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2. 11:45

2014-03-31 09:53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남과 북 모두 '독립유공자'로 표창한 혁명가

"이재유가 또 탈출했다~"…일본경찰 '혼비백산'

http://m.nocutnews.co.kr/news/1214396


http://m.nocutnews.co.kr/news/4040302

◈ 경성제국대학의 양심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 조선독립을 도와주다 




1934년 5월 21일 서대문경찰서. 

이 곳에 끌려온 경성제대 법문학부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는 공산주의 조직과의 관련과 이재유의 행방을 대라는 일경의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재유는 당시 조선 최대의 공산주의 지하조직인 '경성트로이카'의 지도자로,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됐다가 탈출에 성공해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를 잡기 위해 500원의 현상금이 걸리고, 경성 시내 5개 경찰서가 비상근무 중이었다. 

고초를 겪던 미야케 교수는 "하루만 시간을 주면 다 자백하겠다"고 토로했다. 

일경은 일단 조사를 중단했다. 


한편, 미야케 교수의 동숭동 관사의 다다미방 아래에 토굴을 파서 숨어있던 이재유는 미야케가 경찰에 연행되고 가택수색을 하는 소리를 들으며 숨어 있었다. 

일본 경찰이 철수하자 조용히 토굴에서 나와 짐을 챙긴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하루가 지난 후 미야케 교수는 경찰에게 자백했다. 

24시간이면 이재유가 충분히 잠적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 집에 이재유가 숨어 있습니다" 

놀란 경찰이 관사를 덥쳤지만 이재유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재유를 놓친 경찰은 미야케를 두둘겨 패며 분노를 쏟아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상태였다. 

이 사건은 일제의 보도통제로 기사화하지 못하다가 1년 후인 1935년 8월 24일에야 조선은 물론 일본의 각 신문에 보도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조선인들은 경찰서를 탈출한 이재유가 숨어있던 곳이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의 집이었다는 사실에 '독립운동 사상 초유의 일'이라며 흥분했다. 

더 충격을 받은 건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의 수뇌부였다. 


"대일본제국의 최고 엘리트가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다니..." 

미야케 교수는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다녀온 후 경성제대 경제학부 교수로 부임한 일본 최고의 마르크스 경제학의 권위자였다. 

그가 수감되고 교수직에서 쫒겨나자 관사를 나온 아내는 헌책방을 차린후 출소 때까지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미야케 교수는 일제가 망할 때까지 강단에 서지 못하다가 8.15 해방 후 다시 일본의 대학에 들어갔다. 

미야케 교수가 투옥되고 바로 일본에 돌아간 후에도 그가 키운 제자들은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였다. 

조선 최고의 국문학자 김태준을 비롯해 이강국, 정태식, 최용달, 박문규 등 기라성같은 제자들은 변절하지 않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여나갔다. 

식민지 지배 36년간 한민족의 정신을 좀먹은 수많은 일본인 황국사관 학자들도 있었지만, 음으로 양으로 조선 독립을 도와준 일본인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 경찰서를 빠져나와 감쪽같이 사라진 거물급 공산주의자 '이재유' 

일제가 만주를 석권한 1934년 4월 13일 밤. 조용하던 서대문경찰서에 한가닥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이어 "이재유가 달아났다"는 고함소리와 함께 당직경찰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경성과 경기도 경찰부 모든 병력이 총동원되어 시내를 뒤졌지만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일본 경찰이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이재유가 한달 전 탈출했다가 다시 붙잡혀 2명의 감시인을 붙이고 양손에 자동수갑까지 채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재유는 경찰서 고등계 형사실에서 고문과 구타를 받으며 조사를 받다 양심적인 일본인 모리다 순사의 묵인 아래 1차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정동 골목길로 달리다 경찰이 보이자 어떤 집의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그러나 하필 그 곳은 미국 영사관이었다


미국 영사는 이 초라한 행색의 조선인을 도둑으로 단정하고 일본경찰에 넘겨줘 1차 탈출에 실패했다. 

그러면 이번에 이재유는 어떻게 탈출했나? 

그는 배달되는 우유의 양철 병뚜껑과 짓이긴 밥알을 이용해 수갑 내부의 형을 떠서 열쇠를 만들었다. 

이어 개인 사물함에서 외투와 마스크, 지폐를 꺼내놓고 탈출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 같은 방에 있던 피의자가 설사 때문에 당직경찰과 함께 화장실에 간 사이 유유히 경찰서를 빠져 나갔다. 

택시를 타고 이재유가 찾아간 곳은 동숭동 경성제대 교수 관사였다. 

평소 친분이 있는 일본인 사회주의자 미야케 교수가 반갑게 맞았다. 

이 곳에서 다다미 밑의 나무마루 아래 흙을 파서 토굴을 만들었다. 

이재유는 38일 후 미야케 교수가 다른 사건으로 체포될 때까지 이 토굴에 은신했다. 


경찰이 미야케 교수 집을 샅샅히 뒤지고 떠나자 이재유는 토굴에서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농사를 지으며 조직을 재건하다 다시 체포 

탈출하기 2년 전에 1차 수형생활을 마친 이재유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상황은 이미 민족주의 진영이 친일로 돌아서고 조선공산당 마저 궤멸되자 사실상 일본에 대한 저항은 끊긴 상태였다. 

이재유는 붕괴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로 하고,비타협적 운동가들과 함께 경성시내 노동자와 부두 노동자, 학생운동, 농민조합을 연결해 연쇄파업,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일련의 파업을 주시하던 일본 경찰은 배후에 조직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대규모 검거와 고문수사 끝에 이재유를 검거한 것이다. 


이재유는 갓 출옥한 동지 이관술(전 동덕여고 교사)을 만나 서울서 멀지 않은 경기도 양주군 공덕리(지금의 노원구 창동)의 농촌마을에 정착했다. 

두 사람은 여기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전국 조직에 뿌릴 팜플렛을 만들었다. 

이재유는 수시로 서울로 나가 조직 재건에 몰두했다. 

이재유의 뒤를 쫒던 일본 경찰은 드디어 성탄절인 1936년 12월 25일 창동역 부근 야산에 이재유가 나타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오전 11시, 온갖 복장을 한 형사 60명이 코밑에 수염을 기른 농부 차림의 사내를 덮쳤다. 

이재유는 끌려가면서도 미친 사람처럼 소리지르며 저항했다. 

"놔라~ 이 더러운 쪽발이놈들아! 일본이 영원할 줄 아냐?" 

그가 소리지른 것은 자기를 기다리는 이관술에게 빨리 도망가라는 신호였다. 

이렇게 해서 이재유는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한 지 2년 8개월만에 붙잡히고, 6년 후 1944년 10월 26일 해방을 보지 못하고 청주보호교도소에서 병사하였다. 

일본이 패망한 뒤 북한 정권은 이재유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남한 정부도 독립운동을 통해 건국에 기여한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재유 계열의 일제하 마지막 저항운동…'경성꼼그룹' 

이재유가 체포되자 잠적한 이관술은 다시 이재유의 조직 재건에 나섰다. 

그는 전국을 돌며 이재유와 연결된 인물들 100여명을 엮어 전국 조직을 만들었다. 

지도자로는 감옥에 있는 이재유 대신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상징인 박헌영을 영입했다. 

이 조직이 36년간의 일제치하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한 '경성꼼그룹'이다. 

그러나 1941년 몇 차례에 걸친 검거 선풍으로 조직원 대부분이 체포되면서 와해된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제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씨의 회고담이다. 

"감옥에 자꾸만 박헌영파만 잡혀와. 공산당 재건운동 한다고 잡혀오는거야.우리 파는 이권운동이다 양조장이다, 정미소나 하면서 왜놈들한테 얻어먹고 다니는데…. 그걸 보고 일본놈들이 패망하면 아무래도 박헌영을 내세워야지 그런 생각을 했지." 

해방이 되자 이재유 계열이 조선공산당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미소 주둔,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과 북에서 버림받는다. 

하지만 여자들은 살아남았다. 

이재유로부터 지도를 받은 이관술의 동덕여고 제자 이효정 할머니는 이렇게 과거를 되돌아봤다. 

"일제시대에는 사회주의가 진리였습니다. 사회주의도 많은 일을 했어요. 적어도 독립운동에서는 그랬어요. 나는 젊음을 사회주의 운동에 바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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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 11:34

불바다로 변한 북한…"더 이상 폭격할 곳이 없다"

2014-03-28 09:47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1213200
◈ "어설픈 폭격의 시작…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했다" 

#장면1 

1950년 6월 27일 저녁. 

도쿄에 있는 맥아더 장군은 제5공군사령관 파트리지에게 퉁명스럽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폭격기를 한반도로 출동시켜 앞으로 36시간 동안 모든 폭탄을 북한군에게 쏟아부어라" 

"지형도 모르고 한국군과의 교신이 안돼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38선과 전선 사이에서 움직이는 건 다 폭격해. 미군이 왔다는 걸 알면 북한군은 제 자리로 돌아갈거야" 

#장면2 

1950년 7월 7일 김일성 내각수상 사무실. 

연신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김일성 수상이 슈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언성을 높였다. 

"사방에서 전화로 미 공군의 폭격과 대규모 파괴에 대해 보고한다. 왜 소련은 공군을 안 보내는 건가? 정말 힘들다~" 

당시 전황은 북한군이 오산에서 미 육군 선발대를 궤멸시키면서 쾌속의 속도로 대전으로 남하하는 중이었다. 

급하게 출동한 미군 폭격기들은 여의도 비행장이나 서울역,한강 교량 등 요충지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한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임진강 방어선에서 철수하다 문산에서 B-26 경폭기가 우리 부대를 폭격해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고 회고했다. 

◈ "점차 강도가 높아지는 미 공군의 폭격" 
한국전쟁 발발 이후 휴전이 성립된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동안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차례차례 폭격의 강도를 높였다. 

처음에는 남하하는 북한군이나 산업시설, 군수창고, 유류저장소, 도로·철도·항만 등 북한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곳을 주로 파괴했다. 

그러나 구름 위 높은 곳에서 B-29 중폭격기가 쏟아부운 폭탄이 정확히 맞을 리 없었다. 

1950년 7월 13일 B-29 중폭격기 56대가 참가한 원산폭격에서는 주민들이 사는 주택가에 폭탄이 떨어져 1,249명이 희생되었다. 

이중 195명이 여성, 125명이 어린이, 122명이 노인이었다. 

그러나 북진하던 유엔군이 대거 참전한 중국군에게 참패하자 양상이 달라졌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11월 5일 중대한 명령을 내렸다. 

"수력발전소를 제외하고 북한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군사목표로 삼아 초토화시켜라" 

이때 등장한 폭탄이 독일과 일본을 불바다로 만든 소이탄과 네이팜탄이다. 

가솔린이 섞인 이 폭탄들은 터지면 직경 약 45미터의 둥근 지역을 모조리 태웠다. 

이때부터 유엔군 북쪽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모든 지역이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독일과 일본의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대상으로 했던 2차대전과 달리, 북한에서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까지 모두 불살라버렸다. 

폭격의 패턴은 먼저 중폭격기가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면, 이어 전폭기가 나타나 화재 진화를 못하도록 기총소사를 하고 시한폭탄을 뿌렸다. 

세번째 단계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1951년 여름부터였다. 

전선이 교착되자 미 공군은 전선으로 보내는 보급을 끊기 위해 북한전역을 연결하는 철도망을 파괴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포로송환 문제로 휴전협상이 중단되자 적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모든 민간인들에게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다.

동시에 폭격대상에서 제외시켰던 수력발전소와 논농사에 필수적인 저수지를 대거 파괴하기 시작했다. 

수풍발전소를 시작으로 부전, 장진, 허천발전소 등이 무너졌다. 

곡창지대인 해주의 경우 저수지 20곳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둑이 파괴돼 마을이 물에 잠기고 벼농사가 중단되었다. 

포로수용소를 나온 미 24사단장 딘 장군은 "희천 시가지를 보고 놀랐다. 도로와 2층 건물로 이뤄진 도시가 사라졌다. 건물은 공터 아니면 돌무더기만 남았다.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가 텅 빈 껍데기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 "폐허만 남은 도시…북한 주민 가슴에는 '미국에 대한 증오'만 남았다" 

1.4후퇴 때 개성에서 피난 내려온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고향을 두고 내려왔습니까?" 

"공산당도 싫었지만 그 무시무시한 폭격이랑 원자폭탄이 더 무서웠지" 

유엔군의 후퇴와 함께 남한주민의 1차 피난에 이은 북한주민의 2차 피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폐허 속에 남겨진 주민들은 배고픔과 함께 가슴 속에 깊은 원한이 자리잡았다. 

한반도에서 가장 친미적이고 기독교가 번성했던 평양 일대 서북지역은 '반미'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지금도 북한에서 가장 심한 욕이 '미제 승냥이놈'이다. 

탈북자들은 모두 어린 시절 유치원과 인민학교에서 '미국놈 때리기' 놀이를 했다고 진술했다. 

북한폭격에 대해 기념비적인 저서 '폭격'(창비 간)을 펴낸 김태우 서울대 평화연구소 HK연구교수는 "어린 시절 강원도 출신인 할머니에게 전쟁 때 제일 무서운 경험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폭격이었지.굴뚝에서 연기가 날 때마다 폭격하는 것 같더라. 그 이후로 제대로 밥을 해먹을 수 없었어'라고 회고하셨다"고 밝혔다. 

6자회담도 그렇고, 미북 양자회담도 그렇고, '통일대박'도 좋지만, 북한 주민 가슴 속에 응어리진 공포와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현실로 인정하면서 대북관계를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남쪽은 남쪽대로 처참한 전쟁을 일으킨 북한 수뇌부에 대한 증오와 모든 것을 두고 고향을 두고 혈혈단신 내려온 한을 안고 살고 있다.

이 간극을 어떻게 좁히는가가 통일로 가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Posted by qlstnfp
2014. 9. 2. 11:25

http://m.nocutnews.co.kr/news/1210583 


◈ 조선의 문화재를 지킨 주일공사와 미 육군 중위 

인천상륙작전을 앞둔 1950년 9월 초. 

김용주 주일공사는 인민군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미 공군이 서울을 대대적으로 폭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면 조선을 상징하는 그 소중한 경복궁과 창덕궁, 덕수궁, 종묘와 사직단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건가?" 

도쿄에 있는 맥아더사령부를 찾아간 김 공사는 맥아더 장군와 참모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먼저 김 공사가 입을 열었다. 

"장군님,이번 작전에서 서울에 대한 폭격을 피할 수 없습니까?" 

"그건 공사의 인식부족입니다. 원래 도시란 파괴된 뒤에 새로운 도시로 재건하는 겁니다" 

"서울에는 다른 특수사정이 있습니다. 오랜 전통문화를 가진 서울의 찬란한 문화재와 고적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김 공사는 지도를 펼치고 덕수궁과 창덕궁, 숭례문을 표시해가며 4대문 안 도심을 보호해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9월 9일부터 13일까지 서울을 폭격할 때 을지로를 경계로 그 북쪽은 폭격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서울수복작전이 진행되던 시기에 미 육군의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인민군이 주둔해 있는 덕수궁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해밀턴 중위는 그 명령을 어기고 인민군이 모두 빠져나와 을지로를 지날 때 공격을 개시해 덕수궁을 점령한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한 나라의 궁궐을 함부로 훼손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드레스덴이란 도시는 사라지고, 같은 시기에 먼 동쪽에 있는 교토가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또 교회 한 곳만 남긴 채 폐허로 변해버린 평양과 달리 아직까지 조선 500년의 숨결을 안고 있는 광화문 일대는 어떻게 보존된 것인가? 

그건 전쟁의 승패를 떠나 인류의 영원한 보물로 남게 될 문화재를 지키려고 했던 이들의 소중한 사랑 때문이다. 

최근 유행하는 '통일은 대박'이라는 장미빛 전망을 내놓기보다 먼저 참혹한 전쟁을 피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Posted by qlstnfp
2014. 9. 2. 11:21

http://m.nocutnews.co.kr/news/1204576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고려의 500년 도읍지인 개경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지를 찾고 있었다. 


권중화, 남은 등에게 한반도 최고의 명당자리를 찾아보라고 명했다. 

가장 먼저 후보지를 떠오른 곳이 계룡산 자락이었다. 

이성계는 즉각 공사를 명하여 새로운 궁궐 조성공사에 들어갔다. 

이때 관상학과 풍수지리에 능한 하륜이 계룡산은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고 큰 강을 끼고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도읍지 선정에 재론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민에 빠진 이성계는 공사를 중단시키고 정도전과 무학대사. 그리고 하륜을 불러들여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게 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양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세 사람은 궁궐의 위치와 좌향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먼저 하륜이 주목한 곳은 무악(毋岳) 일대였다. 

무악산은 지금의 안산(鞍山)으로 그 앞에 연세대와 이화여대 자리를 아우르는 신촌 일대를 내려다보는 산이다. 

특히 마포강이 인접해 있어서 조운(漕運)에 유리하고 중국과의 무역에도 좋은 입지를 갖춘 곳이다. 

이성계는 이 곳에 궁궐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계룡산 공사가 중단된 지 6개월이나 지난 터라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개경에 있는 신하들은 여전히 개경만한 도읍지는 없다고 주장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화가 난 이성계는 친히 무악에 올라 정도전과 무학대사,그리고 서운관 등에게 의견을 물었다. 


무악 일대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약하고 도성으로서 부지가 좁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또한 "무악은 장래에 나라를 도둑질할 사람이 살 땅 입니다"라는 서운관의 발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어쩌면 고려를 도둑질한 이성계 본인을 두고 한 말 일 수도 있다. 

600년 후에 무악산 아래 살던 사람들이 일으킨 군부 쿠테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기분이 상한 이성계는 다시는 무악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동시에 북악산과 인왕산 아래의 부지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궁궐지를 놓고도 政殿의 坐向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하였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북악을 좌청룡, 목멱산(남산)을 우백호로 동향하여 궁궐을 배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낙타산(동대문 옆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하여 南面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통 유학자인 정도전은 중국의 모든 황궁과 고려의 궁궐도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임금이 남면해아 하는 것이 유학의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풍수도참설의 하륜과 불교 숭배자인 무학대사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이리하여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설계와 도성의 설계까지 본인의 손으로 완성하게 된다. 

심지어 경복궁 건물의 이름과 4대문 안 동네 명칭까지 경전을 뒤져 작명까지 한다. 


훗날 정도전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정적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름을 고치라고 했으나, 검토해본 결과 "그 이름들 중에 고칠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는 보고만 올라왔다. 

무학대사의 인왕산 주산론은 200년 후 광해군의 인경궁 건립공사에 힘입어 재현되는 듯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륜의 무악산 주산론은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꾸준히 부활했다. 

이성계에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있었다면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이방원보다 20살이나 많은 하륜은 방원의 관상을 보고 그에게 접근하여 그의 책사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는데,태종의 정략과 정책들은 대부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제1차 왕자의 난과 정도전 제거등을 기획하고 총지휘하며 이방원의 왕위계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개성으로 환도한 후 즉위한 태종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새 궁궐을 짓기로 결심한다. 

왕자의 난과 관련해 경복궁과의 악연에 치를 떨던 태종은 새로운 별궁 터를 물색하였는데 하륜이 다시 무악산 자락을 들고 나왔다. 

태종은 하륜의 안에 동조하는 듯 하다가 북악산 동쪽 응봉 아래에 있는 지금의 창덕궁 터를 점지하였다. 

이는 하륜이 궁궐 선정과 신축의 지휘자로 올라서면 정국을 주도하며 세력을 키워 갈 것을 우려한 태종의 지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륜은 이에 굴하지 않고 또다른 대규모 토목 사업을 제시하였다. 

고려조에 시행하려다 무산된 순제 안흥량(지금의 태안반도)에 운하를 판다는 계획이다. 

다각도로 사업 타당성을 분석한 결과 불가하다고 판명되었으나 하륜은 군사 5천여명을 동원하여 공사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바위산과 구릉지를 통과해야 하는 난공사인데다 당시 공사기술이 부족해 결국 중단되었고 예산만 낭비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이 계획은 200년 후 대동법의 선구자 김육에 의해 그 곳에 운하가 일부 조성되는 등 가능성이 검증된 바 있다. 

또 한번은, 장마철마다 청계천이 범람하자 준설공사를 벌여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에 고무된 하륜은 용산강에서부터 숭례문에 이르는 운하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갈수기에 물을 가둬두기 어렵고 물이 땅속으로 스며 들어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 또한 무산되고 말았다.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과 아낌없는 지원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하륜은 정도전의 정책을 대부분 무력화시켰다. 

정도전이 꿈꾼 사대부에 의한 臣權中心의 양반사회를 王權中心의 전제국가로 회귀하게 하는 등 태종의 1인통치에서 브레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조선 초기의 정치제도는 물론 관제, 군제를 정비하고 조세제도를 혁파하고 호패법 시행, 신문고 설치등 대부분의 개혁법안이 그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건대 그의 지략은 600년 후를 내다본 듯하다

그의 혜안이 약간은 빗나갔지만 무악산 아래에서 전두환,노태우,김대중 등 3명의 임금(?)이 배출되었고, 그가 구상한 삼남을 잇는 대운하계획은 아직도 살아 꿈틀대고 있다. 

정도전이 조선을 기획하고 큰 뼈대를 만들었다면 하륜은 거기에 살을 붙히고 피를 통하게 하여 500년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KBS 드라마 때문에 역사에 묻혀져 있던 정도전을 재조명하는 일이 한창이다. 

그러나 정도전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하륜의 업적도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정도전이 기획해서 세워진 경복궁은 오늘도 건재하고 있다. 

임진왜란 와중에 불타 없어졌다가 대원군이 다시 재건하고,일제가 뭉개버린 궁궐이 노태우 정부 때부터 차곡차곡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만일 신촌 일대에 궁궐이 세워졌다면 어떠했을까? 

임진왜란의 불길과 일제의 무자비한 조선 흔적 없애기를 피해가지 못했겠지만, 한국전쟁의 폭격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맥아더사령부는 한국인 군속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 사대문안은 공군의 공습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래서 경복궁과 창덕궁 등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신촌 일대는 폭격 범위에 들어가 모두 불탔을 것이다. 

그래서 경복궁은 600년의 세월을 견디었고,앞으로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바라보고, 뒤로는 북한산과 백악의 기를 받아 이 시간에도 꿋꿋히 서울의 상징으로 버티고 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