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3. 13:01

[임기상의 역사산책22] 1936년 12.12 쿠데타...

http://m.nocutnews.co.kr/news/list?c1=262&t2=1343&page=7


http://m.nocutnews.co.kr/news/4016085


◈ 중국과 한국 역사의 분수령...서안사변 

서안사변~국공합작~항일전쟁의 승리~공산당의 대륙 석권~한국전쟁은 하나의 길고 긴 이어진 강이다. 

서안사변이 발발하면서 장제스는 중국통일을 잃은 대신 중일전쟁의 승리를 얻었다. 

기사회생한 중국 공산당은 항일전쟁 중에 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의 민심을 얻어 끝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20년간의 내전과 일본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강력해진 홍군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면서 한반도에 모습을 드러낸다. 




1936년 12월 12일 새벽 6시, 중국 섬서성 서안시의 북동쪽 30Km 거리에 있는 화청지. 

당나라 현종의 별장이었던 이 곳의 오간청 건물에 머물고 있던 국민당 주석 겸 군사령관인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총소리에 잠이 깼다. 

장제스는 서둘러 잠옷바람에 끌신을 신고 화청지의 뒷산인 여산으로 올라갔다. 

담을 넘다 다친 상태에서 산기슭의 바위들 틈에 쭈구려 앉아 있던 그를 장쉐량(張學良/장학량) 휘하의 장교가 발견해 숙소로 끌고 갔다. 

장쉐량은 누구인가? 

한때 만주의 동북 3성을 통치하던 동북군 사령관이자 일본군에 쫒겨 내려온 후 장제스 밑에서 서북군 공산당 포위소탕전 부사령관으로 있는 사실상 2인자였다. 

그러던 그가 같이 공산당을 소탕하던 섬서 17로군 사령관 양후청(楊虎成/양호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중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서안사변'이 발생한 것이다. 


◈ 부하들에 의해 연금된 장제스, 타협을 거부하다 


집무실의 침대에 누운 장제스는 만감이 교차했다. 

갑자기 어제와 그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장쉐량이 이틀 연속 찾아와 비분강개하면서, 때로는 눈물도 흘리며 간청했다. 

"국가와 민족의 존망이 마지막 갈림길에 있습니다. 
항일을 하지 않으면 나라를 구할 수 없습니다. 
내전을 그치지 않으면 항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장제스는 책상을 치면서 고함을 질렀다. 

"지금 네가 바로 총으로 나를 쏴 죽여라. 나의 공산당 소탕전 계획은 바꿀 수 없다" 

이번에는 양후청이 들어가 간언했다. 

소용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결국 최후의 극단적 방법을 쓰기로 합의했다. 

간병(兵諫), 무력을 통해 간언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공하자,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은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눈물을 머금고 만주를 포기했다. 

장제스는 대신 그의 부대를 이 곳 섬서성에 보내 북쪽 보안에 소비에트 근거지를 마련한 마오쩌뚱 (毛澤東/모택동)의 홍군을 소탕하도록 했다. 

고향을 일본군에게 뺏기고 같은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눈 동북군은 물론 17로군 병사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동북 3성에 꼭두각시 '만주국'을 세운데 이어 북경이 있는 화북 내륙지방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 세계를 놀라게 한 '서안사변'...비상 걸린 남경 정부와 중국 공산당 

장제스가 구금됐다는 소식을 들은 남경의 국민당 정부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먼저 중앙군을 서안 방향으로 진군시키고, 서안에 폭격기를 보내 반란군을 몰살시키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같은 강경론을 잠재운 것이 장개석의 처남인 쑹쯔원(宋子文/송자문)과 장개석의 아내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었다. 

쑹쯔원은 서안으로 달려가 장제스와 장쉐량.양후청 양측을 오가며 중재했다. 

다시 남경에 돌아온 쑹쯔원은 의견 절충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한 후 이번에는 쑹메이링과 함께 다시 서안으로 갔다. 


한편 장쉐량으로부터 제1보를 받은 공산당 중앙은 모스크바에 이를 보고하고 쿠데타를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여기도 장제스를 처형하고 항일정부를 세우자는 강경론이 우세했으나, 소련의 반대에 부딪치고 점차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방침으로 돌아섰다. 

이에 따라 마오쩌뚱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일행이 장쉐량이 보낸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향했다. 


◈중국을 살리기 위한 치열한 협상...항일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하다 

구금당한 장제스는 처음에는 완고하게 버텼다. 

그러나 처남과 아내가 간곡하게 설득하자 점차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서안사변 발생 11일째인 12월 23일 드디어 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와 장쉐량.양후청, 쑹쯔원. 쑹메이링 남매가 만나 담판을 벌였다. 


회담이 끝나자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의 공관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쑨원(孫文/손문) 주석 시절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장과 정치주임으로 같이 일했던 사이였다. 

저우언라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10년 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많이 늙으셨네요" 

장제스는 "저우언라이~ 자네는 옛날 나의 부하 아닌가? 마땅히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머리를 맞댄 끝에 두 사람은 공산당 소탕전을 중지하고, 일본에 항전하기 위해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과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합의문은 만들지 않았다. 

장제스는 문서화하자는 저우언라이에게 "말한 이상 성실히 지킬 것이며, 행한 이상 결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의 약속만 한 것이다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남경으로 초청해 제2차 국공 합작의 골격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장제스 부부와 처남은 비행기를 타고 서안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공항에서 돌연 장쉐량이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장제스 부부가 말렸으나 그는 "이번 사변의 시작부터 끝까지가 내 책임 하에 진행됐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결국 장쉐량은 비행기에 동승했다. 

◈ 2차 국공합작 성립...서안사변의 두 주역은 역사에서 퇴장하다 

다음 해 1937년 2월 19일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중앙은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한다는데 합의했다. 

5개월 후 일본군이 북경 서남쪽에 있는 노구교 부근에서 중국군을 공격하면서 8년에 걸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8로군과 신사군은 형식상 국민당 지휘를 받지만, 사실상 독자적으로 일본군에 대항하는 유격전에 들어갔다. 

국민당 군대의 포위 공격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 몰렸다가 서안사변으로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한편 장제스를 따라 남경에 온 장쉐량은 10년의 금고형을 받고 연금되었다. 

장쉐량은 서안사변을 결행하면서 "나는 36살로 죽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장제스는 중국 본토를 공산당에게 빼앗기고 대만으로 달아날 때 장쉐량을 끌고가 또 유폐시켰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장제스의 생일날에 장쉐량은 시계를 선물했다. 

장제스는 답례품으로 낚싯대를 보냈다. 

이제 연금을 해제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간청에 대해 아직 멀었으니 세월이나 낚고 있으라는 대답이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장제스도 죽고 대를 이은 총통인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까지 세상을 떠난 후였다. 

1990년 그의 90번째 생일날 연금된 지 55년만에 풀려났다. 


5년 후 대만을 떠나 동생이 살고 있는 하와이에 거주하다 2001년 10월 14일 101세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접었다. 

본토에서 초청장이 왔으나 국민당, 공산당을 모두 버리고 국적 없이 이승을 떠났다. 


한편 장제스는 서안사변의 주역 중 하나인 양후청 장군에게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으라고 명했다. 

장제스는 그가 순진한 장쉐량을 꼬드겨 쿠데타를 모의한 것으로 믿고 언젠가 보복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양 장군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을 방문해 일본의 침략을 고발했다. 

그가 귀국하자 장제스는 그를 체포해 감옥에 쳐넣은 후 대만으로 도망갈 때 특무에게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민당 특무는 양 장군은 물론 그의 아들과 10살 된 막내딸, 비서의 가족, 부관, 경호원까지 모두 살해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