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 쓴 이야기/임기상의 역사산책'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14.09.03 비운의 여성혁명가 주세죽
  2. 2014.09.03 윤봉길과 여성혁명가 이화림
  3. 2014.09.03 1933년 '여자 안중근' 조선女人 남자현
  4. 2014.09.03 1950년 12월 흥남부두
2014. 9. 3. 15:33

http://m.nocutnews.co.kr/news/4033003


박헌영 전 북한 부수상의 첫부인 주세죽 



일명 까레에바·한 베라. 함경남도 함흥 출신이다.
함흥 영생여학교 고등과에서 2년 동안 수학했다. 1919년 함흥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개월 동안 유치장에 감금되었으며, 공소가 끝나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뒤 함흥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했고, 1921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1921년 4월 상해(上海)로 가서 안정씨여학교(晏鼎氏女學校)에 입학해 영어와 피아노를 배운 뒤 1922년 5월 귀국했다. 이해에 박헌영과 결혼했다. 1924년 5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1월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해 개회선언을 하고 강령과 규약을 기초했으며 집행위원이 되었다. 2월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4월 고려공산청년회 결성대회에서 중앙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1월 ‘제1차 조공검거사건(신의주 사건)’으로 체포되어 신의주 경찰서에서 취조 받고 12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7년 5월 근우회 창립대회에 참가해 임시집행부 성원이 되었다. 1928년 8월에 남편 박헌영과 함께 일제경찰의 추적을 피해 소련으로 탈출했다. 박헌영과 함께 정치망명가들을 위한 집에서 살았으며, 1929년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반에 입학해 1931년까지 공부했다.
당재건운동을 위해 1932년 1월 상해로 갔다. 1933년 7월 박헌영이 체포된 뒤 일정 기간 상해에 머물다가 1934년에 김단야와 함께 소련으로 되돌아갔다. 1934년 김단야와 재혼했다. 그 해에 5개월 가량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했고, 그 뒤 외국인노동자출판부에서 교정원이 되었다.
1937년 11월 재혼한 남편 김단야가 ‘일제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 1938년 ‘사회적으로 위험한 분자’라는 혐의로 모스크바에서 알마아따로 유배되었다. 1938년 9월부터 1940년 9월까지 피혁공장의 개찰원으로 근무했다. 1940년 9월부터 1946년 3월까지 까르마끄치구역 협동조합에서 근무했다.
1946년 7월부터 끄질오르다주 공업기업소에 있는 봉제작업장에서 직공으로 근무했다. 1946년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시켜 주거나 17세 된 딸과 함께 있도록 모스크바로 가게 해줄 것을 소련당국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0년대 중엽 사망했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36]비운의 여성혁명가 주세죽, 소련과 한국서 명예회복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하다 우리 역사 속에서 잊혀진 존재가 됐을까? 



남한에서는 이념적인 금제 탓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줄곧 국가 이념(이데올로기)으로 작동해온 반공 이념 때문이었다. 주세죽은 사회주의자였다. 3·1운동 참가자였고, 그 직후에 물밀듯이 몰려온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삶이 공론장에 떠오른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일이다. 민주주의적 권리와 언론 자유가 확장된 조건 속에서 역사에 복귀할 수 있었다. 비로소 활자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게 됐다.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1996년)에 ‘주세죽’ 항목이 수록됐고, 2004년에는 그의 굴곡진 삶의 편린이 기록된 <이정 박헌영 일대기>가 출간됐다. 2007년에는 정점을 찍었다. 한국 정부가 고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 박헌영·김단야·임원근 출옥하다 

1924년 1월 29일 아침 8시 평양형무소. 

정문이 조용히 열리자 20대 중반의 젊은이 3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조선공산당의 결성과 항일투쟁을 주도해나갈 박헌영·김단야·임원근의 '삼인당'이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상하이에서 활동하다 경성에 잠입하던 중 체포돼 1년 10개월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것이다. 

이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 중 밝은 얼굴로 하얀색 한복을 들고 앞으로 나온 미모의 여성 2명이 있었다. 

한 명은 이미 상해에서 박헌영과 혼례를 치른 주세죽이고, 다른 한명은 임원근의 연인 허정숙이었다. 

멀지 않아 김단야에게도 고명자라는 여성이 나타난다. 

이 세 여인이 여성 사회주의자 트로이카이다. 

이들 3쌍의 부부는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 창립을 주도하고, 조선여성근우회에서 선두에서 활동을 벌였다. 

이런 전성기는 2년여만에 끝나고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탄압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들 엇갈린 행로를 걷게 된다. 

◈ 박헌영·주세죽 부부, 블라디보스톡으로 탈출하다 

일본 경찰은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창립된 사실을 파악하고 핵심 인물 검거에 나섰다. 

제일 먼저 박헌영·주세죽 부부가 집에서 체포됐고, 다음날 임원근·허정숙 부부가 연행됐다. 

김단야는 재빨리 상하이로 피신했다. 

그의 아내 고명자는 사건이 터지기 직전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검거를 면했다. 

혹독한 고문 끝에 삼인당 3명은 기소되고, 주세죽과 허정숙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박헌영은 재판 도중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수감 2년여만인 1927년 11월 22일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그러나 박헌영 부부는 주세죽의 고향인 함흥에서 머물다 비밀리에 두만강을 넘어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거기서 이들 부부의 유일한 혈육인 비비안나를 낳는다 

아기를 안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헌영 부부는 먼저 도착한 김단야·고명자 부부와 합류한다. 

박헌영은 김단야의 추천을 받아 국제레닌대학에 입학하고, 주세죽은 고명자가 다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가 공부에 전념한다. 
레닌학교에서 박헌영은 호치민과 깊은 친교를 나눈다. 

◈ 박헌영의 체포와 영원한 이별…그리고 '배신' 

공부를 마친 박헌영 부부는 아기를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기고 상하이로 떠났다. 

이들 부부는 프랑스 조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 김단야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1933년 7월 5일 상하이 공동조계 북경로에서 박헌영이 일경에 의해 체포됐다. 

조선으로 압송된 그는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기나긴 수감생활에 들어갔다. 

상하이에 남은 주세죽과 김단야는 다시 모스크바로 피신한다. 

거기서 두 사람은 박헌영과 고명자를 버리고 결혼을 한다. 

3년 후인 1937년 11월 5일 김단야는 일제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당시 소련을 휩쓸던 스탈린의 '대숙청'에 걸려든 것이다. 

김단야는 제대로 변호도 못하고 제1급 범죄자로 선고받은 후 처형당한다. 

주세죽의 인생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제1급 범죄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심문을 받은 후 5년간의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고 모스크바를 떠난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5년 전에 육아원에 맡긴 딸 뿐이었지만 만나러 갈 수도 없었다. 

◈ 해방과 함께 조선 공산당의 지도자로 올라선 박헌영, 주세죽을 버리다 

박헌영은 출감하자마자 일제하 마지막 비타협 저항운동 조직인 '경성콤그룹'을 이끌며 일본에 맞선다. 

해방이 되자 이 조직이 조선공산당의 주축 세력이 되어 해방 공간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결국 미군정과 경찰에 쫒기다 평양으로 피신해 김일성 수상 다음 자리인 부수상 겸 외상인 2인자 자리로 올라선다. 

1946년 7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박헌영은 육아원에 맡겼던 딸 비비안나와 극적인 해후를 한다. 

비비안나는 소련이 자랑하는 무용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훗날 딸에게 주세죽은 물었다. 

"아빠가 날 찾지 않더냐?" 

"아무 얘기 안 하셨어요" 

1949년 8월 박헌영은 주세죽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우고 비서인 윤레나와 결혼식을 올린다. 

이 자리에는 아버지의 초청을 받은 딸 비비안나도 참석해 재혼을 축하해줬다. 

하얀 양복을 차려입고 중절모를 쓴 김일성은 환한 웃음과 함께 박헌영 부부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건넸다. 

그러나 5년이 지난 1953년 3월 하순, 박헌영은 미 제국주의 간첩이란 엉뚱한 죄목으로 체포된다. 

이 소식을 들은 주세죽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딸을 보러 모스크바의 아파트에 도착한 순간 각혈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키에프로 공연을 떠난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위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유해는 모스크바 공동묘지에 묻혔다. 



당대를 풍미했던 여성 사회주의자 트로이카.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 

이들은 일제시대 최고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과 결혼하고 인생을 조선 독립에 바쳤다. 

이들 6명 가운데 4명이 망명과 한국전쟁 와중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 한국 정부, 박헌영의 첫 부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다 

2007년 모스크바에 있는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한국대사관이 제62주년 8.15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이자 북한 초대 부수상 겸 외상을 지낸 박헌영의 첫번째 부인인 주세죽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한 것이다. 

그녀의 사후 52년만에 평생에 걸쳐 독립운동을 벌인 공적을 대한민국이 인정한 것이다. 

그 때까지 주세죽은 대표적인 빨갱이의 전처로, 소련에서는 인민의 적으로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진 인물이었다. 

이날 훈장은 고인이 된 그녀를 대신해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는 무용가인 딸 박비비안나 씨가 받았다. 

박 씨는 훈장을 건네받은 후 "평생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어머니에게 뒤늦게나마 훈장을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소련 정부도 그보다 18년 전인 1989년 3월 스탈린이 저지른 '박해사건의 희생자'로 처형된 주세죽의 두번째 남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단야와 주세죽 부부를 사면했다. 

한국 정부는 훈장 수여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주세죽 선생은 1919년 3월 함흥에서 만세사건에 참여해 체포되었고, 1924년 5월 서울에서 조선여성근우회 집행위원에 선임됐으며, 1925년 1월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해 활동했습니다. 이어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으로 활동하다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어 동년 12월 석방됐습니다. 1927년 근우회 임시집행부에서 활동하다 박헌영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하여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한 후 1932년부터 33년까지 상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정도이면 일제시대의 깨인 여성 선각자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반도와 중국대륙, 소련을 넘나들면서 일제에 맞서 싸웠던 투사 주세죽. 

무엇이 그녀의 행복을 빼앗아갔을까?















Posted by qlstnfp
2014. 9. 3. 15:16

http://m.nocutnews.co.kr/news/4032200


"일본 수뇌부 쑥밭…꽃이 휘날리듯 아름다워"

2014-05-28 11:13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35]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화림은 독립군인 오빠들의 영향을 받아 일찍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25살에 홀어머니와 작별하고 상해로 넘어온 그녀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여기서 사격과 무술을 배우고, 일본 밀정들을 유인해 살해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 부부로 가장해 식장에 들어간 윤봉길, 폭탄을 던지다 

상하이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한바탕 맞붙은 상해사변 직후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현재의 노신 공원) 입구.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곳에서 상해사변 전승 기념과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기념식을 열 예정이었다. 

이 공원에 말쑥한 스프링 코트를 입고 도시락과 물통을 든 청년이 화사한 양장을 한 여자와 함께 다정하게 들어섰다. 

식장 입구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헤어집시다" 
"반드시 성공하세요" 

남자는 김구 선생이 지휘하는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로, 약관 24살의 나이였다. 

양장을 한 여인은 김구 선생의 비서인 27살의 '항일전사' 이화림이었다. 

오전 11시 40분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 갑자기 폭음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쾅~ 쾅~" 

식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도시락과 물통에 담긴 폭탄은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일본거류민단장을 죽여버리고, 노무라 중장의 두 눈을 날려 버리고, 우에다 중장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시게미츠 주중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어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고 살았다. 


식장 밖에서 초조하게 거사를 기다리던 이화림은 단상이 박살나는 모습을 보자 탄식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정말 꽃이 휘날리듯 아름다운 모습이구나~" 

회고록에는 "마치 추풍낙엽이 지듯이 일본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묘사했다. 

◈ 이화림, 이봉창에 이어 윤봉길 의사의 순국 소식 듣고 오열하다 

윤봉길과 이화림은 전날 부부로 가장하고 홍커우 공원을 미리 답사했다. 

원래는 둘이 같이 식장에 들어가기로 했으나, 김구 선생이 이화림이 일본어에 능통하지 않기 때문에 같이 체포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들어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두 명 다 희생시킬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위 선서식에서 윤봉길 의사는 "나는 적성(赤誠)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는 맹세한 그대로 적들을 도륙하고, 기개를 잃지 않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는 짧은 유언이었다. 

상해임시정부 건물 안에 있던 이화림은 윤봉길의 순국 소식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뇌리 속에 웃으며 일본으로 떠난 이봉창 의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다리 사이에 찬 특제 '훈도시'는 이화림이 밤을 새워 만든 것이었다. 

이봉창은 그 속에 수류탄 2개를 숨긴 채 일본으로 향했다. 

윤봉길의 거사가 있기 3달 전인 1932년 1월 8일 일본의 수도 도쿄의 고지마치 구 사쿠라다몬. 

31살의 조선 청년 이봉창은 일왕 일행이 나타나자 힘차게 수류탄 2개를 잇따라 던졌다. 

그러나 거리가 먼데다 일렬로 지나가는 마차 행렬 중 일왕이 탄 마차를 식별하지 못해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표적을 놓쳐버렸다. 

일본의 심장 일왕이 테러를 당하자 일본 열도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받은 중국인들과 모든 언론매체들이 흥분했다. 

모든 신문들이 "조선인 리봉창, 일왕을 요격했으나 불행히 명중 못했음"이란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열받은 일본당국은 군경을 동원해 중국 신문사를 습격했다. 

체포된 이봉창은 일본 경찰의 심문에 일체 불응한 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 소식을 들은 이화림은 눈물을 흘리며 지인들에게 이봉창의 얼굴을 묘사했다. 

"그 청년은 적동색 얼굴빛, 짙은 눈썹 아래 정기 넘치는 두 눈, 툭 삐어져 나온 높은 관골, 우뚝한 코마루, 갸름하면서 선이 굵은 생김새는 퍼그나 패기 있고 당차보였습니다" 


◈ 투사 이화림, 김구 선생의 슬하를 떠나 무장항일투쟁에 뛰어들다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도운 이화림은 테러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조선인 혁명가들이 운집한 광저우로 근거지를 옮겼다. 

1932년 가을 그녀는 의열단의 추천을 받고 중산대학에 입학해 의학 공부에 매진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10월 10일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규모는 100~300명 정도이지만, 대원들의 지적, 군사적 소양과 항일투쟁 경력으로 볼 때 중국내 한인 무장단체로는 최정예였다. 
공부를 마친 이화림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는 계림으로 가서 입대해 부녀대 부대장으로 임명됐다. 

부녀대는 일본군 진지 앞까지 접근해서 선전공작을 벌였다. 

조선의용대는 본격적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팔로군 129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화북지방의 태항산으로 이동했다. 

이화림은 부녀대 부대장 자격으로 조선인 간부들도 양성하고, 틈만 나면 총을 들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시간이 나면 대원들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어 김치를 담궜다. 

이때 우리 민요 '도라지' 가락에 가사를 바꿔 만든 '미나리 타령'을 합창했다.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태항산 기슭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철철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거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 무정 장군의 부름을 받아 의학 공부에 매진하다 

조선의용대가 1943년 연안으로 이동한 직후에 조선의용대장 무정 장군이 이화림을 불렀다. 


"우리 혁명사업에는 전문 훈련을 받은 의사들이 필요합니다. 
항일전쟁이 끝나면 우리 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지는 의학 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 다음 우리 부대로 돌아오세요" 

이화림은 총을 내려 놓고 의과대에 입학해 공부를 하다 해방이 된 후에는 새 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몰두했다. 

노년에는 연변자치주와 대련시에서 조선인 대표로 활동하고, 수중의 재산을 틈틈히 아동문학 작가들을 위해 기부했다. 

그녀는 1999년 2월 10일 95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임종 전에 유언을 남겨 자기의 전 재산 5만원을 대련시 조선족학교에 기증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한국의 이윤옥 시인은 시 한 수를 헌정했다. 

"화려한 불빛 속 상하이의 밤 
서러운 이방인 삼삼오오 모여 이룬 숲 
서둘러 국권회복의 길 암중모색 중 

일본 사쿠라다몬으로 떠나는 
이봉창 가슴에 안겨준 폭탄 
불발로 품은 뜻 히로히토 화들짝 놀라 
그날 밤 이불에 오줌 지렸을게다 

석달 뒤 상하이 홍구공원 
물샐 틈 없는 수비 뚫고 
단번에 날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도 
여장부 이화림이 도운 거사였다네 

태항산 거친 산림 속 마다치 않고 
조선의용대 끌어안고 부르던 노래 
아리랑 피 끓는 함성 속에 
절절이 묻어나던 조국해방의 염원 

돌미나리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로 
배 채우며 쟁취한 광복 
고국은 그 이름 잊었어도 
그 이름 천추에 길이 길이 남으리~~"










Posted by qlstnfp
2014. 9. 3. 14:53

http://m.nocutnews.co.kr/news/4031248


조선女人 남자현 "총독은 내가 처단하겠다"

2014-05-27 10:39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34]'여자 안중근' 남자현, 조선독립을 위해 총을 들다


◈ 61세의 여인 '남자현', 만주국의 실세 '부토 노부유시' 처단에 나서다 

일제가 조선에 이어 만주를 침공한 후 2년 후인 1933년 2월 27일 오후 3시 45분. 

하얼빈의 도의정양가 거리에 '삐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호각소리가 들렸다. 

급박하게 뛰어가는 발소리 뒤로 일제 경찰 10여 명이 추격하고 있었다. 

골목을 돌아서자 반대편에서 5, 6명의 경찰이 나타나 총을 발사했다. 

권총을 든 남루한 행색의 인물이 쓰러졌다. 

모자를 벗기니 나이 든 여자였다. 

쌍꺼풀 없는 강인한 얼굴의 조선 여인 남자현이다. 

그녀의 품에선 비수 하나가 숨겨져 있었고, 옷 속에는 피 묻은 군복을 껴입고 있었다. 

그 옷은 오래 전 남편이 의병운동을 하다 전사할 때 입었던 것을 그대로 걸친 것이다. 

"야~ 거지할멈~ 남자현, 61세…당신 맞지?" 

그해 1월 초. 

남자현은 부하 정춘봉과 상의해 만주의 일제 최고 실세 '부토 노부유시' 전권대사를 사살하기로 했다. 

두달 후 3월 1일에 신경에서 열리는 만주국 수립 1주년 행사 때 권총과 폭탄을 이용해 노부유시 일당을 몰살하기로 했다. 

남자현이 단호히 말했다. 

"이 일은 내가 처리한다. 나 이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나이이니 두려움이 없다. 노부유시를 처단한 뒤 내 몸을 하얼빈 허공에 어육으로 날리리라" 

그러나 미리 접선한 중국인들로부터 권총과 폭탄이 든 과일상자를 받으러 갔다가 정보를 탐지한 일본 경찰에게 검거된 것이다. 

◈ "사이토 조선총독을 사살하겠다" 

남자현이 하얼빈에서 붙잡히기 7년전인 1926년 4월 만주의 길림. 

남자현은 박청산, 이청수, 김문거 등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사이토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세우면서 '교육시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라. 민족 혼과 민족 문화를 잃게 하고, 조상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가르쳐라. 그리고는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가르치면 동화의 효과가 클 것이다" 

한 마디로 조선인의 정신을 노예화한다는 시책이다. 

남자현은 이 자를 처단해 조선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리기로 하고, 박청산, 이청수와 함께 경성으로 잠입했다. 

권총과 폭탄은 동지 김문거로부터 미리 전달받았다. 

이들이 거사 시기를 엿보던 시기인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했다. 

세 사람은 사이토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관들이 조문을 하기 위해 빈소가 차려진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보고 기회를 노렸다. 

4월 27일 남자현이 창덕궁 일대를 답사하던 중 갑자기 호각소리와 함께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일본 경찰들이 혜화동 일대에 깔리고 가가호호 수색을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서둘러 인근 교회 건물로 숨어 들었다. 

어찌된 일일까? 

알고 보니 남자현 팀외에도 사이토 총독의 목숨을 노리는 인물이 있었다. 

일본인 가게에서 일하던 송학선이란 청년이 칼을 품고 창덕궁 입구에서 기다리다 
조문을 하고 나오는 일본인 3명에게 휘두른 것이다. 

그는 추격하던 조선인 순사마저 찌르고 도주하다 일본 경찰과 격투를 벌인 끝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경성이 발칵 뒤집혀 총독 경호도 강화되고, 검거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거사 실행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세 사람은 만주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뿔뿔히 흩어졌다.

조선총독 암살에 실패한 남자현은 이번에는 만주를 무대로 일본 고관을 처단하려다 결국 검거된 것이다. 

◈ 고문과 단식 투쟁…"너희 일본놈들이 주는 밥은 먹지 않는다" 

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 설치된 감옥으로 끌려갔다. 

거기에서 잔혹한 고문과 추궁에 시달리면서 봄과 여름을 보냈다. 

8월 6일부터 그녀는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밥이 들어오면 냅다 던지면서 "이제 너희들이 주는 밥은 먹지 않는다"고 외쳤다. 

이후 11일이 지나자 남자현은 사경을 헤매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일본 경찰은 서둘러 병보석으로 석방했다.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이 서둘러 달려왔다. 

임종 직전 남자현은 아들과 손주에게 감춰둔 행낭을 갖고 오라고 했다. 

거기에서 249원 80전을 꺼냈다. 

"이 돈 중에서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쳐라. 그리고 손자 시련을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내 뜻을 알게 하라. 남은 돈 49원 80전의 절반은 손자의 학자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친정에 있는 종손을 찾아 공부시켜라" 

그녀는 다음날 낮, 풀려난 후 닷새만에 순국했다. 

남자현의 유언은 다 지켜졌다. 

손자인 김시련은 하얼빈 농대를 졸업하고 교직에 몸을 담았다. 

아들 김성삼은 외가 집에서 어머니의 친정오빠의 손자이자 종손인 남재각을 찾아 만주로 데려와 사범학교에 보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1절 기념식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이승만과 김구 등 독립투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남자현의 유언대로 독립축하금 200원을 임시정부 요인 조용원에게 전달했다. 

◈ 뒤늦게 나온 순국 기사…조선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다 

일본의 보도통제가 풀리자, 순국 5일 후 국내 신문들은 일제히 '부토 모살범'이란 제목으로 그녀의 순국을 알렸다. 

1933년 8월 27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30년간 만주를 유일한 무대로 조선OO운동에 종사하던 남자현(여자)은 감옥에 구금됐다가 단식 9일 만인(기간이 이틀 줄어 있다) 지난 17일 보석 출옥했다. 연일 단식을 계속한 결과 22일 상오(하오 12시반경)에 당지 조선여관에서 영면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누구보다도 남자현의 고향인 경북 영양군민들의 아픔과 충격이 컸다. 

그녀가 1895년 1차 의병투쟁에서 남편을 잃고 혼자서 유복자와 시어머니를 모시던 일이며, 이로 인해 효부상을 받았던 일이며, 아들이 24살로 장성하고 3.1운동이 발생하자 모든 것을 떨치고 나라를 찾는다고 만주로 떠난 일을 풍문으로 다 들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인 1946년 8월 22일에 남자현 의사를 기리는 추념회가 열렸다. 

이어 1962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윤보선 대통령은 남자현에게 독립유공자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했다. 

모두 58명이 복장을 받았으며, 여자로는 남자현이 유일했다. 

고향의 생가에는 추모각과 추모비가 세워졌다. 

남자현 의사의 일생을 추적해 <나는 조선의 총구다> (세창미디어)란 제목의 저서를 펴낸 이상국 시인은 "왜 이토록 역사는 남자현을 지워버렸는가"라는 글을 통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녀의 삶이 던져주는 강렬한 메시지는 마흔이 된 나이에 문득 '아녀자'의 질곡을 벗어버리고, 죽음을 불사한 투쟁에 뛰어든 것에 있다. 저 흑백사진 속의 남자현이 그토록 뚫어지게 우리를 바라보는 이유는, 시대를 관통하는 진실을 전하려는 그녀의 의욕이 아닐까?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과 리더들이 변절하고 말을 바꿨던가… 
그녀는 식민지의 여성으로서 가장 자기초월적인 생을 걸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C%9E%90%ED%98%84















Posted by qlstnfp
2014. 9. 3. 14:31

http://m.nocutnews.co.kr/news/4024373


"모두 구출하라"… 빅토리호

2014-05-15 10:47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28]지옥 같은 흥남부두에서 내린 지시 "다 태워라"


어떻게 해서 흥남부두에서 대규모의 철수작전이 벌어진 건가? 

◈ 청천강 전선에 이어 함경도에서도 유엔군 후퇴하다 

1950년 12월 초. 

청천강 전선에서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유엔군이 38선으로 후퇴했다. 

이어 원산마저 점령당하자 함경도에 흩어져 있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고립됐다. 

결국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는 전면 철수를 지시했다. 

이를 위해 흥남 앞바다에 항공모함 7척과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함 3척이 배치됐다. 

이들이 퍼부어대는 엄청난 화망이 쫓아오는 중공군의 접근을 막았다. 

이때 발사한 포탄이 인천상륙작전 때보다 70% 더 많았다. 

흥남에서 철수하는 유엔군 병력은 총 10만 5,000명에 달했고, 차량은 1만 8,422대, 각종 전투물자가 3만 5,000톤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12월 12일 미 해병1사단을 시작으로 철수작전이 시작됐다. 

작전에 가장 큰 어려움은 접근하는 중공군이 아니었다. 

바로 피난민 문제였다. 

평양철수 때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2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몰려와 배에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처음에는 3천 명 정도 철수시킨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큰 반발에 부딪혔다. 

10군단의 민사부 고문으로 있던 현봉학 박사가 피난민을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미군 수뇌부를 설득했다. 

이어 국군 수뇌부도 "우리도 배를 타지 않고 피난민을 엄호하면서 걸어서 후퇴하겠다"고 버텼다. 

결국 알몬드 장군이 방침을 바꿨다. 

"우리는 피난민들을 놔두고 갈 수 없다. 
모두 구출하라" 

피난민들의 전면 철수가 결정되자, 남한과 일본에서 수송선과 상륙정이 징발되어 흥남 앞바다로 모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징발된 것이 아니고, 화물을 싣고 왔다가 자진해서 합류한 것이다. 




◈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피난민 구조에 나서다 

"우리 앞에 홀연히 배 하나가 나타났다. 
그냥 배가 아니라 내게는 갑판의 끝이 하늘에 닿아 있는 듯 했던 너무도 커다란 배였다.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보았다. 
그때 하늘로 솟은 그 배의 높은 난간에서 홀연히 풀어져 내려오던 사다리를… 
사람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성서에 나오는 야곱이 보았다는, 하늘로 오르는 통로. 
천사들이 오르내리던 사다리가 그것보다 황홀했을까?" 
(공지영 장편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 

1950년 12월 19일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항으로 들어왔다. 

건조한 지 5년이 된 7,800t급 미국 국적의 화물선이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해병대 항공단에 공급할 제트연료 10만톤을 싣고 흥남에 내려놓을 계획이었다. 

레너드 나루 선장은 쌍안경으로 부두를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 피난민들이 부두에 떼를 지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것,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갖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처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그들을 죽이려는 적군이 있었고,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라루 선장은 지금은 제트연료를 하역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선원 10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람을 태우십시요. 
타고자 하는 사람 모두를요. 
전부 다 태우세요" 


◈ 정원 12명의 화물선에 피난민 14,000명이 승선하다 

라루 선장은 키를 잡고, 선원 10명은 사다리와 그물망을 배 측면으로 내렸다. 

차고 강한 바람이 불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로버트 러니 상급선원의 회고다. 

"그들은 마치 지옥의 구덩이에서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를 발견한 사람들 같았다. 
피난민들은 사다리를 타고 배로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따리를 이고 아이를 업고 있었다. 
갑판에 올라오면 차례 차례 지하 5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면 뚜껑을 닫았다. 
이어 지하 4층으로, 이어 3층으로… 
거기에는 화장실도 없고, 불빛도, 먹을 것도, 물도 없었다" 

승선은 밤새도록 진행되어 다음 날 동이 트고 정오가 될 때까지 계속됐다. 

군함은 계속 포를 쏘아대고 함재기는 연신 날라와 흥남 외곽 저지선 건너편을 폭격했다. 

이렇게 해서 14,000명의 피난민이 배에 올랐다. 

배는 남쪽으로 사흘간 항해했다. 

피난민들은 어둠 속에서 물 한 잔 못 마시고 버텼다. 

그 와중에 아기 5명이 차례차례 태어났다. 

산모들을 위해 선원실 세 개를 비우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 피난민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고, 머릿수는 5명이 늘었다. 

배가 도착하자 거제도 주민들이 일제히 몰려와 준비한 물과 주먹밥을 나눠 주었다. 

피난민들이 어느 집에 들어가도 주민들은 친척이 온 것처럼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했다. 

전쟁이 끝나고 수도원 수사가 된 라루 선장은 이렇게 신앙고백을 했다. 

"저는 때때로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 작은 배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태우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많은 위험을 극복했는지를… 
그해 크리스마스에 한국의 검은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메시지가 저에게 전해옵니다" 

이렇게 해서 약 9만 8,000명의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 수도원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 

14,000명의 생명을 구한 라루 선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고통받고 있는 한국인을 위해 기도하겠다며 '마리너스'라는 이름으로 베네딕토회 수사가 되었다. 

그는 평생을 미국 뉴저지의 뉴턴 수도원 성물가게에서 일하다 2001년 서거했다. 

재미있는 건 그가 있었던 뉴턴 수도원이 수사 지원자가 끊어져 영락의 길을 걷자 한국의 왜관 수도원이 지원에 나선 것이다. 

지금은 왜관수도원의 수사들이 이 곳에 파견되어 수도활동을 하고 있다. 

젊은 선장은 한국인들을 구했고, 젊은 한국인들은 문을 닫을 뻔 했던 선장의 수도원을 살려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