은 그를 한국의 메리 슬레서라고 추모했다. 메리 슬레서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가 버려진 어이들을 돌보다 숨져 아프리카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된 인물이다.

1930년대 미국 장로회는 전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서서평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으로 선정했다.

서평의 부음을 듣고 그의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맡에 걸려 있던 좌우명을 보았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523540.html#csidx1cb769c5f26ebe58d023f9e305d276a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2/24/0200000000AKR20170224046000005.HTM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3/18/2012031801316.html

 

 

http://www.pck-good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2

 

http://ppss.kr/archives/103711




Serving the People 제공



1926 광주 제중원 시절











1918년 세브란스 간호사 양성소 졸업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쉐핑이다.












교회 활동에 참가한 모습과 말년의 모습. 출처: 강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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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6. 8. 16. 09:17


을축년 대홍수는 1925년 7월 7일부터 9월 초에 걸친 집중호우로 일어난 4차례의 큰 홍수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약 1억300만원의 피해액을 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4회에 걸친 호우로 인하여 전국에서 사망자 647명, 가옥 유실 6363호, 붕괴 1만 7045호, 침수 4만 6813호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논 약 3200헥타르, 밭 약 6700헥타르 등이 유실돼 기상관측 이후 가장 피해가 큰 대홍수였다.


을축년 대홍수는 짧은 기간에 1년 치 강수량의 80%인 700-900mm의 비가 퍼부어 최대의 피해를 가져왔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했으며, 서울 송파구 근린공원에 1926년 희생자들을 추모한 을축년 대홍수비가 있다.

용산의 철도청 관사는 1층 천장까지 물이 찼고, 용산역의 열차가 물에 잠겼다. 또한 뚝섬의 제방이 무너지고 샛강이 생겨 신천(新川)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http://www.focus.kr/view.php?key=2016081600083526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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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5. 11. 3. 16:53



일제강점기, 각각 다른 시선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일본과 조선 학생들의 흔적


http://ebs.daum.net/historye/episode/25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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