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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27]"정신없이 후퇴했다" VS "지쳐서 못 쫒아갔다"
맥아더의 오판이 부른 참사…청천강 전선 붕괴되다
2014-05-13 11:20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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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착한 국군 6사단 7연대, 포위망에 걸리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은 유엔군은 평양 마저 쉽게 점령하자 자만에 빠졌다.
이미 중공의 주은래 총리가 38선을 넘으면 참전하겠다고 경고했으나 이를 무시했다.
미 육군은 한국에 투입한 2사단을 유럽에 배치할 궁리를 하고 있었고, 미 8군의 워커 사령관은 탄약 공급을 줄여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모든 부대가 제각기 중국과와의 국경을 향해 레이스를 펼쳤다.
그 선두는 국군 6사단이었다.
마침내 7연대가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에 압록강에 진출했다.
만세를 부른 국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낼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다.
이때 사단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포위됐으니 무조건 철수하라"
이 시간에 뒤를 따르던 제 2연대가 퇴로를 차단당한 후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포위망에 갇힌 7연대는 형체도 없이 조각 조각난 후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다.
국군 6사단이 위기에 봉착한 순간, 그 왼쪽에서 북진하고 있던 국군 1사단도 맹공격을 받고 전진을 멈췄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8군사령부는 제 1기병사단에게 국군을 추월해 선두에 서라고 지시했다.
중공군은 이미 우측의 한국군을 관통한 후 우회해 1기병사단의 퇴로를 차단한 상태였다.
기병사단은 서둘러 철수했으나 가장 앞에 행군하던 3대대는 포위망에 갇혔다.
결국 3대대 구출을 포기하고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미 육군 역사상 대대 전체를 포기하고 철수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이것이 이른바 중공군의 '1차 전역'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참사가 발생한 건가?
◈ 자만에 빠진 미국 수뇌부, 중국의 참전 의지와 실력을 얕보다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기 열흘 전의 하와이 서쪽에 있는 웨이크섬.
군 통수권자인 트루먼 대통령이 휘하의 사령관을 만나러 멀리 워싱턴에서 날아왔다.
기이한 회담이다.
그만큼 전쟁 영웅 맥아더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의례적인 덕담을 나눈 다음 트루먼이 맥아더에게 물었다.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가능성은 아주 적습니다.
압록강을 넘을 수 있는 병력은 5~6만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군도 없습니다.
중국이 남하해 평양으로 진격한다면 우리 공군의 폭격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겁니다"
이 시각에 만주에서는 유엔군을 박살내기 위해 선발대 25만명이 압록강변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 대일전과 내전에서 단련된 중공군, 명장의 지휘 아래 압록강을 건너다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바로 이날 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들은 청천강 북쪽 산악지대에 조직적으로 흩어져 미군과 한국군이 깊숙히 진격해 자루 안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들을 지휘하는 장군은 일본군과 장개석 군대와 전투를 치루면서 용맹을 떨친 중공군의 최고 전략가인 펑더화이였다.
그가 마오 주석으로부터 받은 지침은 하나였다.
"허약한 국군을 섬멸한 후 우회해 미 8군의 퇴로를 차단한 다음 포위 공격을 한다"
◈ 1950년 11월 말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 VS 중공군의 <2차 전역>
첫 전투에서 한국군 8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에게 궤멸적 타격을 가한 중공군은 일주일만에 홀연히 사라졌다.
이들은 북한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산속 깊숙히 들어가 유엔군이 더 큰 덫에 걸려들기만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미끼를 맥아더 사령부가 덥석 물고 말았다.
당시 30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이 들키지 않고 한반도에 들어와 대략 18만 명이 청천강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12만 명이 개마고원으로 진군하는 미 10군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마다 조용히 이동하는 거대한 중공군은 '그림자가 없는 유령'으로 불렸다.
중공군이 사라지자 맥아더는 대통령에게 밝힌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믿었다.
맥아더는 장병들에게 '크리스마스까지는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순간에 펑더화이는 유엔군이 공격해 들어오면 깊숙히 유인한 후 국군을 먼저 격멸하고 미군의 후방에 파고 들어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이어 공세를 강화해 유엔군을 평양-원산 선까지 밀어버린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11월 24일 오전 10시 청천강 북쪽에서 유엔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자루 입구를 지나 그 안으로 유엔군이 꾸역 꾸역 밀고 들어왔다.
다음날 대규모의 중공군이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개시하며 자루의 끈을 묶어 버렸다.
이번에도 주 목표는 가장 오른쪽에서 북진하는 국군 2군단이었다.
2군단은 배후가 봉쇄되자 일거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중공군은 미 8군의 퇴로인 덕천과 맹산 일대로 파고 들어 8군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 미 제2사단, 군우리의 '죽음의 계곡'에서 전멸하다
결국 유엔군 지휘부는 공세 나흘만인 11월 28일 철수명령을 내렸다.
청천강 상류에 있던 미 제2사단도 남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카이저 사단장은 정찰대를 남쪽 순천으로 이어지는 길로 보내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양쪽 산 위에 포진해 있던 중공군은 정찰대를 그대로 보냈다.
2사단 본진이 오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덫이 놓인 것을 전혀 모른 채 9연대, 사단본부, 포병과 지원부대, 38연대, 국군 3연대, 국군 23연대가 들어왔다.
이들이 험준한 계곡으로 이어진 '죽음의 계곡'에 들어서자 10Km에 걸쳐 중공군의 집중적인 사격과 수류탄 공격이 이어졌다.
미군 사단 하나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누구 하나 적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황 상태에 빠진 2사단 장병들은 충격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 전투로 미 2사단은 3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모든 장비를 잃어 부대가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이 정도 피해로 그친 것은 중공군에게 중화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 무질서한 퇴각...중공군 "적군이 사라졌다"
2사단이 궤멸되자 유엔군 전체가 두려움에 휩싸였다.
적에 대한 두려움은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 치명적이다.
지휘관들까지 정신이 나갔다.
전열을 수습해 지형상 폭이 좁은 평양-양덕-원산을 잇는 저지선을 만들었어야 했다.
'퇴각 명령'이 떨어지자 모든 전선에서 무질서한 후퇴가 진행됐다.
다들 평양도 버리고 임진강 남쪽으로 달려갔다.
불과 20일만에 200km 떨어진 38선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그 뒤를 쫒는 중공군은 적군을 만나지 못했다.
차량이 없어 기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당연히 유엔군이 평양-원산을 잇는 선에서 저항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적군은 사라져 버렸다.
추격을 하고 싶어도 중공군은 너무 지쳐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이렇게 해서 통일의 꿈은 멀어져갔다.
그러나 동부전선인 함경도에서 다른 양상의 전투가 벌어지고, 맥아더 대신 새로운 지휘관이 부임하면서 전쟁의 모습은 바뀌게 된다.
The Battle of Chosin, 血战长津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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