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3. 12:27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때 일본에서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공개됐다. 


사진 윗부분에는 ‘大正 十二年(다이쇼 12년) 九月一日 (9월 1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다이쇼’는 1912년부터 재위한 요시히토 일왕의 연호이다. 다이쇼 12년 9월 1일은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1923년 9월 1일이다. 사진 속에는 수십 구의 시신이 나열돼 있으며 일부 시신은 하의가 벗겨져 있다. 시신 옆에는 남성들이 죽창 또는 쇠꼬챙이로 보이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서 있다. 

기록사진 연구가인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은 

 “여성들의 하의가 벗겨져 있는 등 참혹하고 수치스러워서 공개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일본 교과서에 학살이라는 표현을 없애기로 했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해 공개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앞서 도쿄도 교육위원회는 자체 발행하는 고교 일본사 부교재 ‘에도에서 도쿄로’에 기술된 “대지진의 혼란 와중에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됐다”라는 문장을 내년부터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석에는 대지진의 와중에 ‘조선인이 귀중한 목숨을 빼앗겼다’고 적혀 있다”로 바꾸기로 했다. 도쿄도 교육위원회는 학살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일으킬 수 있어 표현을 바꾸기로 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도쿄도 교육위원회의 결정은 일본 내에서도 비판을 받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일본 정부 중앙방재회의가 2008년 간토대지진 관련 보고서에서 유언비어에 의한 살상 사건 대상은 조선인이 가장 많았다며 “학살이라는 표현이 타당한 사례가 많았다”고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야마다 쇼지 릿쿄대 명예교수도 “잔혹한 사실을 직시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역사로부터 배울 수 없다”며 “교육 현장에서 진실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본 정부는 1923년 9월 1일 규모 7.9의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자 흉흉해진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집어넣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이에 흥분한 일본인들이 재일 조선인 2천600-6천600여 명을 학살했다.

<경향신문 2013-02-0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2031134171&code=940100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최근 공개된 '간토(關東)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정 사진'의 진위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기록사진 연구가인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은 지난 3일 사진 윗부분에 '大正 十二年 九月一日(다이쇼 12년 9월 1일)'이라고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날짜(1923년 9월 1일)가 적혀 있는 사진 2장을 공개했다.

한 사진 속에는 하의가 벗겨진 수십 구의 시신이 나열돼 있으며 또 다른 사진에는 부패한 시신이 겹겹이 쌓여 있는 장면이 담겨 있다. 정 관장은 "개가 죽어도 비석을 세울 정도로 장례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 사람이면 죽은 사람의 시신에서 하의를 벗겼겠느냐"면서 간토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를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 우익지인 산케이 신문과 일부 일본인들은 하의가 벗겨진 점만 보고 조선인 희생자의 사진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반박했다.

한 일본인 독자는 "1920년대 일본에서는 가로쓰기의 경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써내려가는 게 일반적이었었는데 정 관장이 공개한 사진에는 '다이쇼 12년 9월 1일'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혀 있다"면서 "전쟁이 끝나고 사진에 쓴 게 아니겠느냐"고 연합뉴스 도쿄지사를 통해 의혹을 제기했다.

또 "사진 속 시신의 하의가 벗겨져 있다고 했는데 당시 일본 여성 중에는 하의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하의가 벗겨져 있다고 해서 조선인 희생자의 사진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하의가 벗겨진 시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1911년(메이지 44년) 당시 환락가였던 도쿄 요시하라에서 발생한 대화재 사진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본 동북예술공과대학 동북문화연구센터 자료실(http://www.tobunken-archives.jp/DigitalArchives)에 소장된 똑같은 장면을 담은 사진에는 '신요시하라공원의 참상'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도 이 사진이 요시하라 대화재 사진인지 간토대지진 사진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산케이 신문은 4일 인터넷판에 "공개된 사진은 동북예술공학 동북문화연구센터의 아카이브에 게재되어 있으며, 메이지 44년 '요시하라 대화재' 당시의 사진으로 '신요시하라공원의 참상'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다"면서 "정 씨가 제공한 사진은 간토대지진 때의 사진으로 보이지만 조선인 학살을 증명할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보도했다.

한 일본인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이 사진은 요시하라 화재 때 사진이 아니라 역시 간토대지진 사진인 것 같다. 요시하라 화재 사망자는 8명이었다"면서 하지만 "사진의 피해자들은 조선인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사진 역시 간토대지진의 사진은 맞지만 조선인 희생자의 사진은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다. 일본 사이트(http://www.meijishowa.com)에는 이 사진이 도쿄 육군본소피복창(陸軍本所被服廠) 간토대지진 희생자들을 촬영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 관장은 "내가 공개한 사진은 원본 사진인데 원본 사진에는 '신요시하라공원의 참상'이라는 글이 적혀 있지 않다"면서 "동북예술공과대학 동북문화연구센터 자료실에 소장된 사진이 원본인지 인쇄본인지 먼저 밝혀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당시 일본 여성 중에 하의를 입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사진 속 시신은 하의가 벗겨진 것은 물론 시신의 중요 부위가 훼손돼 있다"면서 "사진에 적혀 있는 '다이쇼 12년 9월 1일'이 최근에 쓴 것인지, 당시 쓴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간토대지진 원본 인화지와 글을 쓴 잉크를 검증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http://media.daum.net/foreign/japan/newsview?newsid=20130204154814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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