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3. 13:55

"왜 유순했던 조선인들이 포악해졌을까?"…반성 없는 日本

2014-05-07 14:14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24]패전 직후에 고관대작들은 재산 빼돌리기에 '혈안'



http://m.nocutnews.co.kr/news/4019564


◈ 8.15 패전 후 혼란에 빠진 조선의 일본인들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오자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들 앞에는 모든 특권 박탈과 함께 본토 귀환과 정착이라는 고달픈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에게 희안한 지시가 떨어졌다. 

당장 일본 본토로 갈 수 있는 배를 확보하라는 상부의 명령이다. 

알고 보니 아베 조선총독 부인 일행이 탈 배가 시급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틀 후 '사모님' 일행과 짐을 실은 배가 부산 앞바다를 출발했다. 

그러나 이 배는 얼마 못가서 목도 앞바다에서 멈춰선 후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배도 낡았지만 조선에서 약탈한 귀중품을 너무 많이 실어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짐을 절반 정도 버리고 간신히 부산으로 돌아와 쉬쉬하면서 경성으로 몰래 잠입했다. 

이렇게 조선총독 부부를 시작으로 한반도를 호령하던 모든 고관대작들은 재산 빼돌리기 광풍에 휘말렸다. 

◈ 아래 것들을 버려둔 채 대일본제국의 지도자들 가족 데리고 일제히 도주 


군경 상층부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대기업 간부들이 제일 먼저 탈주에 나섰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소련군이 침공해 들어온 만주와 북조선의 일본군 수뇌부였다. 

이들은 재빨리 열차를 동원해 가족들을 피신시켰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처럼 100만명에 달하는 일본 민간인들에게는 대피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이들 민간인들은 소련에 끌려가거나 재산을 다 빼앗긴 채 걸어서 거지꼴로 북조선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왔다. 


남은 일본인들은 대부분 부녀자와 아이들이었다. 

남편은 군대에 끌려가 소식이 두절됐기에 여자들이 짐과 아이를 끌고 하염없는 귀향길에 나선 것이다. 


일본에 도착한 여자들은 제일 먼저 이재민 병원에 수용돼 성병 치료와 강제 낙태수술을 받았다. 

이들이 당한 고초를 일본 정부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천황 사진과 신사의 위패를 불태워라" 

일본이 항복하자 전국적으로 경찰서와 주재소,행정관서가 습격을 받았고, 특히 '왜적 우상의 복마전'인 신사가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다급해진 총독부는 전국 관공서에 걸어둔 천황 사진과 신사의 위패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기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분과 성소를 '불경한' 조선인들이 파괴하는 것을 두 눈 뜨고 보기 싫었던 것이다. 


조선인 군중들이 몰려다니자 일본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다들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보는 건 처음 겪는 일이고, 자기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물었다. 

"왜 유순했던 조선인들이 이렇게 포악한 행동을 할까?"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원래 살던 조선인들을 변두리로 몰아내고, 도시 중심가에 일본인촌을 만들었다. 

그 안에는 철도역과 학교, 병원, 관공서, 백화점 등 없는 게 없었다. 

해방이 되자 처지가 역전됐다. 

직장과 집에서 쫒겨난 일본인들은 집단수용소에서 거지꼴로 살면서 소련군 집의 식모나 목욕탕 때밀이, 행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돌아간 그들은 거기서도 차별대우를 받게 되자, 조선에 대해 이를 갈게 된다. 

조선에 대한 침략과 수탈은 잊어먹고 패전 후 당한 고통만 곰씹고 있는 셈이다. 

◈ 너무나 달랐던 소련군과 미군 


소련군의 행색을 처음 본 일본인들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당시 한 일본인의 목격담이다. 

"마차를 앞세운 긴 행렬이 이어졌다. 이들은 만도린처럼 생긴 장총을 어깨에 걸어 축 늘어뜨린 것이 마치 '유목민' 같았다. 후미에는 산양이나 닭까지 매달고 왔다. 마차 위에는 부뚜막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개고기는 역시 누렁이가 최고라며, 길에 나다니는 개만 보이면 어김없이 총을 쏘아 잡으며 행군을 계속했다" 

이들은 무기와 탄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에서 조달했다. 

소련군은 북조선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일본인을 억류했다. 

한편으로는 폭행과 약탈을 하고, 한편으로는 공장을 뜯어가고, 일본군과 기술자들은 죄다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당연히 첫 타겟은 남편없이 혼자 사는 일본인 부녀자였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의 집단 대탈주가 시작된다. 


미군은 달랐다, 

춘천에 주둔한 500~600명 규모의 미군을 본 일본인들은 크게 놀랐다. 

모두 최신식 무기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골에 주둔하면서도 침구와 식량, 심지어는 본국에서 보낸 생수까지 휴대하고 있었다. 

다들 한숨을 쉬었다. 

"이런 나라를 상대로 4년간 전쟁을 벌였다니...." 

◈ 혼란에 빠진 만주군...일본인 장교들을 처단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 꼭두각시 나라 '만주국'의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일본인 장교들이 살해되거나 무장해제된 후 연금되었다. 

어느 부대나 장교는 일본인이었고, 하사관 이하는 모두 중국인이었다. 

이들 중국인 장병들이 작당해서 일본계 장교를 곳곳에서 사살했다.

만주국 군인들은 각기 국부군이나 공산당에 들어가 서로 총부리를 겨눈다. 

◈ 해방의 혼란 통에 흩어지는 귀중한 문화재들 


갑자기 일본이 패망하자 망연자실한 건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했던 일본인들이었다. 

어떤 자들은 금붙이 패물과 약탈한 문화재를 어떻게 하든지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광분했다. 

그러나 미 군정청이 갖고 나갈 수 있는 짐을 두 손에 들 수 있는 짐과 현금 1,000엔으로 제한하자 절망에 빠졌다. 

그래서 총독 부인이 비밀리에 배를 구한 것이고, 대구의 오구라 같은 악명높은 수집가들은 알짜만 묶어 밀항선을 타고 도주했다. 

나머지 문화재는 친한 한국인에게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위 사진은 조선철도 전무였던 시미즈가 갖고 있던 것인데, 숨겨서 갖고 나가려다 여의치 않자 한국인 친구에게 맡긴 문화재이다. 

이 백자항아리는 골동가를 흘러 다니다 정치인 장택상의 컬렉션에 들어갔다. 

그러다 우연히 이 보물을 본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이 사들여 이화여대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군산의 대지주였던 미야자키가 갖고 있던 연적의 행방은 찾을 길이 없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간송미술관 연적과 거의 모양은 같지만 약간 특징이 다른 걸작이었다고 한다. 

미와자키가 일본으로 갈 때 모 골동품 주인에게 넘어갔다가 여러 사람 손을 거쳐 흘러다니다가 소식이 끊겼다. 

이들 문화재 말고도 수많은 보물들이 한국인에 의해 일본으로 넘어가거나, 미군 소장품으로 들어간 뒤 태평양을 넘고 말았다. 

이렇게 패전과 함께 110만명에 달하는 일본인 군인과 민간인들이 그들이 원래 살던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고국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해 호사를 누린 대륙 침략의 첨병'이란 비난을 받고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식민자' 또는 '지배자'가 아니라 '패전의 피해자'란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일본제국의 '사생아' 집단으로 전락한 셈이다. 

최근 '조선을 떠나며'(역사비평 간)란 저서를 통해 조선의 일본인을 분석한 역사학자 이연식 씨는 "일본인들이 패전 후 느낀 공포는 그 곳이 엄연히 조선인의 땅이란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에 증폭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패전 후 맞이한 재앙이 일본의 조선 지배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대다수 귀환자들은 패전이란 직접적인 계기에만 매몰됐다"고 분석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