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 쓴 이야기/임기상의 역사산책'에 해당되는 글 28건
- 2014.09.02 마지막 호랑이와 표범은 언제 나타났나?
- 2014.09.02 미군 사병들의 전리품으로 전락한 '조선왕실 유물들'
- 2014.09.02 병인 양요 프랑스의 문화재 약탈
- 2014.09.02 美대사관은 문화재 반출 전초기지?…
대표적인 민중예술인 민화에서도 호랑이는 소재로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면 그 많던 호랑이는 다 어디 갔나?
가장 많이 포획된 시기는 일제시대였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통계연표를 보면, 1919년부터 23년간 호랑이 97마리, 표범은 무려 624마리나 잡은 것로 기록돼 있다.
일제 강점기가 36년이니 통계에 잡히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실제 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전쟁이 터지고 경제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 10월 추석을 앞두고 경주 대덕산에서 나무를 베던 주민이 호랑이의 습격을 받고 주재소에 신고했다.
마침 일본 왕실의 귀족이 경주를 방문할 예정이어서 주재소는 비상이 걸렸다.
이 기회에 공을 세우자고 나선 미야케 요로우 순사는 길닦기 공사 중이던 조선인들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이후 지금까지 93년간 남한에서 호랑이가 나타난 적이 없다.
북한에서는 지난 1993년 자강도 낭림산에서 호랑이 일가족 3마리가 생포되었다.
이 가운데 한 마리가 1999년 1월 서울대공원에 반입되었다.
토종 표범은 1962년 2월 경남 합천에 있는 오도산에서 마지막으로 잡힌 후 자취를 감췄다.
이 표범은 마을 주민 황홍갑 씨가 설치한 올무에 허리가 걸려 생포되었다.
생전에 황홍갑 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표범이 시뻘건 입을 벌리고 송곳니를 드러내긴 했지만 도망가지는 못했지.
배가 꽉 조여서 그런지 표범 소리가 마치 비명 같더라고...
'캬~, 캬악~ 하는 게 말이지"
이 표범은 드럼통에 갇혀 있다가 한달 후 창경원으로 팔려갔다.
오도산 표범이 잡히기 2년 전인 1960년.
위 사진을 언론에 공개한 노덕제 씨의 부친인 노종생 씨는 호랑이(사실은 표범)의 출몰로 골머리를 앓던 경찰로부터 호랑이를 잡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노종생 씨 등 진주 포수 5명은 오도산 줄기인 방아재에서 며칠간 잠복해 있다가 표범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 남단에는 맹수가 사라지고 그 공백을 멧돼지가 메꾸게 된다.
"이 요리가 조선의 백두산 호랑이 고기입니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21]일본인들의 호랑이와 표범 사냥터가 된 한반도
사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초대를 받아 모인 200여명의 손님들은 메뉴판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1.함경남도 호랑이의 차가운 고기 (푹 익히고 토마토 케첩을 곁들임)
2.영흥 기러기 스프
3.부산도미 양주 찜(야채를 곁들임)
4.고원 멧돼지구이(크랜베리 소스와 샐러드 곁들임)
5.아이스크림(작은 과자 곁들임)
6.과일과 커피
다들 정신없이 먹고 있는 와중에 야마모토가 마이크를 잡았다.
"전국시대의 무장은 진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았습니다.
다이쇼 시대의 저희들은 일본 영토 안에서 호랑이를 잡아왔습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를 침입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를 자기 땅이 된 조선에서 자유롭게 사냥한 자기와 비교한 연설이다.
◈야마모토, 150여명을 동원해 조선에서 활개치다
일본에서는 호랑이 사냥은 무사의 용맹성을 과시하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선박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야마모토는 많은 돈을 써서라도 명예나 이름을 높이고 싶었다.
더군다나 알아보니 조선총독부도 최대한 지원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1917년 11월 10일 도쿄역을 출발해 딱 한달동안 150여명을 동원해 조선 산천을 뒤지면서 떠들썩하게 사냥 여행을 다녔다.
이번 여행에서는 조선의 최고 포수 21명과 일본인 포수 3명이 가담해 8개조로 나뉘어 함경남북도와 금강산, 전라남도에서 사냥을 벌였다.
"조선 제일의 호랑이 사냥꾼 백운학과 사냥꾼 3명은 오후 4시에 함경북도 성진에 있는 남운령에 도착했다.
이들은 산 정상에서 갈라섰다.
산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몰이꾼 십여명이 산 밑에서 호랑이 몰이를 시작했다.
갑자기 산허리 나무숲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예상대로 호랑이는 산 정상을 향해 질주하려고 했다.
백운학은 호랑이와 40보 정도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소총 세 발을 연달아 쏘아 호랑이 숨통을 끊어놓았다"
이어 함경남도 단천의 호랑이굴에서 두번째 호랑이를 사살했다.
함경남도 영흥에서는 2.1m 길이의 표범을 잡았다.
수호는 100년에 한 마리 나올까 말까 하는 희귀한 동물로, 사진을 보면 꼬리가 표범보다 더 굵고 길다.
정리해보면, 호랑이 두 마리, 표범과 수호, 곰 각각 한 마리, 멧돼지 세 마리, 산양 다섯 마리, 늑대 한 마리, 노루 아홉 마리, 다수의 기러기와 청둥오리, 꿩이 있었다.
각 언론은 이번 사냥은 대성공이라고 보도했고, 야마모토는 으시대며 다녔다.
표범 한 마리와 수호도 같이 기증했다.
호랑이 두 마리 모두 중간 크기로 젊은 호랑이다.
표범은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으나 어느 것이 호랑이와의 혼혈이라는 기록은 없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이 언제나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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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통령 반환 '어보'와 '국새'에 담긴 아픈 사연
2014-04-21 10:40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10948
[임기상의 역사산책 ⑲]미군 사병들의 전리품으로 전락한 '조선왕실 유물들'
2014 4월 중순 인사동 길을 걷던 혜문 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은 벽에 붙어 있는 한 장의 포스터를 보고 경악했다.
이 포스터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하던 왕비의 도장인 '금보'(금으로 만든 어보)를 경매한다는 내용이었다.
경매를 주관하는 마이아트옥션은 국내의 한 소장가가 198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8만 달러를 주고 산 물건이라고 설명했다.
"아무리 어지러운 사회라지만 일국의 왕비가 쓰던 옥새가 백주대낮에 수도 서울에서 거래될 수 있나?"
분노한 혜문 스님은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함께 법원에 경매 처분을 중단하라는 가처분을 신청하는 등 어보 환수 운동에 나섰다.
다행히 취지에 공감한 문화유산신탁이 경매에서 4억 6천만원에 낙찰받아 모든 어보를 보관하고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 무상으로 기증하기로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의례용 어보는 호칭을 새기는 인면과 사면체로 된 몸체,손잡이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외국군대의 약탈 대상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 전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어보는 모두 368과이다.
이 가운데 41과가 일제강점과 8.15 해방,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최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오는 25~26일 한국을 방문할 때 어보와 국새 8점이란 '선물꾸러미'를 들고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국민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결국 미군 병사가 훔쳐간 보물을 미국의 대통령이 직접 반환하는 희한한 장면을 보는 셈이다.
앞으로도 속속 나타나겠지만, 없어진 조선왕실의 어보와 국새는 대부분 6.25 전쟁의 혼란통에 미군 사병들이 한국전 참전 '기념품'으로 훔쳐간 것이다.
철종 때까지의 인장들은 종묘에,이번에 돌려받는 고종의 황제지보는 집무실이 있던 덕수궁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 두개의 건물을 접수해 주둔했던 미군들이 인장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한 것으로 알려졌다.
◈집요한 추적 끝에 찾아낸 '문정왕후 어보'
지난 2009년 미국 메릴랜드 국립문서보관소.
혜문 스님과 김정광 미주한국불교문화원장은 쾌재를 불렀다.
이 곳에서 발견한 국무부 문서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 조선왕실의 어보 47과가 미군에 의해 약탈당한 사실과 LA카운티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문정왕후 어보가 미군이 종묘에서 훔쳐간 유물이란 사실이 기재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군의 한국 문화재 약탈 현황'이란 국무부 자료가 결정적이었다.
이 문서를 근거로 두 사람은 각각 한국과 미국에서 반환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지난해 8월 100인 위원회를 구성해 백악관 사이트에 10만명이 서명하는 '응답하라~ 오바마' 작전까지 벌였다.
한달이란 기간 안에 10만명이 서명하면 대통령이 공식 답변을 내놓아야 하는 제도를 활용한 것이다.
결국 지난 4월 LA카운티박물관은 문정왕후 어보를 한국정부에 조건없이 반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오바마 대통령이 62년전 태평양을 건너간 어보와 국새 9과를 들고 방한하게 된 것이다.
◈한국과 미국 사법당국이 합작해 제 자리로 돌려놓은 '호조태환권 인쇄원판'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빼돌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화폐 인쇄원판 '호조태환권'을 한국정부에 돌려주는 전달식이 열린 것이다.
호조태환권은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면서 구화폐를 회수하기 위해 고종 30년(1893년)에 발행한 교환표이다.
50냥.20냥.10냥.5냥 등 4종의 원판이 제작됐고, 이중 10냥짜리 원판이 태평양을 건너갔다가 62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이 인쇄원판을 훔쳐간 미군의 유족들은 지난 2010년 4월 경매회사에 이 원판을 포함한 한국 골동품 다수의 경매를 의뢰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주미한국대사관 이종철 법무협력관은 '전쟁 중 해외 문화재 반출과 거래는 불법'이라며 경매 중지를 요청했다.
유족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따라 한국대사관은 한국 정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미국 국토안보부와 법무부에 수사를 의뢰했다.
지난 2월 15일 호조태환권이 경매시장에 나왔다.
이 화폐는 구 한말 화폐개혁이 실패로 끝나자 대부분 소각돼 희귀한 지폐가 되었다.
몇 차례 열린 경매에서 8천만~9천여만원 정도의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반면 이 지폐를 찍어내던 호조태환권 원판은 재미교포가 3만 5천달러(약 3,900만원)를 주고 샀다가 체포되고 압수를 당했다.
정말 기구한 운명의 화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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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궤와 귀한 책들 실었으면 나머지는 전부 불태워라"
2014-04-16 14:07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⑱]초토화된 강화도…의궤약탈 사실도 몰랐다
1866년 10월 16일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7척이 강화도 앞에 출현했다.
프랑스군은 프랑스 신부 9명을 극형에 처했다는 이유로 보복하러 왔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내심 보물을 약탈하기 위해 침입한 것이다.
먼저 선제 포격을 한 후 극동함대의 병력이 강화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큰 저항없이 관아와 행궁을 점령했으나 곧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선 조정은 먼저 이경하를 순무사로 삼아 강화도가 내려다보이는 문수산성에 병력을 집결했다.
조선군 동태를 파악하러 온 프랑스군 정찰대는 공격을 받아 전사자 3명,부상자 2명을 내고 퇴각했다.
조선군은 이어 강화도 정족산성으로 잠입해 전등사에 진을 쳤다.
양헌수가 이끄는 강계 출신의 포수 500명이 프랑스군을 기다렸다.
프랑스군은 다시 108명의 보병 정찰대를 보냈으나 매복에 걸려 맹렬한 사격을 받아 29명의 부상자를 내고 캠프로 돌아갔다.
로즈 제독은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다음날인 11월 11일 강화도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문화강국의 국민이라는 프랑스인들이 떼강도로 돌변하게 된다.
◈ 불타오르는 조선행궁과 관아건물...재로 변한 외규장각 도서 5천여책
중국에 돌아온 뒤 로즈 제독은 해군성 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낸다.
"즉시 모든 국가 소유물을 파괴하기 시작했고,200여 척의 정크선박을 침몰시켰습니다.
임금의 저택과 관아가 남아 있었는데,이 관아의 일부는 우리 군인들이 거처로 사용하고 있어 제일 마지막에 파괴했습니다.
본인은 계획대로 10일과 11일 강화읍 관아의 파괴를 마치고 모두 선박에 올라 일상의 업무로 돌아왔습니다"
프랑스군은 조선의 역사가 담긴 건물들을 불태우기 전에 금은보화를 찾기 위해 이잡듯이 뒤졌다.
먼저 관아 건물 깊숙한 곳에 보관돼 있는 은괴 19상자를 찾았다.
더 이상 보물이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외규장각의 서고도 뒤졌다.
다시 로즈 제독의 보고서를 보자.
"겉으로 보기에 꽤 가난해 보이는 강화읍은 각하에게 보내드릴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간혹 거처한다는 저택에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서적들로 가득 찬 도서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공들여 340권을 수집했는데, 기회가 되는대로 프랑스로 보내겠습니다"
거의 해적 부하들이 두목에게 보내는 서신 수준이다.
프랑스군은 은괴 상자와 외규장각의 중요 도서,족자 등을 배에 실은 뒤 관아 건물과 그 옆의 별궁,외규장각을 모조리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순조 때 기록에 따르면, 외규장각에 보관 중인 책이 약 1천여종,6천책이었다니,그들이 강탈한 200종 340책을 빼고는 모두 불길에 사라진 것이다.
◈ 한 통의 편지...파리국립도서관에서 잠자는 외규장각 도서를 깨우다
1990년 봄 규장각도서 관리실.
아침에 출근한 이태진 관리실장은 책상 위에 한 장의 협조 공문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통령 비서실이 접수한 편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프랑스에 있는 박병선 박사가 노태우 대통령 앞으로 보낸 편지였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인 외규장각 도서 중 의궤 자료들에 대한 연구작업을 마쳤는데 국내 출판을 도와달라는 건의서였다.
외규장각과 의궤가 무엇인가?
외규장각은 정조대왕이 1782년 강화도에 설치한, 왕립도서관 격인 규장각의 부속건물인데,아쉽게도 프랑스군이 태워버렸다.
의궤는 왕실에서 열린 각종 행사나 궁궐의 신축과 보수가 있을 때마다 자초지종을 기록해 후세에 같은 일이 열리면 참고하도록 편찬한 저서이다.
이태진 실장은 이 일은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는 서울대가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박병선 박사가 정리한 외규장각 도서 현황은 서울대의 지원으로 국내에 출판되었고, 이 책을 토대로 반환운동이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도서 반환을 지시하고, 국립도서관과 사서들은 집단 반발하고....
1993년 9월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방한할 때 2권의 조선왕실의궤를 들고 왔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에게는 '맛보기'로 1권의 의궤만 전달되었다.
수행한 도서관 사서 2명의 반발에 부딪쳐 1권은 주지 못한 것이다.
환영 만찬에서 미테랑 대통령은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 고문서는 프랑스 해군이 전쟁 중에 가져왔는데,이제 한국으로 되돌려주는데도 전쟁을 해야 할 형편입니다"
불길한 전조였다.
프랑스는 비싼 값에 TGB(떼제베 고속열차)를 팔고도 거래가 끝나자 태도를 돌변했다.
사서 두명은 귀국하자마자 사표를 제출하고, 국립도서관들은 의궤 반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집단 휴관하고...
이들은 한국이 반환을 요청한 299권의 외규장각 도서를 문제삼은 게 아니라 대통령이 전달한 단 한권의 책 때문이었다.
명분은 문화재는 어디에 있든 잘 관리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를 지켜 본 박병선 박사는 분노했다.
"관리는 무슨... 내가 책들을 찾았을 때는 중국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100년 가까이 도서관 파손 창고에 나딩굴고 있었다.
내가 그 중요성을 보고하자 그제서야 창고에서 꺼내 수리하고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외규장각 도서에 대한 연구도 145년 동안 박병선 박사가 출간한 두 권의 책 외에는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양국 정부간의 지리한 협상 끝에 '소유권은 프랑스가 갖되 5년간 빌려주면서 기간을 연장한다'는 어정쩡한 방식으로 마무리했다.
우리 것이 아니니 소장인도 못 찍고 지방전시도 할 수 없다.
프랑스가 관리를 소홀히 한다고 기간 연장을 거부하면 속수무책으로 뺏기게 된다.
프랑스가 약탈한 도서는 340책이다.
이번에 돌아온 것이 297책이니 나머지 43권은 어디에 있나?
◈ 145년만의 귀환...그 높은 문화수준에 반하다
우여곡절 끝에 외규장각 도서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1년 7월 19일부터 9월 18일까지 으뜸홀에서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을 열었다.
이날 처음 공개된 의궤를 본 시민들은 특히 그 재질의 우수성에 감탄했다.
의궤들을 처음 보았을 때 모두 금방 만들어진 것처럼 깨끗해서 놀랐다.
흰 종이의 질감이 빳빳해 그 위에 찍힌 붉은 괘선이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최고급의 종이에 정성 들여 글씨를 쓰고 아름다운 색깔의 그림을 그린 다음 암녹색 비단으로 표지를 싸서 놋쇠 물림으로 묶은 이 조성 왕실 어람용 의궤는 세계 출판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프랑스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 340책은 언젠가 우리 소유로 돌아올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기록물은 소유권이 변동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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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nocutnews.co.kr/news/list?c1=262&t2=1343&page=7
美대사관은 문화재 반출 전초기지?…'슬픈 청자'
2014-04-15 09:57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7041
[임기상의 역사산책 ⑰]한국에서 닥치는대로 수집해 미국에 들고가 '돈벌이'
지난 2009년 1월 9일 오전 10시 미국 하바드대학 아서 세클러 박물관.
이 곳을 방문해 '헨더슨 컬렉션'을 찾은 '해외 반출문화재 반환을 위한 미국 방문단'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들 국립중앙박물관에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날 대학측은 공간상의 이유를 들어 도자기 12점만 공개했다.
하바드대학은 비취색이 은은히 감도는 이 작품은 현존하는 고려청자 중 가장 최고의 색깔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의 부인은 남편이 죽자 1991년 한국에서 수집한 도자기 150점을 하바드대학에 기증했다.
대학측은 '헨더슨 컬렉션'이라고 이름을 붙인 도자기들 중에서 이날 12점만 공개한 것이다.
◈ '그레고리 헨더슨'…그는 누구인가?
"청자병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면서 술잔을 거듭하는 브라운 씨도 몹시 즐거운 표정이었다.
"미국에 가서의 모든 일도 잘 부탁합니다"
"네, 염려 마십시오. 떠나실 때 소개장을 써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역사는 짧지만, 미국은 지상의 낙토입니다. 양국의 우호와 친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탱큐…"
소설의 주인공 이인국 박사는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주한 미대사관 직원을 찾아 이렇게 고려청자 한병을 들고와 뇌물로 바친다.
바로 이 대사관 직원은 실존 인물이고, 그 주인공은 한국에서 두 차례(1948~1950년,1958~1963년)에 걸쳐 7년간 문정관과 정무참사관을 지낸 그레고리 헨더슨이다.
그는 조각가인 아내 마리아 폰 아그누스와 함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중요한 문화재를 수집했다.
하바드대학에 기증한 도자기 150점 말고도 다량의 불화, 불상, 서예, 전적류를 수집했다.
도자기는 1년마다 30여점을 수집했고, 다른 수집품까지 세보면 이틀에 하나 꼴로 닥치는대로 모았다.
"우리는 절대 골동품상을 찾아간 적이 없다. 골동품 상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물건을 싸들고 왔다. 거기서는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이들 부부는 1963년 한국을 떠나면서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이용해 어마어마한 문화재를 싸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들이 떠나기 1년 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지정 문화재를 해외로 반출하려면 정부에 신고해 허가를 받도록 규정했다.
헨더슨 부부의 이삿짐에 보물이나 국보급 문화재가 있었다면 이는 불법 반출이다.
무사히 한국 문화재를 빼돌린 헨더슨 부부는 1969년 오하이오 주립대 미술관에서 '한국의 도자기:예술의 다양성-헨더슨 부부 컬렉션'이란 타이틀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는 소장품을 자랑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비싼 값에 팔려는 언론플레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자기들 소장품을 100만 달러에 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을 박물관 큐레이터로 특채할 것을 덧붙였다.
대학측이 거절하자 여기저기 물건을 팔려고 돌아다니다 헨더슨은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1988년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헨더슨이 죽자 삼성이 접촉했으나 마리아 헨더슨이 부른 가격이 너무 엄청나 무산됐다고 한다.
문화재 보관과 관리가 힘들어지자 헨더슨의 부인은 도자기 컬렉션을 하바드대학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경매로 헐값 처분했다.
집 전체가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로 도배를 하다시피했다.
그들의 집은 보통 서민주택보다는 비싼 곳이지만 귀중한 문화재를 전시할만한 대저택은 아니다.
저 좁은 거실의 벽난로 위에 걸려 있는 고려시대의 탱화를 보면, 이들 부부가 우리 문화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때 서재에 걸려 있었다는 안평대군의 글 '금니법화경'이 아직 경매처분되지 않고 헨더슨 재단이 보관 중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국내에 있는 유일한 안평대군의 글씨 '소원화개첩'은 국보 2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 정부나 문화재단이 많은 돈이 들더라도 사서 우리 박물관에 전시해야 한다.
◈ 해외로 흩어진 문화재…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자
그레고리 헨더슨만 이렇게 우리 문화재를 마구잡이로 불법 반출한 건 아니다.
1970년대에 한국에 근무한 스나이더 미국대사 부부도 한국의 민화를 대량 수집해 미국으로 들고가버렸다.
이들이 한국을 떠난 무렵 민화값이 폭등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1980년대 한국에서 근무한 리차드 워커 대사의 관저 창고에는 한국의 유력인사들이 뇌물로 바친 우리 문화재가 가득 차있다는 사실이 여러 증언에서 나오고 있다.
더이상 우리 정부는 해외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 회수를 더 이상 민간에 맡기고 뒷짐 지고 있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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