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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26 《백제삼서》(百濟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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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삼서》(百濟三書)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인 《니혼쇼키》(일본어: 日本書紀/にほんしょき,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백제 관련 세 가지 역사서인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를 통칭한 말이다. 현전하지 않는다.
《백제본기》(百濟本記)는 백제의 사서이다.
《니혼쇼키》(日本書紀)의 게이타이키(繼體紀) 대부분, 긴메이키(欽明紀)의 절반에 달하는 분량이 《백제본기》를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으며, 《니혼쇼키》의 편찬자들이 백제삼서 중에서도 특히 중시했던 책으로서 백제의 인명과 관직명, 당대의 역사적인 사실 등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니혼쇼키》편찬 당시 유력 씨족 가문의 가전적인 기록이 제출되었는데 이것을 본기(本記)라 부른 것으로, 《백제본기》는 일본 조정 내에서 벼슬하던 구다라노코니키시(百濟王) 집안의 집안 전승 기록이다.
《니혼쇼키》편찬당국에서 조정의 유력 씨족들에 대해 가문의 전승기록을 제출하게 명할 때에 구다라노코니키시 일족들도 마땅히 그러한 기록을 제출했어야 한다. 백제 왕실을 중심으로 백제 조정 내의 동향 및 신라나 가야, 왜와의 외교관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보유한 《백제본기》의 원사료를 이용해 《니혼쇼키》편찬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백제 왕족의 후손인 구다라노코니키시 일족이 가장 유력하다.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제12권, '백제의 문화와 생활' p.331~332
의자왕의 왕자인 선광(善光)을 시조로 하는 구다라노코니키시 일족은 본국 백제의 멸망이 돌이킬수 없는 시점에 이른 뒤 구다라노코니키시라는 성씨와 함께 일본의 관료체제에 편입되었으며, 그들에 의해 《백제본기》의 개변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니혼쇼키》에서 천황이 백제왕에게 '주었다(賜)'고 적고 있는 임나4현 및 기문(己汶)·대사(帶沙) 등지의 땅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부근에서부터 지금의 전라북도 영산강, 경상남도 하동의 섬진강 유역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이는 백제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백제왕이 독립적으로, 그리고 정당하게 통치하고 있던 영토와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7, 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일본의 관료사회에 편입되어 있던 백제계 왕족과 귀족들로서는, 일본 내에서의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 입지 보전이나 그 향상을 위해서도, 그들 조상에 대해 '천황으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았다'고 아첨에 가까운 표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 이러한 관념이 실체화되어 '고구려·백제·신라·가야는 바다 바깥의 번병(속국)', '처음 내려주신 봉지'를 가진 '관가를 둔 나라'라는 《니혼쇼키》 게이타이키 속의 왜곡되고 굴절된 역사상이 생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백제본기》의 내용이 위덕왕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덕왕의 즉위 시기를 전후해 《백제본기》의 원사료가 성립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백제의 관위와 인명을《삼국사기》등의 사료에서 실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좌평·달솔·은솔·한솔의 고위관료에 그치고 있으며, 나솔 이하의 관료(특히 '덕德'이 들어가는 관위를 가진)의 인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백제본기》를 인용한 《니혼쇼키》에는 장덕 구귀(久貴), 고덕 마차문(馬次文)
《니혼쇼키》권제19, 긴메이키 10년(549) 6월 신묘(7일)조
, 시덕 작간나(灼干那)
《니혼쇼키》권제19, 긴메이키 11년(550) 4월 을미(16일)조
《니혼쇼키》권제19, 긴메이키 15년(554) 2월조
등과 같이 '덕'이 들어가는 관위를 가진 인명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백제본기》에서도 왜왕을 '천황'으로 적고 있으며
《니혼쇼키》권제19 긴메이키 9년 4월 갑자(3일)조에 '可畏天皇'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왜(倭)'나 '대왜(大倭)'라는 용어를 대신해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백제본기》를 인용한 《니혼쇼키》게이타이키 7년(513) 여름6월조에 '委意斯移麻岐彌'라고 적은 것에서, '委'를 '倭'의 오자로 보고 원본《백제본기》에는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왜'라고 적혀있던 것을 '일본'으로 개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본기》의 기사가 꼭 백제와 왜의 관계만을 반영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고, 인접한 고구려나 왜국의 내정에 관한 문제도 서술하고 있다.
게이타이 천황의 죽음이 재위 25년인 서기 531년에 있었다
《니혼쇼키》권제17, 게이타이키 25년(531)조
[廿五年春二月, 天皇病甚. 丁未, 天皇崩于磐余玉穗宮, 時年八十二. 冬十二月丙申朔庚子, 葬于藍野陵.【或本云『天皇廿八年歲次甲寅崩』而此云廿五年歲次辛亥崩者, 取百濟本記爲文. 其文云『大歲辛亥三月, 師進至于安羅營乞■城. 是月, 高麗弑其王安. 又聞, 日本天皇及太子皇子俱崩薨.』 由此而辛亥之歲當廿五年矣. 後勘校者知之也.】
25년(531) 봄 2월에 천황(天皇)의 병이 심하였다. 정미(7일)에 천황이 이와레노타마호노미야(磐余玉穗宮)에서 붕어하니 이때 나이 82세였다. 겨울 12월 병신 초하루 경자(5일)에 아이노노미사사키(藍野陵)에 장사지냈다.【어떤 책에는 『천황은 (즉위) 28년인 세차(歲次) 갑인(534)에 붕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25년인 세차 신해에 붕하였다고 한 것은 《백제본기》의 글을 따른 것이다. 그 글에서 말하기를 『태세(太歲) 신해 3월에 군사를 안라(安羅)에 진주시키고 걸탁성(乞■城)을 쌓았다. 이 달에 고려(고구려)에서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 또한 들으니 일본(日本)의 천황과 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신해의 세(歲)란 25년이 마땅하다. 후세의 교감하는 자는 알 것이다.】
《니혼쇼키》에 따르면 성왕은 50기를 이끌고 신라를 기습하러 간 것이 아니라, 먼저 전선에 가있던 아들 부여창(훗날의 위덕왕)을 위로하기 위해 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삼국사기》권제26, 백제본기4, 성왕 32년(554) 가을 7월조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니혼쇼키》권제19, 긴메이키 15년(554) 12월조
[餘昌謀伐新羅, 耆老諌曰 "天未與, 懼禍及." 餘昌曰 "老矣何怯也. 我事大國, 有何懼也?" 遂入新羅國, 築久陀牟羅塞. 其父明王憂慮, 餘昌長苦行陣久廢眠食, 父慈多闕, 子孝希成. 乃自■迎慰勞. 新羅聞明王親來, 悉發國中兵斷道擊破. 是時新羅謂佐知村飼馬奴苦都【更名谷智.】曰 "苦都賤奴也. 明王名主也. 今使賤奴殺名主, 冀傅後世莫忘於口." 已而苦都乃獲明王, 再拜曰 "請斬王首." 明王對曰 "王頭不合受奴手." 苦都曰 "我國法違背所盟, 雖曰國王當受奴手."【一本云 『明王乘踞胡床, 解授佩刀於谷知令斬.』】明王仰天大憩涕泣, 許諾曰 "寡人每念, 常痛入骨髓. 願計不可苟活." 乃延首受斬. 苦都斬首而殺, 堀坎而埋.【一本云『新羅留理明王頭骨, 而以禮送餘骨於百濟. 今新羅王埋明王骨於北廳階下. 名此廳曰都堂.』】]
《백제본기》가 서술한 고구려의 사정
《니혼쇼키》권제19, 긴메이키 6년(545)조
[是歲, 高麗大亂被誅殺者衆.【百濟本記云 『十二月甲午(廿), 高麗國細群與麤群戰于宮門, 伐鼓戰鬪, 細群敗, 不解兵三日, 盡捕誅細群子孫. 戊戌(廿四), 狛鵠香岡上王薨也.】]
이 해(545)에 고려(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워 주살된 자가 많았다.【백제본기에서 말하기를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과 추군이 궁문에서 북을 치며 싸웠는데, 세군이 패하였으나 사흘 동안 병사를 해산하지 않고 세군의 자손을 잡아 죽였다. 무술(24일)에 박(狛)의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이 훙하였다.』고 하였다.】
《니혼쇼키》권제19, 긴메이키 7년(546)조
[是歲, 高麗大亂. 凡鬪死者二千餘.【百濟本記云 『高麗以正月丙午, 立中夫人子爲王, 年八歲. 狛王有三夫人, 正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 其舅氏麤群也. 小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狛王疾篤, 細群麤群, 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二千餘人也.】]
이 해에 고려가 크게 어지러웠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 명을 헤아렸다.【백제본기에서 말하기를 『고려는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 박왕(狛王)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고 중부인이 세자를 낳았는데 그 구씨(舅氏, 사돈)가 추군이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구씨(舅氏)는 세군이었다. 박왕이 병들자 세군과 추군은 각자 그쪽 부인의 아들을 세우고자 했다. 때문에 세군측 죽은 자가 2천 명을 헤아렸다.』고 하였다.
《백제기》(百濟記)는 백제의 사서이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인 《일본서기》(일본어: 日本書紀/にほんしょき,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백제삼서 중의 하나이며, 가장 이른 시기에 인용되어 있는 책이다. 《일본서기》신공기(神功紀)와 응신기(應神紀)에 걸쳐서 출전을 일일이 밝히지 않은 경우에도 이 《백제기》를 인용했거나 《백제기》를 기초자료로 이용하여 작성한 내용이 적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그것과도 상당한 정합성을 보이고 있다.
왕의 휘를 기록할 때에도 《삼국사기》원문과 일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화(阿花)ㆍ직지(直支)ㆍ귀수(貴須)처럼 《삼국사기》의 주와 동일 내지는 유사한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대성(大城)이나 대후(大后) 같은, 한국의 다른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용어가 등장하는 점도 흥미롭다.
일본 즉 왜국과 그 왕을 가리켜 귀국(貴國)ㆍ대왜(大倭) 내지는 '천황(天皇)'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천황이라는 용어는 7세기 말 덴무천황((
'귀국'이라는 용어는 《백제기》안에서만 보이는 용어이며, 일본을 지칭하는 2인칭의 용어로 보든 '귀한 나라' 내지는 '존엄한 나라'라는 뜻으로 읽든 간에 원래 백제에서 쓰이던 용어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밖에 왜 조정을 국한해서 지칭하는 용어로 천조(天朝)라는 용어도 사용되고 있으나 모두 《일본서기》편찬단계에서 원문이 개서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서기》안에 인용된 《백제기》의 기록 가운데에서도 백제가 주체로 되어 있는 기록(응신기 8년ㆍ25년조, 웅략기 20년조)과 함께 제3자로 취급된 기록(신공기 62년조)가 양립하고 있다. 하지만 신공기 62년조를 제외하면
대개는 '이에 우리(我)의 침미다례를 빼앗았다[故奪我沈彌多禮]
《일본서기》권제10, 응신기 8년 봄3월조
목만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우리 나라(我國)로 들어와서[來入我國]', '우리 나라(我國)의 국정을 잡았다[執我國政]'
《일본서기》 권제10, 응신기 25년조
라고 적는 등 대체로 백제가 주체가 된 기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본서기》 안에서 《백제기》가 직접적으로 인용된 부분은
신공기 62년조
六十二年, 新羅不朝. 卽年遣襲津彦擊新羅.【百濟記云 『壬午年, 新羅不奉貴國. 貴國遣沙至比跪令討之. 新羅人莊飾美女二人, 迎誘於津. 沙至比跪受其美女, 反伐加羅國. 加羅國王己本旱岐ㆍ及兒百久至ㆍ阿首至ㆍ國沙利ㆍ伊羅麻酒ㆍ爾汶至等, 將其人民, 來奔百濟. 百濟厚遇之. 加羅國王妹旣殿至, 向大倭啓云 "天皇遣沙至比跪, 以討新羅. 而繩新羅美女捨而不討, 反滅我國. 兄弟人民皆爲流沈, 不任憂思. 故以來啓." 天皇大怒, 旣遣木羅斤資, 領兵衆來集加羅, 復其社稷.』】
응신기 8년 봄3월조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旡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及峴南ㆍ支侵ㆍ谷那ㆍ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25년조
廿五年, 百濟直支王薨. 卽子久爾辛立爲王. 王年幼, 大倭木滿致執國政, 與王母相婬, 多行無禮. 天皇聞而召之.【百濟記云 『木滿致者, 是木羅斤資討新羅時, 娶其國婦而所生也. 以其父功專於任那, 來入我國往還貴國. 承制天朝執我國政, 權重當世. 然天皇聞其暴召之.』】〉
웅략기(雄略紀) 20년조
廿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爰有少許遺衆, 聚居倉下. 兵粮旣盡, 憂泣茲深. 於是, 高麗諸將言於王曰 "百濟心許非常. 臣每見之, 不覺自失. 恐更蔓生. 請遂除之." 王曰 "不可矣. 寡人聞, 百濟國者, 爲日本國之官家, 所由來遠久矣. 又其王入仕天皇, 四隣之所共識也." 遂止之.【百濟記云 『盖鹵王乙卯年冬, 狛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尉禮. 國王及大后王子等, 皆沒敵手.』】
이밖에 신공기 47년 여름4월조와 49년 봄3월조도 직접적으로 《백제기》와의 관련여부를 수록하지는 않았지만 위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백제기》를 기초자료로 이용해 작성한 내용으로 여겨진다.
《백제기》의 내용상 성격은 백제와 왜의 통교라는 역사 사실과 함께, 백제의 장수이자 귀족이었던 목라근자(木羅斤資)와 목만치(木滿致) 부자의 활동을 중심으로 백제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서기》신공기 49년(369) 목라근자와 사사노궤 등이 이끄는 병력이 가야 7국과 전라도 지역을 평정하였다는 기록도 원래는 《백제기》에 수록된 내용의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백제기》가 마지막으로 인용된 웅략기 20년(475) 기사도 백제의 수도 한성 함락, 즉 목만치(목례만치)가 문주왕을 따라 남쪽으로 간 시점이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자체는 백제 8성씨의 하나인 목(木)씨의 집안 전승 즉 가전(家傳)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백제가 아닌 일본열도에서 성립된 것이지만
가야 왕족들의 백제 망명, 목만치와 구이신왕의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추문 같은, 백제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그 원전은 백제에서 성립된 원사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웅략기 20년조에 인용된 《백제기》에서는 고구려를 박(狛) 즉 '이리' 같은 짐승으로 부르고 있는 데에서, 왕성을 함락시키고 국왕 일족을 시해한 고구려에 대한 적의를 느낄 수 있는데, 백제가 고구려에 대해서 강한 적의를 느끼고 있었던 시기가 늦어도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공격 때(612) 백제가 은밀하게 고구려를 도왔던 시점 이전이라는 것을 들어, 원본《백제기》의 최초 성립을 7세기 초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백제신찬(百濟新撰)》은 백제의 사서이다.
백제의 왕족이었던 곤지를 시조로 하는 집단의 가전(家傳)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전하지 않는다.
《일본서기》안에서 《백제신찬》은 웅략기(雄略紀)와 무열기(武烈紀)를 중심으로 인용되어 있으며, 백제삼서 가운데 가장 인용 분량이 적다.
《일본서기》권제14, 웅략기 2년조
[二年秋七月, 百濟池津媛違天皇將幸, 婬於石河楯【舊本云 『石河股合首祖楯』】天皇大怒, 詔大伴室屋大連, 使來目部張夫婦四支於木, 置假■上, 以火燒死.【百濟新撰云 『己巳年, 蓋鹵王立. 天皇遣阿禮奴跪來索女郞, 百濟莊飾慕尼夫人女曰適稽女郞, 貢進於天皇.』]
2년(458) 가을 7월, 백제의 지진원(池津媛)은 천황(天皇)이 장차 행차하려 하는데 이를 거역하고 이시카와노 다테(石河楯)【구본(舊本)에는 『이시카와노 코무라노오비토(石河股合首)의 조상 다테(楯)』라 했다.】와 음행하였다. 천황은 크게 노하여, 오토모노 무로야노 오오무라치(大伴室屋大連)에게 조하여, 구메베(來目部)를 시켜 부부의 사지를 나무에 묶고 단 위에 올려 태워 죽였다.【《백제신찬》에서 말하였다. 『기사년에 개로왕(蓋鹵王)이 섰다. 천황은 아례노궤(阿禮奴跪)를 보내어 여자를 구하였다. 백제는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을 아름답게 꾸며 적계여랑(適稽女郞)이라 하고 천황에게 바쳤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즉위는 455년에 있었고 기사년은 개로왕의 부왕인 비유왕의 즉위년으로 서기로 429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백제신찬》의 기록은 서로 맞지 않는다.
《일본서기》권제14, 웅략기 5년 가을 7월조
[夏四月, 百濟加須利君【盖鹵王也.】飛聞池津媛之所燔殺【適稽女郞也】而籌議曰 "昔貢女人爲釆女, 而旣無禮, 失我國名. 自今以後不合貢女." 乃告其弟軍君【崑攴君也.】曰 "汝宜往日本以事天皇." 軍君對曰 "上君之命不可奉違. 願賜君婦而後奉遺." 加須利君則以孕婦, 旣嫁與軍君曰 "我之孕婦旣當産月. 若於路産, 冀載一船, 隨至何處速令送國." 遂與辭訣奉遣於朝. 六月丙戌朔, 孕婦果如加須利君言, 於筑紫各羅嶋産兒. 仍名此兒曰嶋君. 於是, 軍君卽以一船送嶋君於國. 是爲武寧王. 百濟人呼此嶋曰主嶋也. 秋七月, 軍君入京. 旣而有五子.【百濟新撰云 『辛丑年, 盖鹵王遣弟昆攴君, 向大倭侍天皇. 以脩兄王之好也.』】]
여름 4월, 백제의 가수리군(加須利君)【개로왕이다.】은 지진원【적계여랑을 말한다.】이 화형당했다는 말을 듣고 상의하여 말하였다.
"옛부터 여인을 바쳐 채녀(釆女)로 삼았는데, 이제 무례를 범하여 우리 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으니, 앞으로는 여자를 바치지 않을 것이다."
이에 그 아우 군군(軍君)【곤지군(崑攴君)이다.】에게 영하여 말하였다.
"네가 마땅히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겨야 할 것이다."
군군이 대답하였다.
"상군(上君)의 명은 받들어 어길 수 없습니다만, 왕의 부인을 주시면 받은 뒤에 떠나겠습니다."
가수리군은 곧 임신한 아내를 군군에게 시집보내고 말하였다.
"내 임신한 아내는 곧 산달이 된다. 가는 길에 애가 태어나면, 배 한 척에 태워서 어디에서든 속히 본국으로 돌려보내다오."
드디어 작별인사를 하고 조정으로 파견되었다. 6월 병술 초하루에 임신한 아내는 과연 가수리군의 말대로 쓰쿠시(筑紫)의 가카라시마(各羅嶋)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에 그 아이의 이름을 도군(嶋君)이라 하였다. 그리고 군군은 곧 배 한 척에 도군을 태워 나라로 보냈다. 이가 무령왕이 되었다. 백제인은 그 섬을 가리켜 주도(主嶋)라 하였다. 가을 7월에 군군이 입경(入京)하였다. 드디어 다섯 아들을 두었다.【《백제신찬》에서 말하였다.『신축년에 개로왕은 아우 곤지군(昆攴君)을 보내어 대왜(大倭)로 가서 천황을 섬기고 이로써 형왕(兄王)의 우호를 닦도록 하였다.』】
《일본서기》권제16, 무열기 4년조
[是歲, 百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而立嶋王. 是爲武寧王.【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立. 諱斯麻王. 是混攴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 混攴向倭時, 至筑紫嶋生斯麻王, 自嶋還送. 不至於京産於嶋, 故因名焉.』 今各羅海中有主嶋, 王所産嶋, 故百濟人號爲主嶋. 今案, 嶋王是蓋鹵王之子也. 末多王是混攴王之子也. 此曰異母兄未詳也.】]
이 해에 백제의 말다왕(末多王)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하게 굴었다. 국인(國人)이 마침내 제거하고 도왕을 세웠으니 이가 무령왕(武寧王)이 되었다.【《백제신찬》에서 말하였다.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을 저지르니 국인이 함께 제거하였다. 무령이 섰는데 휘는 사마왕(斯麻王)이며, 곤지 왕자의 아들이라 즉 말다왕의 이모형(異母兄)이다. 곤지가 왜로 향할 때 츠쿠시의 섬에 이르러 사마왕이 태어났고 섬에서 돌려보냈다. 수도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낳았기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지금 가카라(各羅) 바다 위에 주도가 있는데 왕을 낳은 섬이라 하여 백제인들이 주도라고 불렀다. 지금 상고하면 도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며 말다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이걸 이모형이라 한 것은 알 수 없다.
종래의 무령왕의 출생과 사망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일본서기》및 《백제신찬》에서는 곤지가 개로왕의 명을 받고 왜국으로 건너간 461년 6월 1일이라는 날짜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971년 충청북도 공주시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무령왕의 사망 당시 나이가 62세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무령왕의 사망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과 같은 523년의 일로 이것으로 무령왕의 탄생년도를 추적한 결과 461년이 무령왕의 탄생한 해라는 점과 함께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