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 쓴 이야기/임기상의 역사산책'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14.09.03 맥아더의 오판 - 진격과 후퇴
  2. 2014.09.03 1945 철수하는 일본인들
  3. 2014.09.03 38도선
  4. 2014.09.03 중국과 한국 역사의 분수령...서안사변
2014. 9. 3. 14:11

http://m.nocutnews.co.kr/news/list?c1=262&t2=1343&page=6



[임기상의 역사산책 27]"정신없이 후퇴했다" VS "지쳐서 못 쫒아갔다"


맥아더의 오판이 부른 참사…청천강 전선 붕괴되다

2014-05-13 11:20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22815


◈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착한 국군 6사단 7연대, 포위망에 걸리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은 유엔군은 평양 마저 쉽게 점령하자 자만에 빠졌다. 

이미 중공의 주은래 총리가 38선을 넘으면 참전하겠다고 경고했으나 이를 무시했다. 

미 육군은 한국에 투입한 2사단을 유럽에 배치할 궁리를 하고 있었고, 미 8군의 워커 사령관은 탄약 공급을 줄여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모든 부대가 제각기 중국과와의 국경을 향해 레이스를 펼쳤다. 

그 선두는 국군 6사단이었다. 

마침내 7연대가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에 압록강에 진출했다. 

만세를 부른 국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낼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다. 

이때 사단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포위됐으니 무조건 철수하라" 

이 시간에 뒤를 따르던 제 2연대가 퇴로를 차단당한 후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포위망에 갇힌 7연대는 형체도 없이 조각 조각난 후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다. 

국군 6사단이 위기에 봉착한 순간, 그 왼쪽에서 북진하고 있던 국군 1사단도 맹공격을 받고 전진을 멈췄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8군사령부는 제 1기병사단에게 국군을 추월해 선두에 서라고 지시했다. 

중공군은 이미 우측의 한국군을 관통한 후 우회해 1기병사단의 퇴로를 차단한 상태였다. 

기병사단은 서둘러 철수했으나 가장 앞에 행군하던 3대대는 포위망에 갇혔다. 

결국 3대대 구출을 포기하고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미 육군 역사상 대대 전체를 포기하고 철수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이것이 이른바 중공군의 '1차 전역'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참사가 발생한 건가? 

◈ 자만에 빠진 미국 수뇌부, 중국의 참전 의지와 실력을 얕보다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기 열흘 전의 하와이 서쪽에 있는 웨이크섬. 

군 통수권자인 트루먼 대통령이 휘하의 사령관을 만나러 멀리 워싱턴에서 날아왔다. 

기이한 회담이다. 

그만큼 전쟁 영웅 맥아더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의례적인 덕담을 나눈 다음 트루먼이 맥아더에게 물었다.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가능성은 아주 적습니다. 
압록강을 넘을 수 있는 병력은 5~6만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군도 없습니다. 
중국이 남하해 평양으로 진격한다면 우리 공군의 폭격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겁니다" 

이 시각에 만주에서는 유엔군을 박살내기 위해 선발대 25만명이 압록강변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 대일전과 내전에서 단련된 중공군, 명장의 지휘 아래 압록강을 건너다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바로 이날 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들은 청천강 북쪽 산악지대에 조직적으로 흩어져 미군과 한국군이 깊숙히 진격해 자루 안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들을 지휘하는 장군은 일본군과 장개석 군대와 전투를 치루면서 용맹을 떨친 중공군의 최고 전략가인 펑더화이였다. 

그가 마오 주석으로부터 받은 지침은 하나였다. 

"허약한 국군을 섬멸한 후 우회해 미 8군의 퇴로를 차단한 다음 포위 공격을 한다" 

◈ 1950년 11월 말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 VS 중공군의 <2차 전역> 

첫 전투에서 한국군 8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에게 궤멸적 타격을 가한 중공군은 일주일만에 홀연히 사라졌다. 

이들은 북한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산속 깊숙히 들어가 유엔군이 더 큰 덫에 걸려들기만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미끼를 맥아더 사령부가 덥석 물고 말았다. 

당시 30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이 들키지 않고 한반도에 들어와 대략 18만 명이 청천강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12만 명이 개마고원으로 진군하는 미 10군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마다 조용히 이동하는 거대한 중공군은 '그림자가 없는 유령'으로 불렸다. 

중공군이 사라지자 맥아더는 대통령에게 밝힌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믿었다. 

맥아더는 장병들에게 '크리스마스까지는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순간에 펑더화이는 유엔군이 공격해 들어오면 깊숙히 유인한 후 국군을 먼저 격멸하고 미군의 후방에 파고 들어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이어 공세를 강화해 유엔군을 평양-원산 선까지 밀어버린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11월 24일 오전 10시 청천강 북쪽에서 유엔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자루 입구를 지나 그 안으로 유엔군이 꾸역 꾸역 밀고 들어왔다. 

다음날 대규모의 중공군이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개시하며 자루의 끈을 묶어 버렸다. 

이번에도 주 목표는 가장 오른쪽에서 북진하는 국군 2군단이었다. 

2군단은 배후가 봉쇄되자 일거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중공군은 미 8군의 퇴로인 덕천과 맹산 일대로 파고 들어 8군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 미 제2사단, 군우리의 '죽음의 계곡'에서 전멸하다 

결국 유엔군 지휘부는 공세 나흘만인 11월 28일 철수명령을 내렸다. 

청천강 상류에 있던 미 제2사단도 남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카이저 사단장은 정찰대를 남쪽 순천으로 이어지는 길로 보내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양쪽 산 위에 포진해 있던 중공군은 정찰대를 그대로 보냈다. 

2사단 본진이 오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덫이 놓인 것을 전혀 모른 채 9연대, 사단본부, 포병과 지원부대, 38연대, 국군 3연대, 국군 23연대가 들어왔다. 

이들이 험준한 계곡으로 이어진 '죽음의 계곡'에 들어서자 10Km에 걸쳐 중공군의 집중적인 사격과 수류탄 공격이 이어졌다. 

미군 사단 하나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누구 하나 적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황 상태에 빠진 2사단 장병들은 충격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 전투로 미 2사단은 3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모든 장비를 잃어 부대가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이 정도 피해로 그친 것은 중공군에게 중화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 무질서한 퇴각...중공군 "적군이 사라졌다" 

2사단이 궤멸되자 유엔군 전체가 두려움에 휩싸였다. 

적에 대한 두려움은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 치명적이다. 

지휘관들까지 정신이 나갔다. 

전열을 수습해 지형상 폭이 좁은 평양-양덕-원산을 잇는 저지선을 만들었어야 했다. 

'퇴각 명령'이 떨어지자 모든 전선에서 무질서한 후퇴가 진행됐다. 

다들 평양도 버리고 임진강 남쪽으로 달려갔다. 

불과 20일만에 200km 떨어진 38선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그 뒤를 쫒는 중공군은 적군을 만나지 못했다. 

차량이 없어 기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당연히 유엔군이 평양-원산을 잇는 선에서 저항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적군은 사라져 버렸다. 

추격을 하고 싶어도 중공군은 너무 지쳐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이렇게 해서 통일의 꿈은 멀어져갔다. 

그러나 동부전선인 함경도에서 다른 양상의 전투가 벌어지고, 맥아더 대신 새로운 지휘관이 부임하면서 전쟁의 모습은 바뀌게 된다.

The Battle of Chosin, 血战长津湖




















Posted by qlstnfp
2014. 9. 3. 13:55

"왜 유순했던 조선인들이 포악해졌을까?"…반성 없는 日本

2014-05-07 14:14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24]패전 직후에 고관대작들은 재산 빼돌리기에 '혈안'



http://m.nocutnews.co.kr/news/4019564


◈ 8.15 패전 후 혼란에 빠진 조선의 일본인들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오자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들 앞에는 모든 특권 박탈과 함께 본토 귀환과 정착이라는 고달픈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에게 희안한 지시가 떨어졌다. 

당장 일본 본토로 갈 수 있는 배를 확보하라는 상부의 명령이다. 

알고 보니 아베 조선총독 부인 일행이 탈 배가 시급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틀 후 '사모님' 일행과 짐을 실은 배가 부산 앞바다를 출발했다. 

그러나 이 배는 얼마 못가서 목도 앞바다에서 멈춰선 후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배도 낡았지만 조선에서 약탈한 귀중품을 너무 많이 실어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짐을 절반 정도 버리고 간신히 부산으로 돌아와 쉬쉬하면서 경성으로 몰래 잠입했다. 

이렇게 조선총독 부부를 시작으로 한반도를 호령하던 모든 고관대작들은 재산 빼돌리기 광풍에 휘말렸다. 

◈ 아래 것들을 버려둔 채 대일본제국의 지도자들 가족 데리고 일제히 도주 


군경 상층부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대기업 간부들이 제일 먼저 탈주에 나섰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소련군이 침공해 들어온 만주와 북조선의 일본군 수뇌부였다. 

이들은 재빨리 열차를 동원해 가족들을 피신시켰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처럼 100만명에 달하는 일본 민간인들에게는 대피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이들 민간인들은 소련에 끌려가거나 재산을 다 빼앗긴 채 걸어서 거지꼴로 북조선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왔다. 


남은 일본인들은 대부분 부녀자와 아이들이었다. 

남편은 군대에 끌려가 소식이 두절됐기에 여자들이 짐과 아이를 끌고 하염없는 귀향길에 나선 것이다. 


일본에 도착한 여자들은 제일 먼저 이재민 병원에 수용돼 성병 치료와 강제 낙태수술을 받았다. 

이들이 당한 고초를 일본 정부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천황 사진과 신사의 위패를 불태워라" 

일본이 항복하자 전국적으로 경찰서와 주재소,행정관서가 습격을 받았고, 특히 '왜적 우상의 복마전'인 신사가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다급해진 총독부는 전국 관공서에 걸어둔 천황 사진과 신사의 위패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기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분과 성소를 '불경한' 조선인들이 파괴하는 것을 두 눈 뜨고 보기 싫었던 것이다. 


조선인 군중들이 몰려다니자 일본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다들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보는 건 처음 겪는 일이고, 자기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물었다. 

"왜 유순했던 조선인들이 이렇게 포악한 행동을 할까?"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원래 살던 조선인들을 변두리로 몰아내고, 도시 중심가에 일본인촌을 만들었다. 

그 안에는 철도역과 학교, 병원, 관공서, 백화점 등 없는 게 없었다. 

해방이 되자 처지가 역전됐다. 

직장과 집에서 쫒겨난 일본인들은 집단수용소에서 거지꼴로 살면서 소련군 집의 식모나 목욕탕 때밀이, 행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돌아간 그들은 거기서도 차별대우를 받게 되자, 조선에 대해 이를 갈게 된다. 

조선에 대한 침략과 수탈은 잊어먹고 패전 후 당한 고통만 곰씹고 있는 셈이다. 

◈ 너무나 달랐던 소련군과 미군 


소련군의 행색을 처음 본 일본인들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당시 한 일본인의 목격담이다. 

"마차를 앞세운 긴 행렬이 이어졌다. 이들은 만도린처럼 생긴 장총을 어깨에 걸어 축 늘어뜨린 것이 마치 '유목민' 같았다. 후미에는 산양이나 닭까지 매달고 왔다. 마차 위에는 부뚜막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개고기는 역시 누렁이가 최고라며, 길에 나다니는 개만 보이면 어김없이 총을 쏘아 잡으며 행군을 계속했다" 

이들은 무기와 탄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에서 조달했다. 

소련군은 북조선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일본인을 억류했다. 

한편으로는 폭행과 약탈을 하고, 한편으로는 공장을 뜯어가고, 일본군과 기술자들은 죄다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당연히 첫 타겟은 남편없이 혼자 사는 일본인 부녀자였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의 집단 대탈주가 시작된다. 


미군은 달랐다, 

춘천에 주둔한 500~600명 규모의 미군을 본 일본인들은 크게 놀랐다. 

모두 최신식 무기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골에 주둔하면서도 침구와 식량, 심지어는 본국에서 보낸 생수까지 휴대하고 있었다. 

다들 한숨을 쉬었다. 

"이런 나라를 상대로 4년간 전쟁을 벌였다니...." 

◈ 혼란에 빠진 만주군...일본인 장교들을 처단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 꼭두각시 나라 '만주국'의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일본인 장교들이 살해되거나 무장해제된 후 연금되었다. 

어느 부대나 장교는 일본인이었고, 하사관 이하는 모두 중국인이었다. 

이들 중국인 장병들이 작당해서 일본계 장교를 곳곳에서 사살했다.

만주국 군인들은 각기 국부군이나 공산당에 들어가 서로 총부리를 겨눈다. 

◈ 해방의 혼란 통에 흩어지는 귀중한 문화재들 


갑자기 일본이 패망하자 망연자실한 건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했던 일본인들이었다. 

어떤 자들은 금붙이 패물과 약탈한 문화재를 어떻게 하든지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광분했다. 

그러나 미 군정청이 갖고 나갈 수 있는 짐을 두 손에 들 수 있는 짐과 현금 1,000엔으로 제한하자 절망에 빠졌다. 

그래서 총독 부인이 비밀리에 배를 구한 것이고, 대구의 오구라 같은 악명높은 수집가들은 알짜만 묶어 밀항선을 타고 도주했다. 

나머지 문화재는 친한 한국인에게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위 사진은 조선철도 전무였던 시미즈가 갖고 있던 것인데, 숨겨서 갖고 나가려다 여의치 않자 한국인 친구에게 맡긴 문화재이다. 

이 백자항아리는 골동가를 흘러 다니다 정치인 장택상의 컬렉션에 들어갔다. 

그러다 우연히 이 보물을 본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이 사들여 이화여대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군산의 대지주였던 미야자키가 갖고 있던 연적의 행방은 찾을 길이 없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간송미술관 연적과 거의 모양은 같지만 약간 특징이 다른 걸작이었다고 한다. 

미와자키가 일본으로 갈 때 모 골동품 주인에게 넘어갔다가 여러 사람 손을 거쳐 흘러다니다가 소식이 끊겼다. 

이들 문화재 말고도 수많은 보물들이 한국인에 의해 일본으로 넘어가거나, 미군 소장품으로 들어간 뒤 태평양을 넘고 말았다. 

이렇게 패전과 함께 110만명에 달하는 일본인 군인과 민간인들이 그들이 원래 살던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고국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해 호사를 누린 대륙 침략의 첨병'이란 비난을 받고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식민자' 또는 '지배자'가 아니라 '패전의 피해자'란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일본제국의 '사생아' 집단으로 전락한 셈이다. 

최근 '조선을 떠나며'(역사비평 간)란 저서를 통해 조선의 일본인을 분석한 역사학자 이연식 씨는 "일본인들이 패전 후 느낀 공포는 그 곳이 엄연히 조선인의 땅이란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에 증폭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패전 후 맞이한 재앙이 일본의 조선 지배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대다수 귀환자들은 패전이란 직접적인 계기에만 매몰됐다"고 분석했다.















Posted by qlstnfp
2014. 9. 3. 13:39

http://m.nocutnews.co.kr/news/list?c1=262&t2=1343&page=7


[임기상의 역사산책23]소련군, 단 6일간의 전투 끝에 막대한 전리품 챙기다

http://m.nocutnews.co.kr/news/4016749




◈ 스탈린, 러일전쟁의 패전을 앙갚음하기 위해 대일전 선포하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지체없이 소련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출동해 만주의 관동군을 격멸하라" 

그리고는 참모들에게 말했다. 

"전쟁의 열매는 힘으로 따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것이야" 


사흘 후 새벽 0시를 기해 소련군 170만명이 세 방면에서 일제히 만주로 쏟아져 들어갔다. 

동원한 대포만 약 3만 문, 전차는 5,300대, 항공기는 5,200기에 달했다. 

한때 일본 육군의 최정예라고 자랑했던 관동군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6일만에 소련군은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선봉부대는 요동반도 최남단에 있는 다롄(大連/대련)에 도달했다. 

만주를 휩쓴 소련군은 곳곳에서 일본인 가옥을 점거하거나 부녀자를 강간하고, 관동군과 만주국 고위인사를 체포해 시베리아로 압송했다. 

관동군은 자기 가족들만 기차에 태워 보내고, 100만명이 넘는 만주 이주민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소련군은 전쟁으로 파괴된 자국의 재건을 위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관동군 60만명을 시베리아로 보냈다. 

이 가운데 6만명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 만주국 붕괴…'마지막 황제' 푸이는 소련군에게 체포 


관동군은 비록 만주국은 소멸됐지만 황제 푸이만은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다고 믿고, 그를 일본으로 피신시키기로 했다. 

일단 퉁화에서 비행기를 타고 평양을 거쳐 일본으로 가기로 했으나, 비행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소형 비행기로 펑텐 비행장으로 가서 대형 비행기로 갈아타기로 했다. 

그러나 이들이 펑텐 비행장에 도착한 것과 동시에 소련군 낙하산부대가 비행장을 점령해 푸이 일행 12명은 체포되고 말았다. 

황제는 곧바로 시베리아로 연행되어 59년 12월 특사를 받을 때까지 14년 동안 구류생활을 하게 된다. 

◈ 소련군, 한반도와 사할린 남부로도 진격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뛰어든 것은 미국의 작품이었다.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면 미군 100만명의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보고, 소련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같은 요청을 스탈린은 넌지시 받아들였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그는 "일본의 배신적 공격으로 침해된 러시아의 옛 권리는 회복돼야 한다"며 전리품 목록을 제시했다. 

1.만주에서의 소련 권익 회복(부동항과 철도 등) 
2.사할린 남부의 점령 
3.쿠릴열도의 섬들을 전부 갖는다 

루즈벨트가 동의하자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한 후 2~3달 후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주에 소련군이 침공한 후 이틀이 지난 1945년 8월 11일. 

소련군 제2극동방면군은 일제히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로 쳐들어갔다. 

사할린의 일본군 제88사단은 천황의 항복선언 발표도 모른 채 계속 격렬하게 저항했다. 

소련군이 노린 지역은 최남단에 있는 2개의 항구였다. 

스탈린은 얄타협정을 무시하고 일본 본토의 최북단인 홋카이도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한 후 30분이 지난 시간에, 소련군 전투기가 출격해 함경북도 나진 등 동해안의 몇 개 항구를 폭격하면서 한반도 침공이 시작됐다. 

다음 날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인들이 피난을 가면서 이 지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소련군은 경흥에 진입한데 이어 8월 11일에는 웅기에 상륙하고, 이튿날 나진을 점령하였다 

파죽지세로 남하한 소련군의 선두는 개성까지 들어갔다. 

이 시각에 미군은 600마일(965Km) 떨어진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었다. 

◈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둘러싸고 美·蘇 간에 힘겨루기 벌어지다 


다급한 건 미국이었다. 

소련군의 진격을 막지 않으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에게 넘어간다. 

천황이 항복 발표를 하는 1945년 8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비밀전보를 보냈다. 

"맥아더 장군에게 일본군 투항에 관한 세칙을 담은 '일반명령 1호'를 하달했습니다. 그 내용 중 하나가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측이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의 일본군 항복을 받자는 것입니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주저없이 받아들였다. 


스탈린의 이례적인 양보를 지켜본 미국 쪽이 어리둥절했다. 

38선을 획정한 미 국방성의 딘 러스크 대령(후일 국무장관 역임)은 이렇게 회고했다. 

"분할 점령의 경계선을 너무 북쪽으로 잡으면 소련이 응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서울을 이 쪽에 넣는 38도선 안은 미국이 욕심을 최대한 낸 것인데, 소련이 수락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스탈린은 왜 미국의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였을까? 

스탈린의 눈길은 일본 본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트루먼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38도선 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일본 홋카이도 북부를 소련군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쉽게 얘기하면, 한반도의 38도선 남쪽을 줄테니 같은 38도선 북쪽인 홋카이도 북부를 달라는 것이다. 

미국은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미국의 동의와 관계없이 소련군이 홋카이도에 상륙한다"고 통보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맥아더 장군은 "내 허락 없이 소련군이 한 명이라도 홋카이도에 들어오면 일본 주재 소련 대표단 전원을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소련이 굴복했다. 

혼란의 와중에 일본 대신 한반도가 분단된 셈이다. 


◈ 득의만만한 스탈린, 제정 러시아의 영토를 전부 되찾다 

전리품 거래가 끝난 후 소련의 새로운 국경을 표시한 지도가 스탈린의 별장으로 배달되었다. 

스탈린은 핀으로 지도를 벽에다 고정시킨 후 부하들에게 설명했다.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지 한번 봅시다. 북쪽은 모두 정상입니다. 핀란드가 우리에게 지은 죄가 커서, 우리는 국경을 레닌그라드에서 북쪽으로 확장했습니다. 발트해 연안에 있는 세 나라는 원래 우리 영토였는데,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 우크라이나, 몰다비아 사람들도 다시 소련땅 안에서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 곳은 어떻습니까? 사할린과 쿠릴열도 모두 우리에게 귀속되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얼마나 좋습니까? 뤼순항도 우리 것이고, 다롄항도 우리 것입니다" 

계속해서 담배꽁초로 중국 일대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장춘철도도 역시 우리 것이고, 중국, 몽고 역시 문제가 없습니다" 


그가 설명한 지역에서 한반도는 빠져 있었다. 

그만큼 소련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나 5년 후 한반도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지진의 진원지로 떠오른다.















Posted by qlstnfp
2014. 9. 3. 13:01

[임기상의 역사산책22] 1936년 12.12 쿠데타...

http://m.nocutnews.co.kr/news/list?c1=262&t2=1343&page=7


http://m.nocutnews.co.kr/news/4016085


◈ 중국과 한국 역사의 분수령...서안사변 

서안사변~국공합작~항일전쟁의 승리~공산당의 대륙 석권~한국전쟁은 하나의 길고 긴 이어진 강이다. 

서안사변이 발발하면서 장제스는 중국통일을 잃은 대신 중일전쟁의 승리를 얻었다. 

기사회생한 중국 공산당은 항일전쟁 중에 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의 민심을 얻어 끝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20년간의 내전과 일본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강력해진 홍군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면서 한반도에 모습을 드러낸다. 




1936년 12월 12일 새벽 6시, 중국 섬서성 서안시의 북동쪽 30Km 거리에 있는 화청지. 

당나라 현종의 별장이었던 이 곳의 오간청 건물에 머물고 있던 국민당 주석 겸 군사령관인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총소리에 잠이 깼다. 

장제스는 서둘러 잠옷바람에 끌신을 신고 화청지의 뒷산인 여산으로 올라갔다. 

담을 넘다 다친 상태에서 산기슭의 바위들 틈에 쭈구려 앉아 있던 그를 장쉐량(張學良/장학량) 휘하의 장교가 발견해 숙소로 끌고 갔다. 

장쉐량은 누구인가? 

한때 만주의 동북 3성을 통치하던 동북군 사령관이자 일본군에 쫒겨 내려온 후 장제스 밑에서 서북군 공산당 포위소탕전 부사령관으로 있는 사실상 2인자였다. 

그러던 그가 같이 공산당을 소탕하던 섬서 17로군 사령관 양후청(楊虎成/양호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중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서안사변'이 발생한 것이다. 


◈ 부하들에 의해 연금된 장제스, 타협을 거부하다 


집무실의 침대에 누운 장제스는 만감이 교차했다. 

갑자기 어제와 그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장쉐량이 이틀 연속 찾아와 비분강개하면서, 때로는 눈물도 흘리며 간청했다. 

"국가와 민족의 존망이 마지막 갈림길에 있습니다. 
항일을 하지 않으면 나라를 구할 수 없습니다. 
내전을 그치지 않으면 항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장제스는 책상을 치면서 고함을 질렀다. 

"지금 네가 바로 총으로 나를 쏴 죽여라. 나의 공산당 소탕전 계획은 바꿀 수 없다" 

이번에는 양후청이 들어가 간언했다. 

소용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결국 최후의 극단적 방법을 쓰기로 합의했다. 

간병(兵諫), 무력을 통해 간언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공하자,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은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눈물을 머금고 만주를 포기했다. 

장제스는 대신 그의 부대를 이 곳 섬서성에 보내 북쪽 보안에 소비에트 근거지를 마련한 마오쩌뚱 (毛澤東/모택동)의 홍군을 소탕하도록 했다. 

고향을 일본군에게 뺏기고 같은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눈 동북군은 물론 17로군 병사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동북 3성에 꼭두각시 '만주국'을 세운데 이어 북경이 있는 화북 내륙지방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 세계를 놀라게 한 '서안사변'...비상 걸린 남경 정부와 중국 공산당 

장제스가 구금됐다는 소식을 들은 남경의 국민당 정부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먼저 중앙군을 서안 방향으로 진군시키고, 서안에 폭격기를 보내 반란군을 몰살시키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같은 강경론을 잠재운 것이 장개석의 처남인 쑹쯔원(宋子文/송자문)과 장개석의 아내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었다. 

쑹쯔원은 서안으로 달려가 장제스와 장쉐량.양후청 양측을 오가며 중재했다. 

다시 남경에 돌아온 쑹쯔원은 의견 절충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한 후 이번에는 쑹메이링과 함께 다시 서안으로 갔다. 


한편 장쉐량으로부터 제1보를 받은 공산당 중앙은 모스크바에 이를 보고하고 쿠데타를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여기도 장제스를 처형하고 항일정부를 세우자는 강경론이 우세했으나, 소련의 반대에 부딪치고 점차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방침으로 돌아섰다. 

이에 따라 마오쩌뚱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일행이 장쉐량이 보낸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향했다. 


◈중국을 살리기 위한 치열한 협상...항일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하다 

구금당한 장제스는 처음에는 완고하게 버텼다. 

그러나 처남과 아내가 간곡하게 설득하자 점차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서안사변 발생 11일째인 12월 23일 드디어 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와 장쉐량.양후청, 쑹쯔원. 쑹메이링 남매가 만나 담판을 벌였다. 


회담이 끝나자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의 공관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쑨원(孫文/손문) 주석 시절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장과 정치주임으로 같이 일했던 사이였다. 

저우언라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10년 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많이 늙으셨네요" 

장제스는 "저우언라이~ 자네는 옛날 나의 부하 아닌가? 마땅히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머리를 맞댄 끝에 두 사람은 공산당 소탕전을 중지하고, 일본에 항전하기 위해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과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합의문은 만들지 않았다. 

장제스는 문서화하자는 저우언라이에게 "말한 이상 성실히 지킬 것이며, 행한 이상 결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의 약속만 한 것이다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남경으로 초청해 제2차 국공 합작의 골격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장제스 부부와 처남은 비행기를 타고 서안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공항에서 돌연 장쉐량이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장제스 부부가 말렸으나 그는 "이번 사변의 시작부터 끝까지가 내 책임 하에 진행됐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결국 장쉐량은 비행기에 동승했다. 

◈ 2차 국공합작 성립...서안사변의 두 주역은 역사에서 퇴장하다 

다음 해 1937년 2월 19일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중앙은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한다는데 합의했다. 

5개월 후 일본군이 북경 서남쪽에 있는 노구교 부근에서 중국군을 공격하면서 8년에 걸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8로군과 신사군은 형식상 국민당 지휘를 받지만, 사실상 독자적으로 일본군에 대항하는 유격전에 들어갔다. 

국민당 군대의 포위 공격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 몰렸다가 서안사변으로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한편 장제스를 따라 남경에 온 장쉐량은 10년의 금고형을 받고 연금되었다. 

장쉐량은 서안사변을 결행하면서 "나는 36살로 죽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장제스는 중국 본토를 공산당에게 빼앗기고 대만으로 달아날 때 장쉐량을 끌고가 또 유폐시켰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장제스의 생일날에 장쉐량은 시계를 선물했다. 

장제스는 답례품으로 낚싯대를 보냈다. 

이제 연금을 해제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간청에 대해 아직 멀었으니 세월이나 낚고 있으라는 대답이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장제스도 죽고 대를 이은 총통인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까지 세상을 떠난 후였다. 

1990년 그의 90번째 생일날 연금된 지 55년만에 풀려났다. 


5년 후 대만을 떠나 동생이 살고 있는 하와이에 거주하다 2001년 10월 14일 101세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접었다. 

본토에서 초청장이 왔으나 국민당, 공산당을 모두 버리고 국적 없이 이승을 떠났다. 


한편 장제스는 서안사변의 주역 중 하나인 양후청 장군에게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으라고 명했다. 

장제스는 그가 순진한 장쉐량을 꼬드겨 쿠데타를 모의한 것으로 믿고 언젠가 보복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양 장군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을 방문해 일본의 침략을 고발했다. 

그가 귀국하자 장제스는 그를 체포해 감옥에 쳐넣은 후 대만으로 도망갈 때 특무에게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민당 특무는 양 장군은 물론 그의 아들과 10살 된 막내딸, 비서의 가족, 부관, 경호원까지 모두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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