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3.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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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23]소련군, 단 6일간의 전투 끝에 막대한 전리품 챙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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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 러일전쟁의 패전을 앙갚음하기 위해 대일전 선포하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지체없이 소련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출동해 만주의 관동군을 격멸하라" 

그리고는 참모들에게 말했다. 

"전쟁의 열매는 힘으로 따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것이야" 


사흘 후 새벽 0시를 기해 소련군 170만명이 세 방면에서 일제히 만주로 쏟아져 들어갔다. 

동원한 대포만 약 3만 문, 전차는 5,300대, 항공기는 5,200기에 달했다. 

한때 일본 육군의 최정예라고 자랑했던 관동군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6일만에 소련군은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선봉부대는 요동반도 최남단에 있는 다롄(大連/대련)에 도달했다. 

만주를 휩쓴 소련군은 곳곳에서 일본인 가옥을 점거하거나 부녀자를 강간하고, 관동군과 만주국 고위인사를 체포해 시베리아로 압송했다. 

관동군은 자기 가족들만 기차에 태워 보내고, 100만명이 넘는 만주 이주민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소련군은 전쟁으로 파괴된 자국의 재건을 위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관동군 60만명을 시베리아로 보냈다. 

이 가운데 6만명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 만주국 붕괴…'마지막 황제' 푸이는 소련군에게 체포 


관동군은 비록 만주국은 소멸됐지만 황제 푸이만은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다고 믿고, 그를 일본으로 피신시키기로 했다. 

일단 퉁화에서 비행기를 타고 평양을 거쳐 일본으로 가기로 했으나, 비행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소형 비행기로 펑텐 비행장으로 가서 대형 비행기로 갈아타기로 했다. 

그러나 이들이 펑텐 비행장에 도착한 것과 동시에 소련군 낙하산부대가 비행장을 점령해 푸이 일행 12명은 체포되고 말았다. 

황제는 곧바로 시베리아로 연행되어 59년 12월 특사를 받을 때까지 14년 동안 구류생활을 하게 된다. 

◈ 소련군, 한반도와 사할린 남부로도 진격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뛰어든 것은 미국의 작품이었다.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면 미군 100만명의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보고, 소련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같은 요청을 스탈린은 넌지시 받아들였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그는 "일본의 배신적 공격으로 침해된 러시아의 옛 권리는 회복돼야 한다"며 전리품 목록을 제시했다. 

1.만주에서의 소련 권익 회복(부동항과 철도 등) 
2.사할린 남부의 점령 
3.쿠릴열도의 섬들을 전부 갖는다 

루즈벨트가 동의하자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한 후 2~3달 후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주에 소련군이 침공한 후 이틀이 지난 1945년 8월 11일. 

소련군 제2극동방면군은 일제히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로 쳐들어갔다. 

사할린의 일본군 제88사단은 천황의 항복선언 발표도 모른 채 계속 격렬하게 저항했다. 

소련군이 노린 지역은 최남단에 있는 2개의 항구였다. 

스탈린은 얄타협정을 무시하고 일본 본토의 최북단인 홋카이도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한 후 30분이 지난 시간에, 소련군 전투기가 출격해 함경북도 나진 등 동해안의 몇 개 항구를 폭격하면서 한반도 침공이 시작됐다. 

다음 날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인들이 피난을 가면서 이 지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소련군은 경흥에 진입한데 이어 8월 11일에는 웅기에 상륙하고, 이튿날 나진을 점령하였다 

파죽지세로 남하한 소련군의 선두는 개성까지 들어갔다. 

이 시각에 미군은 600마일(965Km) 떨어진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었다. 

◈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둘러싸고 美·蘇 간에 힘겨루기 벌어지다 


다급한 건 미국이었다. 

소련군의 진격을 막지 않으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에게 넘어간다. 

천황이 항복 발표를 하는 1945년 8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비밀전보를 보냈다. 

"맥아더 장군에게 일본군 투항에 관한 세칙을 담은 '일반명령 1호'를 하달했습니다. 그 내용 중 하나가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측이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의 일본군 항복을 받자는 것입니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주저없이 받아들였다. 


스탈린의 이례적인 양보를 지켜본 미국 쪽이 어리둥절했다. 

38선을 획정한 미 국방성의 딘 러스크 대령(후일 국무장관 역임)은 이렇게 회고했다. 

"분할 점령의 경계선을 너무 북쪽으로 잡으면 소련이 응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서울을 이 쪽에 넣는 38도선 안은 미국이 욕심을 최대한 낸 것인데, 소련이 수락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스탈린은 왜 미국의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였을까? 

스탈린의 눈길은 일본 본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트루먼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38도선 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일본 홋카이도 북부를 소련군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쉽게 얘기하면, 한반도의 38도선 남쪽을 줄테니 같은 38도선 북쪽인 홋카이도 북부를 달라는 것이다. 

미국은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미국의 동의와 관계없이 소련군이 홋카이도에 상륙한다"고 통보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맥아더 장군은 "내 허락 없이 소련군이 한 명이라도 홋카이도에 들어오면 일본 주재 소련 대표단 전원을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소련이 굴복했다. 

혼란의 와중에 일본 대신 한반도가 분단된 셈이다. 


◈ 득의만만한 스탈린, 제정 러시아의 영토를 전부 되찾다 

전리품 거래가 끝난 후 소련의 새로운 국경을 표시한 지도가 스탈린의 별장으로 배달되었다. 

스탈린은 핀으로 지도를 벽에다 고정시킨 후 부하들에게 설명했다.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지 한번 봅시다. 북쪽은 모두 정상입니다. 핀란드가 우리에게 지은 죄가 커서, 우리는 국경을 레닌그라드에서 북쪽으로 확장했습니다. 발트해 연안에 있는 세 나라는 원래 우리 영토였는데,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 우크라이나, 몰다비아 사람들도 다시 소련땅 안에서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 곳은 어떻습니까? 사할린과 쿠릴열도 모두 우리에게 귀속되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얼마나 좋습니까? 뤼순항도 우리 것이고, 다롄항도 우리 것입니다" 

계속해서 담배꽁초로 중국 일대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장춘철도도 역시 우리 것이고, 중국, 몽고 역시 문제가 없습니다" 


그가 설명한 지역에서 한반도는 빠져 있었다. 

그만큼 소련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나 5년 후 한반도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지진의 진원지로 떠오른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