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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6 친일 사학자
- 2014.09.06 1949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 2014.09.06 최능진
- 2014.09.06 동덕여고 교사 이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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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일 사학자들이 독립유공자를 심사하겠습니다"
2014-06-10 11:56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41]친일파 신석호,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영화 누리다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는 신채호, 박은식 선생 등 민족사학자들이 한 손에는 총을,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우리 역사를 치열하게 쓰고 있지 않았을까?
◈ 친일파 신석호, 이병도와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에 나서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물은 단 2명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다.
이승만이 쫒겨나고 5.16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인 1962년, 군사정권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선정과 표창에 나섰다.
공적조사위원회에 참석한 김승학, 김학규, 김홍일, 오광선 등 평생을 조국 해방에 바친 독립운동가들은 깜짝 놀랐다.
천하가 다 아는 대표적인 친일 사학자 이병도와 신석호가 떡하니 심사위원실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분노한 어느 독립운동가가 일갈했다.
"임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해 뭐 암마?"
두 사람은 얼굴만 붉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웃기는 것은 그 망신을 당하고도 두 사람은 계속 공적심사위원회에 기웃거렸다는 사실이다.
다음 해에는 신석호가, 1968년에는 두 사람 다 참석하고, 1980년에는 신석호가 끈질기게 끼어들었다.
그 전해에 신석호는 사망하고, 이병도는 나이가 들어 기력이 떨어져서 불참했다고 한다.
<장면 2>
2004년 9월 국사편찬위원회는 친일사학자 신석호의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지' 발간 계획을 취소했다.
위원회는 "과거사 규명 논란 등 어수선한 세상에 신석호가 '친일 논쟁'에 휘말릴 우려가 있어 논의 끝에 발간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 걸 신석호의 지인과 제자들만 모르고 있었다.
2005년 3월 28일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일제청산위원회는 '민족 고대'를 더럽힌 학내 친일잔재 명단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기자회견에서 "일제에 편승해 매국 매족했던 이들이 해방 후에도 호의호식하며 기득권을 누려온 역사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보성전문학교 교장, 고려대 총장, 교우회장에 이르기까지 민족을 배신한 자들의 면면을 찾았다. 앞으로 연구 조사를 통해 대학 내 (친일) 인적 잔재와 학문적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강조했다.
제자들이 민족의 혼을 좀먹은 스승들을 내치는 장면이다.
선정된 친일파에는 신석호와 이병도를 비롯해 고원훈, 김성수, 선우순, 유진오, 이각종, 장덕수, 조용만, 최재서가 선정됐다.
제자들이 발표한 스승 신석호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수사관 등으로 활약하며 일제의 역사왜곡, 식민사관 구축에 동참, 협력했음.
(특징) 해방 후에도 국사편찬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
◈ 신석호, 졸업과 동시에 곧바로 조선사편수회에 합류하다
이에 따라 부랴부랴 준비작업을 거쳐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발족했다.
총독부가 노린 것은 한국인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한국사 전체를 재조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한반도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했다는 허구를 도입했다.
처음에는 일본인 학자들로만 출발한 조선사편수회에 경성제국대학을 갓 졸업한 식민사학자들이 한명씩 두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5명,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신석호. 홍희 등이 그들이다.
거기서 열심히 충성을 다한 결과로 촉탁에서 시작해 1930년 수사관보, 1937년 수사관으로 착실히 승진했다.
황국사관 학자들과 식민사학자들은 드디어 1938년 <조선사> 총 35권을 완간했다.
이 방대한 저서의 골자는 간단하다.
"조선사는 주체성이 없어 주변 민족의 지배와 간섭, 침략에 의해 전개되어왔다. 조선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타율성에서 벗어나 발전한다"
◈ 신석호, 반민특위가 무산되자 재빨리 국사학계 접수하다
신석호는 해방 후에도 건재를 과시했다.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만들어 교사를 양성했다.
역사를 왜곡한 장본인이 새 국가의 인재를 키운 셈이다.
이어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취임해 열심히 식민사관을 교과서에 반영하고, 틈틈히 독립운동사도 저술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기록을 보면, 신석호는 자기 재임 기간을 '1929.4~1965. 1.21'로 적어 놓았다.
그가 보기에는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사편수회의 연장인 셈이다
이승만 정권 때는 이승만을 찬양하고, 박정희 시대에는 그를 칭송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민족주의자로 둔갑했다.
해서는 안될 독립운동사 기술과 독립유공자 심사는 물론, 애국지사들의 기념사업회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1954년에 민충정공(민영환) 기념사업회 이사로 임명돼 신도비문까지 지었다.
다음 해에는 애국가 작사가 조사위원으로, 1958년에는 독립기념사업회 위원으로 취임한다.
1961년에는 이준 열사 사인조사위원회 위원으로, 1963년에는 동학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등극한다.
동시에 이병도는 서울대 교수로,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로 역할을 분담해 사학계를 주름잡고 다녔다.
◈ 이제야 실상이 드러나는 식민사관과 친일 사학자의 욕된 인생
신석호가 죽은 지 20년이 넘어서야 그의 친일행각과 해방 후 행적이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우리 현대사의 또다른 비극이다
그들이 반민특위 해체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한국사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신석호와 이병도를 사랑하는 제자로 여겼던 황국사학자 쓰다 소키치나 이케우치 히로시가 해방 후 그들의 활약상을 봤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역시 "한민족의 민족성은 강자에는 굴종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그 반대이며, 거기서 노예적 근성이 보인다"고 흐뭇하게 웃지 않을까?
스에마끼 야스카즈가 누구인가?
그는 "고대부터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황국사관의 선봉장이었다.
그는 대표작 <임나흥망사>에서 "일본의 한반도 영유(임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본의 자랑이며, 구한말 일본에 의한 조선 병합은 고대의 복현이다"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이런 인물을 김원룡은 하늘처럼 떠받들며 충성을 다했다.
경성제대에서 스에마끼 야스카즈로부터 일제 식민사학을 전수한 김원룡은 그런 사관에 입각해 '원삼국시대설' 등 해괴한 학설을 주장하고 다녔다.
이런 인물이 '고고학계의 태두'라고 불리며 서울대 고고미술과 교수, 대학원장을 지내고 역사학회 회장, 한국고고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한다.
일제는 1927년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인은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고 끊임없이 세뇌시켜왔다.
그리고 일제의 이같은 세뇌작업은 문창극을 통해 다시 한반도에서 부활하고 있다.
지하에 있는 친일사학자의 정신적 기둥 '쓰다 소키치'가 들으면 "드디어 우리가 해냈다"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쓰다 소키치나 스에마끼 야스카즈 등 황국사학을 신봉한 일본인 학자들이 전파한 식민사관의 핵심은 3가지다.
1.'일선동조론'으로, 일본 민족의 조상과 한민족의 조상은 애초에 하나였으니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
2.'만선사관'으로 한반도는 대륙에서 실패한 정치 세력이 옮겨 자리잡은 곳으로 만주와 하나로 묶어야만 역사나 문화가 체계화된다.
3.'정체성론'으로 한반도는 발전이 정체돼 있었고, 일본 때문에 고대적인 것에서 근대적인 것으로 도약했다.
문창극의 주장은 정확하게 세번째 논리와 일치한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한반도에 남겨놓고 떠난 '식민사관의 망령'이 이제 대한민국 '일인지하 만인지상' 권력자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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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일경찰을 처단한다고? '반민특위'를 때려부셔라~"
2014-06-06 06:00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39]무장경찰이 난입해 무법천지가 된 특위 사무실
1949년 6월 6일 아침 남대문로에 있는 반민특위 사무실.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찰관 40명이 일제히 사무실로 난입했다.
건물 주변은 기마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휘두르면서 소리 질렀다.
"여기 있는 놈들 모조리 끌고 가라"
총을 든 경찰관들은 닥치는대로 특위 직원들을 붙잡아 두둘겨 패면서 쓰리쿼터에 실었다.
여기 저기서 주먹과 발길질이 날라오면서 욕설을 해댔다.
"여기 있는 놈들 대부분이 빨갱이들이야~ 여긴 빨갱이 소굴이라구"
모두 35명이 끌려 가고 통신기기와 호신용 무기, 서류 전체를 압수해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국법을 수행 중인 국가요원들에게 이러고도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으냐?"
"최운하 과장과 조응선 주임을 진작 내주셨으면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내놓으시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며칠 전 반민특위가 체포한 악질 친일경찰 최운하와 조응선을 풀어달라는 얘기다.
경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급하게 달려온 권승렬 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은 권총까지 뺏기고 밀려났다.
중부서로 붙잡혀간 특위 직원들 35명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중 22명이 심하게 두둘겨 맞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악질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법에 의해 설치된 반민특위가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 드디어 반민특위 발족, 악질 친일파들 속속 체포되다
이 법은 반민족행위자의 범주와 처벌 규정, 특위의 구성과 활동, 특별재판부 구성을 담고 있었다.
이 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948년 10월 12일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국회의원인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고, 중국에서 독립투쟁을 벌이다 남한에서 돌아온 후 납북돼 북한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반민특위는 국민의 성원을 업고 의욕적으로 출발했다.
그는 조선비행기 공장을 세워 일제의 침략전쟁에 기여한 인물로, 해외도피를 기도하다 체포되었다.
이어 만주에서 일본 헌병의 앞잡이로 무려 250여 명의 독립투사를 붙잡아 17명을 처형한 악질 친일파 이종형을 잡아들였다.
그는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도 "내가 감옥에 들어온 건 빨갱이를 잡는데 앞장서서 사방에 적을 만든 탓"이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했다.
이어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가 변절한 최린, 친일 변호사 이승우, 평안북도 특고과장을 지내면서 많은 독립투사를 잡아들인 악질 경찰 이성근, 고종황제의 당질로 매국 활동을 한 이기용을 구속했다.
이기용은 자택 응접실에 일왕 히로히토의 사진을 걸어놓고, 일본 왕실로부터 받은 훈장 30여개를 진열해놓아 조사관들을 놀라게 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25일 드디어 악질 중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을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전국 도처에서 독립운동가를 무차별적으로 체포해 여러 명을 고문해서 죽인 친일경찰의 상징이었다.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노기충천하여 김상덕 등 특위위원들을 경무대로 불러 그를 석방하라고 강요했다.
특위위원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국내에 지지기반이 약한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친일파를 보호해 장기집권의 무기로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민특위와 정부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먼저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진행됐다.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난수와 사찰과 차석 홍택희는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불러 국회의원 3명을 납치해 38도선상의 어느 지점으로 끌고 오면 그 다음은 경찰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겁을 먹은 백민태가 검찰에 자수하면서 이 음모는 무산됐다.
친일경찰들은 급기야 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자"며 준비에 들어갔다.
습격 전날 밤 시경국장 김태선에게 계획을 전해들은 내무차관 장경근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태의 책임은 내가 진다.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다"며 이승만의 사전 양해가 있음을 암시했다.
이렇게 해서 친일경찰들은 1949년 6월 6일 백주대낮에 국가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이다.
◈ 반민특위의 무력화, 소장파 의원들의 구속, 백범 암살…무산된 친일파 처단
물리력을 빼앗긴 김상덕 위원장과 특위 위원들은 사퇴서를 제출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어 반민특위의 정신적 기둥인 백범 김구마저 암살당하면서 '친일파 처단'은 물 건너가버리고 대한민국은 '친일파의 천국'으로 전락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상덕은 북한 내무서원들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갔다.
그 뒤의 소식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2006년 9월 3일 북한을 방문한 독립운동가 유족들에 의해 평양 룡궁동에 있는 재북인사묘역에 묻혀 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이 제대로 실시되기까지 17년동안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 단 두 명뿐이었다.
이승만 혼자 받으면 비난을 받을 것 같으니까 이시영을 끼워 넣었다는 해석이 정설이다.
이것이 독립을 되찾은 대한민국의 실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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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경찰 퇴진하라"…어느 독립운동가의 최후
2014-06-03 11:37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38]이승만 집권 후 첫 작품은 '독립운동가 최능진 체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야산.
조용한 산중에 갑자기 '탕~탕~탕' 총소리가 울렸다.
독립운동가이자 미 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을 지낸 52세의 최능진의 심장을 향한 총성이었다.
최능진은 가족들에게 한 장의 유서를 남겼다.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 아버지의 금일의 운명은 정치적 모략에서 비롯된 것인 바, 너희는 조금도 누구에게 반감을 갖지 말고 또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생각도 하지 마라"
해방 정국에서 국립경찰의 간부이자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인 최능진은 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일까?
◈ 안창호 선생과 함께 투옥되다
귀국해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1937년 3월 흥사단을 말살하려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안창호, 조만식 선생 등과 함께 투옥된다.
남쪽으로 향하던 중 그는 부하들로부터 어처구니 없는 소식을 듣는다.
"남조선에서는 아직도 친일 부역 경찰 출신이 그대로 치안을 맡고 있는 모양입네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북조선에서는 친일파 청산 하나는 확실히 하고 있지 않습네까?"
"내~ 이 놈들을 그냥 두지 안캈어"
1945년 9월 15일 해주에 도착해 남조선 신문을 처음으로 구해 본 최능진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경찰에 투신한다.
◈ '친일경찰 청산'을 둘러싸고 경찰 수뇌부와 격론을 벌이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경찰관 강습소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이 곳에 남아 있던 조선총독부 경찰 출신으로부터 사표를 받아낸 일이었습니다"
한달 후 미군정이 오늘의 경찰청인 경무부를 창설하자 수사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능진은 이 곳에서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가 친일파를 경찰의 요직에 앉히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
수없이 많은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죽였던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에 취임한 것을 비롯해 이익흥, 최운하, 최연 등 악명 높은 친일경찰들이 속속 중용됐다.
최능진은 경찰 수뇌부에게 친일경찰 퇴진을 주장했다.
돌아온 대답은 어처구니 없는 논리였다.
"경찰은 기술직이라 어쩔 수 없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조병옥은 '좌익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이라고 발표했지만, 현지에 다녀온 최능진은 이를 반박했다.
"좌익도 문제지만, 일제시대의 고등계 형사들이 해방 후에도 버젓이 경찰에 몸담고 있어 일반 양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것도 큰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최능진은 경찰 수뇌부의 압력에 밀려 친일경찰이 장악한 경찰을 떠나게 된다.
그는 사퇴 성명을 통해 "조병옥. 장택상 씨가 경찰 행정을 한민당의 책동에 의해 자행해온 것은 사실이다. 일제 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되어 민중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고 일갈했다.
◈ 이승만에 맞서 5.10 단독선거에 출마하다
그가 집권하면 통일의 길도 멀어지고 독재체제가 굳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그에 맞서 출마하기로 했다.
한편 이승만 세력은 선거구인 동대문 갑구에 무투표 당선을 내심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능진이 출마하자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방해공작에 나섰다.
동선거위원회가 계속 트집을 잡아 접수를 연기시키는가 하면 서북청년단원들이 나서서 추천서 가방을 탈취했다.
결국 최능진의 출마는 '정치테러' 끝에 무산된다.
뒤에서 진두지휘한 백성욱은 내무장관에, 하수인인 서북청년단 리더 문봉제는 교통부장관에, 하수인 이성수는 백성욱의 공보비서로 발탁된다.
◈ 체포…전쟁 중 정전과 평화운동…다시 투옥된 후 처형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한 달 보름이 지난 1948년 10월 1일 새벽.
수도경찰청 형사대가 최능진의 자택에서 그를 연행했다.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이었다.
그에게 씌어진 혐의는 서세충(독립운동가), 오동기(광복군 출신으로 14연대장 역임) 등과 함께 쿠데타를 사주해 이승만 정부를 전복한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악질적인 관동군 헌병 출신인 김창룡 특무대장이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최능진은 인민군에 의해 석방된다.
그는 중도파 국회의원들과 함께 전쟁을 중단하자는 평화운동을 벌인다.
서울이 수복되자 최능진은 다시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죄목은 평화운동을 벌여 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다
그가 총살된 후 가족들은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간 뒤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국가는 유가족에게 사과하라"
따라서 국가는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법원은 재심을 수용하라고 권고했다.
최능진의 명예를 국가기관에서 59년만에 회복시켜준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최능진을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간 김창룡은 비명 횡사한데 이어 죽어서도 갈 곳을 못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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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nocutnews.co.kr/news/4035059
[임기상의 역사산책 37]학생운동, 파업, 고문과 투옥으로 일관한 투사들
지금의 안국동 교차로 남쪽, 인사동 입구에 있던 동덕학원은 조동식 선생이 설립해 1911년부터 천도교 재단이 재정을 지원해온 사립 여학교였다.
ㄷ자로 지어진 아담한 이층 목조 건물에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함께 배웠다.
한 학년이 한 학급으로만 이뤄져 학생 수도 적고 재정도 빈약했다.
여고를 맡은 8명의 교사 중 일본인은 일어 선생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조선인이었다.
이관술 선생은 재봉과 도화를 가르치던 여선생 박성환, 조선어를 담당하던 이윤재(나중에 신명균으로 바뀐다) 선생과 특히 친했다.
이윤재와 신명균 모두 한글학회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차례로 사망한다.
◈ 광주학생운동, 경성 학원가를 뒤흔들다
전남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 통학을 하던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한국인 학생들이 이들과 집단 싸움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광주 전남 일대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전국의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는 등 술렁이기 시작했다.
동덕여고도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학교 측은 겁을 먹고 휴교를 선언했다.
긴 방학이 끝나자 1930년 1월 15일 개학에 맞춰 이화여고와 근화, 배화, 실천, 정신, 보육, 태화, 동덕 등 경성시내 여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쳐 나와 만세와 구호를 외쳤다.
각 학교 교문 모두 긴급 출동한 기마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은 159개 학교 54,000명으로 집계됐다.
구속자만 1,642명에 달했다.
동덕여고에서는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퇴학당한 박진홍이 먼저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박진홍은 용산제면, 대창직물 등의 공장에 다니며 노동자들을 조직하다가 5개월만에 구속된다.
이관술의 이복 여동생 이순금도 동덕여고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으로 향했다.
졸업 후 학원 선생을 하던 이효정은 동대문 밖 종연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비밀 지도를 맡았다.
이후 이들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변절하지 않고 파업 주도와 체포, 고문, 옥살이를 거듭하면서 일제를 겨냥한 독립운동을 가열차게 벌인다.
"동덕 때부터 난 문학소녀였고, 사회생활은 그리 오래 하지 못했어요. 10년의 감옥생활을 빼면 이제 겨우 23살입니다"
공장에 다니던 그녀는 '경성학생알에스(RS)사건으로 2년간 수감생활을 한 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얽히어 구속되는 등 네번에 걸쳐 10년간 징역을 살았다.
◈ 이관술, 이재유와 손 잡고 조선공산당 재건에 나서다
광주학생운동을 보고 충격을 받은 교사 이관술은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에 나서기로 했다.
제자들을 대상으로 두 개의 독서회를 운영하다 1933년 반제동맹 사건으로 구속된다.
출감 후 이관술과 제자 3명은 모두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인 이재유와 손을 잡고 '경성 트로이카'에 이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연이은 탄압으로 조직은 거듭 붕괴되고 만다.
일본경찰은 이로써 조선반도에서 공산주의 조직이 다 붕괴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관술의 존재를 가볍게 봤다.
이재유와 함께 살다 간신히 피신한 이관술은 제자 박진홍과 여동생 이순금을 만나 조직 재건에 나섰다.
이들은 김삼룡, 정태식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모임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최후의 지하활동을 벌인다.
경성콤그룹은 파벌에 구애받지 않고 전향을 거부한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됐으며, 검거 이후에도 의지를 꺾지 않고 해방을 기다린다.
감옥에 있는 이재유 대신 새 지도자로 박헌영을 영입했다.
1941년 다시 검거 선풍이 일어 경성콤그룹은 백여 명이 연행되어 구속된다.
체포를 면한 지도부는 대부분 활동을 멈추고 일제 패망에 대비한다.
◈ 해방과 좌우대립 그리고 허망한 최후
이효정 할머니를 제외한 동덕의 선생님들과 벗들은 모두 남과 북으로 흩어져 소식이 끊어졌다.
해방 후 남로당 재정부장으로 일하던 이관술은 '조선정판사 사건'에 휘말려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5일 대전의 산내면에서 자행된 집단처형 때 가장 먼저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진홍은 해방 후 저명한 국문학자인 김태준이 남로당 간부라는 이유로 처형당하자 월북했다.
거기서 그녀는 평양의 최고재판소 판사로 일하다 전쟁 와중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일하게 이관술의 여동생인 이순금만 북한 고위직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박헌영 등 경성콤그룹의 주요 멤버들은 남에서는 '빨갱이'란 이유로, 북에서는 미제 간첩이란 어처구니 없는 죄목으로 거의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숙청됐다.
이렇게 해서 일제하 최후의 국내 반일 조직인 경성콤그룹은 남과 북에서 완전히 말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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