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6.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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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37]학생운동, 파업, 고문과 투옥으로 일관한 투사들


◈ 울산이 낳은 수재 이관술, 동덕여고 교사로 부임하다 

1929년 3월 동양 최고의 명문이라는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28살의 이관술은 경성 관훈동에 있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지리역사 교사로 부임한다. 

지금의 안국동 교차로 남쪽, 인사동 입구에 있던 동덕학원은 조동식 선생이 설립해 1911년부터 천도교 재단이 재정을 지원해온 사립 여학교였다. 

ㄷ자로 지어진 아담한 이층 목조 건물에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함께 배웠다. 

한 학년이 한 학급으로만 이뤄져 학생 수도 적고 재정도 빈약했다. 

여고를 맡은 8명의 교사 중 일본인은 일어 선생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조선인이었다. 

이관술 선생은 재봉과 도화를 가르치던 여선생 박성환, 조선어를 담당하던 이윤재(나중에 신명균으로 바뀐다) 선생과 특히 친했다. 

이윤재와 신명균 모두 한글학회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차례로 사망한다. 

이관술은 신명균을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로 높이 평가했다. 

◈ 광주학생운동, 경성 학원가를 뒤흔들다 

 1929년 10월 30일. 

전남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 통학을 하던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한국인 학생들이 이들과 집단 싸움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광주 전남 일대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전국의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는 등 술렁이기 시작했다. 

동덕여고도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학교 측은 겁을 먹고 휴교를 선언했다. 

긴 방학이 끝나자 1930년 1월 15일 개학에 맞춰 이화여고와 근화, 배화, 실천, 정신, 보육, 태화, 동덕 등 경성시내 여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쳐 나와 만세와 구호를 외쳤다. 

각 학교 교문 모두 긴급 출동한 기마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은 159개 학교 54,000명으로 집계됐다. 

구속자만 1,642명에 달했다. 

이번 시위사건을 계기로 조국의 독립을 꿈꾸던 지식인들은 대부분 항일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당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지식인 사이에서는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 민중을 조직하고 이들을 바탕으로 한 혁명당을 재건하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동덕여고에서는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퇴학당한 박진홍이 먼저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박진홍은 용산제면, 대창직물 등의 공장에 다니며 노동자들을 조직하다가 5개월만에 구속된다. 

이관술의 이복 여동생 이순금도 동덕여고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으로 향했다. 

졸업 후 학원 선생을 하던 이효정은 동대문 밖 종연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비밀 지도를 맡았다. 

이후 이들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변절하지 않고 파업 주도와 체포, 고문, 옥살이를 거듭하면서 일제를 겨냥한 독립운동을 가열차게 벌인다. 

박진홍은 해방 직후 <독립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동덕 때부터 난 문학소녀였고, 사회생활은 그리 오래 하지 못했어요. 10년의 감옥생활을 빼면 이제 겨우 23살입니다" 

공장에 다니던 그녀는 '경성학생알에스(RS)사건으로 2년간 수감생활을 한 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얽히어 구속되는 등 네번에 걸쳐 10년간 징역을 살았다. 

◈ 이관술, 이재유와 손 잡고 조선공산당 재건에 나서다 

광주학생운동을 보고 충격을 받은 교사 이관술은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에 나서기로 했다. 

제자들을 대상으로 두 개의 독서회를 운영하다 1933년 반제동맹 사건으로 구속된다. 

출감 후 이관술과 제자 3명은 모두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인 이재유와 손을 잡고 '경성 트로이카'에 이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을 이끌게 된다. 

이 조직은 소화제사, 경성고무, 조선견직, 종연방직 등 6곳의 공장의 파업을 일으키고, 동맹휴학과 친일교사 배척 등의 운동을 배후조종한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연이은 탄압으로 조직은 거듭 붕괴되고 만다. 

두번이나 경찰서를 탈출했던 이재유가 1937년 성탄절 날 체포됐다.

일본경찰은 이로써 조선반도에서 공산주의 조직이 다 붕괴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관술의 존재를 가볍게 봤다. 

이재유와 함께 살다 간신히 피신한 이관술은 제자 박진홍과 여동생 이순금을 만나 조직 재건에 나섰다. 

이들은 김삼룡, 정태식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모임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최후의 지하활동을 벌인다. 

경성콤그룹은 파벌에 구애받지 않고 전향을 거부한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됐으며, 검거 이후에도 의지를 꺾지 않고 해방을 기다린다. 

감옥에 있는 이재유 대신 새 지도자로 박헌영을 영입했다. 

1941년 다시 검거 선풍이 일어 경성콤그룹은 백여 명이 연행되어 구속된다. 

체포를 면한 지도부는 대부분 활동을 멈추고 일제 패망에 대비한다. 

박헌영은 광주의 벽돌공장에 은신하고, 이관술은 넝마주이로 변장해 전국을 유랑한다. 

◈ 해방과 좌우대립 그리고 허망한 최후 

2006년 광복절에 한국 정부는 젊은 날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던 이효정 할머니에게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며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이효정 할머니를 제외한 동덕의 선생님들과 벗들은 모두 남과 북으로 흩어져 소식이 끊어졌다. 

해방 후 남로당 재정부장으로 일하던 이관술은 '조선정판사 사건'에 휘말려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5일 대전의 산내면에서 자행된 집단처형 때 가장 먼저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진홍은 해방 후 저명한 국문학자인 김태준이 남로당 간부라는 이유로 처형당하자 월북했다. 

거기서 그녀는 평양의 최고재판소 판사로 일하다 전쟁 와중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일하게 이관술의 여동생인 이순금만 북한 고위직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박헌영 등 경성콤그룹의 주요 멤버들은 남에서는 '빨갱이'란 이유로, 북에서는 미제 간첩이란 어처구니 없는 죄목으로 거의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숙청됐다. 

이렇게 해서 일제하 최후의 국내 반일 조직인 경성콤그룹은 남과 북에서 완전히 말살되고 만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