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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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전 북한 부수상의 첫부인 주세죽 



일명 까레에바·한 베라. 함경남도 함흥 출신이다.
함흥 영생여학교 고등과에서 2년 동안 수학했다. 1919년 함흥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개월 동안 유치장에 감금되었으며, 공소가 끝나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뒤 함흥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했고, 1921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1921년 4월 상해(上海)로 가서 안정씨여학교(晏鼎氏女學校)에 입학해 영어와 피아노를 배운 뒤 1922년 5월 귀국했다. 이해에 박헌영과 결혼했다. 1924년 5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1월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해 개회선언을 하고 강령과 규약을 기초했으며 집행위원이 되었다. 2월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4월 고려공산청년회 결성대회에서 중앙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1월 ‘제1차 조공검거사건(신의주 사건)’으로 체포되어 신의주 경찰서에서 취조 받고 12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7년 5월 근우회 창립대회에 참가해 임시집행부 성원이 되었다. 1928년 8월에 남편 박헌영과 함께 일제경찰의 추적을 피해 소련으로 탈출했다. 박헌영과 함께 정치망명가들을 위한 집에서 살았으며, 1929년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반에 입학해 1931년까지 공부했다.
당재건운동을 위해 1932년 1월 상해로 갔다. 1933년 7월 박헌영이 체포된 뒤 일정 기간 상해에 머물다가 1934년에 김단야와 함께 소련으로 되돌아갔다. 1934년 김단야와 재혼했다. 그 해에 5개월 가량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했고, 그 뒤 외국인노동자출판부에서 교정원이 되었다.
1937년 11월 재혼한 남편 김단야가 ‘일제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 1938년 ‘사회적으로 위험한 분자’라는 혐의로 모스크바에서 알마아따로 유배되었다. 1938년 9월부터 1940년 9월까지 피혁공장의 개찰원으로 근무했다. 1940년 9월부터 1946년 3월까지 까르마끄치구역 협동조합에서 근무했다.
1946년 7월부터 끄질오르다주 공업기업소에 있는 봉제작업장에서 직공으로 근무했다. 1946년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시켜 주거나 17세 된 딸과 함께 있도록 모스크바로 가게 해줄 것을 소련당국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0년대 중엽 사망했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36]비운의 여성혁명가 주세죽, 소련과 한국서 명예회복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하다 우리 역사 속에서 잊혀진 존재가 됐을까? 



남한에서는 이념적인 금제 탓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줄곧 국가 이념(이데올로기)으로 작동해온 반공 이념 때문이었다. 주세죽은 사회주의자였다. 3·1운동 참가자였고, 그 직후에 물밀듯이 몰려온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삶이 공론장에 떠오른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일이다. 민주주의적 권리와 언론 자유가 확장된 조건 속에서 역사에 복귀할 수 있었다. 비로소 활자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게 됐다.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1996년)에 ‘주세죽’ 항목이 수록됐고, 2004년에는 그의 굴곡진 삶의 편린이 기록된 <이정 박헌영 일대기>가 출간됐다. 2007년에는 정점을 찍었다. 한국 정부가 고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 박헌영·김단야·임원근 출옥하다 

1924년 1월 29일 아침 8시 평양형무소. 

정문이 조용히 열리자 20대 중반의 젊은이 3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조선공산당의 결성과 항일투쟁을 주도해나갈 박헌영·김단야·임원근의 '삼인당'이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상하이에서 활동하다 경성에 잠입하던 중 체포돼 1년 10개월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것이다. 

이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 중 밝은 얼굴로 하얀색 한복을 들고 앞으로 나온 미모의 여성 2명이 있었다. 

한 명은 이미 상해에서 박헌영과 혼례를 치른 주세죽이고, 다른 한명은 임원근의 연인 허정숙이었다. 

멀지 않아 김단야에게도 고명자라는 여성이 나타난다. 

이 세 여인이 여성 사회주의자 트로이카이다. 

이들 3쌍의 부부는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 창립을 주도하고, 조선여성근우회에서 선두에서 활동을 벌였다. 

이런 전성기는 2년여만에 끝나고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탄압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들 엇갈린 행로를 걷게 된다. 

◈ 박헌영·주세죽 부부, 블라디보스톡으로 탈출하다 

일본 경찰은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창립된 사실을 파악하고 핵심 인물 검거에 나섰다. 

제일 먼저 박헌영·주세죽 부부가 집에서 체포됐고, 다음날 임원근·허정숙 부부가 연행됐다. 

김단야는 재빨리 상하이로 피신했다. 

그의 아내 고명자는 사건이 터지기 직전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검거를 면했다. 

혹독한 고문 끝에 삼인당 3명은 기소되고, 주세죽과 허정숙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박헌영은 재판 도중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수감 2년여만인 1927년 11월 22일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그러나 박헌영 부부는 주세죽의 고향인 함흥에서 머물다 비밀리에 두만강을 넘어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거기서 이들 부부의 유일한 혈육인 비비안나를 낳는다 

아기를 안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헌영 부부는 먼저 도착한 김단야·고명자 부부와 합류한다. 

박헌영은 김단야의 추천을 받아 국제레닌대학에 입학하고, 주세죽은 고명자가 다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가 공부에 전념한다. 
레닌학교에서 박헌영은 호치민과 깊은 친교를 나눈다. 

◈ 박헌영의 체포와 영원한 이별…그리고 '배신' 

공부를 마친 박헌영 부부는 아기를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기고 상하이로 떠났다. 

이들 부부는 프랑스 조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 김단야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1933년 7월 5일 상하이 공동조계 북경로에서 박헌영이 일경에 의해 체포됐다. 

조선으로 압송된 그는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기나긴 수감생활에 들어갔다. 

상하이에 남은 주세죽과 김단야는 다시 모스크바로 피신한다. 

거기서 두 사람은 박헌영과 고명자를 버리고 결혼을 한다. 

3년 후인 1937년 11월 5일 김단야는 일제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당시 소련을 휩쓸던 스탈린의 '대숙청'에 걸려든 것이다. 

김단야는 제대로 변호도 못하고 제1급 범죄자로 선고받은 후 처형당한다. 

주세죽의 인생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제1급 범죄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심문을 받은 후 5년간의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고 모스크바를 떠난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5년 전에 육아원에 맡긴 딸 뿐이었지만 만나러 갈 수도 없었다. 

◈ 해방과 함께 조선 공산당의 지도자로 올라선 박헌영, 주세죽을 버리다 

박헌영은 출감하자마자 일제하 마지막 비타협 저항운동 조직인 '경성콤그룹'을 이끌며 일본에 맞선다. 

해방이 되자 이 조직이 조선공산당의 주축 세력이 되어 해방 공간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결국 미군정과 경찰에 쫒기다 평양으로 피신해 김일성 수상 다음 자리인 부수상 겸 외상인 2인자 자리로 올라선다. 

1946년 7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박헌영은 육아원에 맡겼던 딸 비비안나와 극적인 해후를 한다. 

비비안나는 소련이 자랑하는 무용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훗날 딸에게 주세죽은 물었다. 

"아빠가 날 찾지 않더냐?" 

"아무 얘기 안 하셨어요" 

1949년 8월 박헌영은 주세죽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우고 비서인 윤레나와 결혼식을 올린다. 

이 자리에는 아버지의 초청을 받은 딸 비비안나도 참석해 재혼을 축하해줬다. 

하얀 양복을 차려입고 중절모를 쓴 김일성은 환한 웃음과 함께 박헌영 부부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건넸다. 

그러나 5년이 지난 1953년 3월 하순, 박헌영은 미 제국주의 간첩이란 엉뚱한 죄목으로 체포된다. 

이 소식을 들은 주세죽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딸을 보러 모스크바의 아파트에 도착한 순간 각혈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키에프로 공연을 떠난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위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유해는 모스크바 공동묘지에 묻혔다. 



당대를 풍미했던 여성 사회주의자 트로이카.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 

이들은 일제시대 최고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과 결혼하고 인생을 조선 독립에 바쳤다. 

이들 6명 가운데 4명이 망명과 한국전쟁 와중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 한국 정부, 박헌영의 첫 부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다 

2007년 모스크바에 있는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한국대사관이 제62주년 8.15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이자 북한 초대 부수상 겸 외상을 지낸 박헌영의 첫번째 부인인 주세죽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한 것이다. 

그녀의 사후 52년만에 평생에 걸쳐 독립운동을 벌인 공적을 대한민국이 인정한 것이다. 

그 때까지 주세죽은 대표적인 빨갱이의 전처로, 소련에서는 인민의 적으로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진 인물이었다. 

이날 훈장은 고인이 된 그녀를 대신해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는 무용가인 딸 박비비안나 씨가 받았다. 

박 씨는 훈장을 건네받은 후 "평생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어머니에게 뒤늦게나마 훈장을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소련 정부도 그보다 18년 전인 1989년 3월 스탈린이 저지른 '박해사건의 희생자'로 처형된 주세죽의 두번째 남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단야와 주세죽 부부를 사면했다. 

한국 정부는 훈장 수여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주세죽 선생은 1919년 3월 함흥에서 만세사건에 참여해 체포되었고, 1924년 5월 서울에서 조선여성근우회 집행위원에 선임됐으며, 1925년 1월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해 활동했습니다. 이어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으로 활동하다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어 동년 12월 석방됐습니다. 1927년 근우회 임시집행부에서 활동하다 박헌영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하여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한 후 1932년부터 33년까지 상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정도이면 일제시대의 깨인 여성 선각자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반도와 중국대륙, 소련을 넘나들면서 일제에 맞서 싸웠던 투사 주세죽. 

무엇이 그녀의 행복을 빼앗아갔을까?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