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 쓴 이야기/임기상의 역사산책'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14.09.02 조선왕조 실록 피난기
  2. 2014.09.02 전쟁의 참화속에서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
  3. 2014.09.02 현해탄 건너간 경천사십층석탑...
  4. 2014.09.02 무령왕릉 '엉터리' 발굴…
2014. 9. 2. 13:43

불타는 '조선왕조실록'과 시골 선비의 '분투'

2014-04-14 10:49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6332


[임기상의 역사산책 ⑯]시골 선비들, 실록과 태조 어진을 지키다

◈ 임진왜란 발발…조선왕조실록 가까스로 피신하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아침 8시경. 

왜선 7백여척에 탄 조선침략 선봉군 제1진 1만 8,700명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왜군은 북상하면서 닥치는대로 살인, 방화, 약탈을 저질렀다. 

이 와중에 한양의 궁궐에 있는 춘추관, 충주, 성주에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에 탔다. 

유일하게 왜군이 들어가지 못한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아 있었다. 

전주사고에는 실록을 비롯해 <고려사>, <고려사절요>등 모두 1,344책이 보관되고 있었다. 

또 전주사고 옆에 있는 경기전에는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의 어진이 걸려 있었다. 

그해 6월 왜군 제6진이 성주, 금산,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왜놈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실록과 어진을 산속 깊숙한 곳으로 옮기려면 말 20여필과 많은 인부들이 필요한데..." 

그의 머리 속에 이 지역사회에서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명망이 있었던 전라도 태인에 사는 유생 손홍록이 떠올랐다. 

바로 달려가 간청했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실록을 보관해야 하는데, 저 혼자서는 역부족입니다. 부디 뜻을 같이 하십시다" 

손홍록은 흔쾌히 동의하고 학문을 같이 했던 고향친구 안의와 함께 하인 30여명, 수십마리의 말을 데리고 전주로 달려갔다. 

이때 손홍록의 나이는 58세, 안의의 나이는 64세로 고령의 노인들이었다. 

오희길은 실록을 숨길만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정읍 내장산의 은봉암이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 세 사람은 태조부터 명종 때까지 13대에 이르는 180년의 기록을 47개 상자에, <고려사> 등 다른 서책을 15개 상자에 담아 수십개의 수레에 싣고 전주를 떠났다. 

시골 선비들, 산속 깊숙한 곳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실록을 지키다. 

은봉암에 도착한 것은 이레만인 1592년 6월 22일. 

다음날에는 태조 어진과 제기들을 용굴암으로, 다음달 14일에는 실록을 더 깊숙한 곳인 비래암으로 옮겼다. 

이들은 책들을 일일히 지게에 지고 한발 한발 내딛으며 산으로 올라갔다. 

지금도 용굴로 올라가는 길은 험난해서 난간에 의지해야 오를 수 있다. 

이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영은사(현 내장사)의 희묵스님과 무사 김홍무, 이름없는 사당패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나선 100여명과 함께 실록을 지켰다. 

이렇게 실록과 어진을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보관했던 기간은 14개월에 달한다. 

후일 안의가 쓴 <난중일기초>에는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자리를 뜨지 않고 실록을 지킨 날이 53일, 안의가 혼자 지킨 날이 174일, 손홍록이 혼자 있는 날이 143일이었다. 

곳곳을 전전하다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진 조선왕조실록 

전라감사 이광은 의주에 피난가있는 선조에게 태조 어진과 실록을 내장산에 잘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병조좌랑 신흠을 내장산에 보내 관헌들을 동원해 정읍으로 옮기도록 명했다. 

이후 실록은 왜군을 피해 아산으로 옮겼는데, 이때도 안의와 손홍록은 사재를 털어 식량과 말을 준비해 실록을 지켰다. 

정유왜란이 발발하자 실록은 황해도 해주~강화도~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진다. 

안의는 실록이 아산을 떠난 직후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 생을 마친다. 

남은 손홍록 일행은 실록이 묘향산에 도착할 때까지 5~6년간 실록과 동행한다. 

전쟁이 끝난 뒤 조정은 안의와 손홍록에게 종6품의 벼슬을 내렸다. 

이 포상은 민간인에게 내려진 최상급의 벼슬이다. 

지금도 전북 정읍에는 안의와 손홍록의 위패를 모신 '남천사'라는 사당이 남아 있다. 

다시 출판된 조선왕조실록...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원본으로 실록을 4개 더 출판했다. 

그리고는 지역을 안배해 궁궐의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평안도 영변 묘향산, 경상북도 봉화 태백산, 강원도 평창 오대산 등 5곳에 분산 배치했다. 

이후 이괄의 난,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제각기 수난을 당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대한민국에는 서울대학교에 있는 정족산 사고본과 국가기록원이 갖고 있는 태백산 사고본만 남았다. 

나머지 오대산 사고본과 적상산 사고본의 행방은 묘연했다. 

홀연히 도쿄대학교에 나타난 오대산 사고본 

2006년 7월 인천국제공항에 특별한 화물이 도착했다. 

전 국민의 관심 속에 돌아온 화물은 일제 때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대지진 속에서 살아남은 오대산 사고본 47책이었다. 

오대산실록은 1913년 강탈당해 도쿄대로 넘어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됐다. 

그러나 개인이 대출받아 집에 보관하던 47책이 살아남았다. 

이 소식을 접한 종교계,학계,정계 인사들이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를 구성해 끈질기게 반환을 요청한 끝에 서울대 개교기념일에 맞춰 돌려준 것이다. 

일본은 이를 돌려주면서 끝까지 '반환'이 아니라 '기증'이라고 주장해 국민적 공분을 샀다. 

'기증'이란 용어를 고집하는 건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강탈한 실록이 도쿄대 재산이란 걸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으로 넘어간 적상산 사고본 

한국전쟁이 발생한 직후인 1950년 7월 초. 

북한 수뇌부는 서울의 한 도서관 먼지구덩이 속에 나뒹굴고 있는 적상산 사고본 1,800여권을 평양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실록은 묘향산 사고에 있던 것이 전라도 적상산을 거쳐 일제시대에 서울 장서각으로 옮겨진 것이다. 

최고사령부는 군사작전도에 '리조실록 구출 노정'을 그려넣고 수송을 담당할 군용차량들을 배치했다. 

이 차량들은 미군 폭격기를 피하기 위해 밤에만 이동하면서 실록을 평양으로 옮겼다. 

더 이상 폭격할 목표물이 없다는 평양에서 실록이 살아남은 건 기적같은 일이다. 

전쟁이 끝난 후 북한에서는 벽초 홍명희의 장남인 홍기문 사회과학원 부원장의 진두지휘 아래 실록의 번역작업이 진행되었다. 

드디어 16년만인 1991년 번역본 '리조실록' 400권이 출간되었다. 

남한의 한글본 413권보다 3년 앞선 것이다. 

번역의 주체가 누구이든간에 전쟁의 불길을 피해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살아남은 건 다행스런 일이다. 

살아남은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로 지정된데 이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이 방대한 저서를 볼 때마다 외적의 침입 앞에서 사재를 털어 실록을 옮기고 밤새 교대로 숙직을 서던 그 전라도의 유생과 이름없는 백성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qlstnfp
2014. 9. 2. 13:21

"천년고찰을 불태우기 전에 나부터 죽여라"

2014-04-11 10:02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5202




◈ 잿더미로 변한 월정사…큰 스님이 몸으로 지킨 상원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의 강원도.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하던 국군 제1군단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작전지역 안에 있는 사찰을 포함한 모든 민간 시설물을 소각하라" 

산속에 있는 민가나 절이 적의 은폐물이나 보급기지로 활용될 가능성을 없애려는 가혹한 조치였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의 스님과 신도들은 북한군이나 인민군이 주둔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국군이 태우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절 건물의 방구들을 파내고 모든 문짝을 뜯어냈다. 

마침내 국군이 들이닥쳤다. 

이들도 천년고찰을 제 손으로 태우려니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민간인들을 시켜 잿더미로 만들었다. 

월정사는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만 남고 폐허로 변했다. 

국군은 이어 오대산 중턱에 있는 상원사로 몰려갔다. 

당시 오대산에는 주민들 대부분이 피난을 가고, 한국불교의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되는 한암스님만 상원사에 남아 있었다. 

상원사로 들어온 군인들은 법당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잠깐만 시간을 주게"라고 이르고는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입은 뒤 법당 안에 있는 불상 앞에 정좌했다. 

그리고는 "이제 불을 질러도 좋다"고 말했다. 

이를 본 장교가 "스님~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밖으로 나오세요"라며 끌어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난 부처님의 제자야. 중이란 원래 죽으면 화장을 하는 법. 나는 여기서 힘 안들이고 저절로 화장을 할 터이니 당신들은 명령대로 어서 불을 지르게" 

스님의 기개에 압도당한 군인들은 결국 법당의 문짝만 뜯어내 불을 태운 뒤 떠났다. 

상원사는 자장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며,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인 동종(국보 제36호)을 보관하고 있었다. 

◈ "화엄사를 불에 태워라"…"안된다~ 문짝만 소각하라" 

1951년 5월 지리산. 

빨치산 주축부대인 남부군을 토벌하던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은 고민에 빠졌다. 

상부에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연곡사 등 인근 사찰들은 모두 공비의 은신처를 없앤다는 이유로 불길에 휩싸였다. 

차일혁은 이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절을 태우는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다" 

전쟁 중이라지만 화엄사는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고, 더구나 각황전은 그의 어머니의 기도처였다. 

차일혁은 10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화엄사에 들어갔다. 

부하들에게 각황전 문짝들을 모두 떼어와 대웅전 앞에 쌓아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절을 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이를 어길 순 없다. 문짝을 태우는 것으로 명령을 이행한 것이다" 

이로써 화엄사 전각들은 무사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런 조치 때문에 차일혁은 작전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2년 후 차일혁 부대는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을 사살해 빨치산 토벌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적장의 예를 최대한 갖춰 그의 시신을 스님들의 독경 속에 정중하게 화장한 후 하동 송림에 뿌리며 장례를 치렀다. 

이런 일들로 차일혁은 승진도 늦어지고 수많은 공훈에도 불구하고 훈장도 받지 못했다.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스님은 그에게 감사장을 수여했고, 조계종은 1998년 6월에 화엄사 경내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이 비석에 고은 시인은 글을 새겼다. 

"이제 해원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천하의 영봉 지리산을 생사의 터로 삼아 동족상잔의 피어린 원한을 풀어 그 본연으로 돌아감이 옳거니, 여기 근본 법륜 화엄사 청정도량에 한 사람의 자취를 새겨 기리도록 함이라" 

◈ "해인사를 폭격하라~" VS "해인사 주변에만 기관총을 갈겨라" 

경남 합천에 있는 해인사에 들어가면 올라가는 길목에 거대한 비석이 나타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지켜낸 김영환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다. 

1951년 12월, 지리산 일대에는 한창 빨치산 토벌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영환 대령이 지휘하는 한국 공군의 유일한 전투비행대인 제10 전투비행전대는 공비토벌작전에 항공지원을 맡고 있었다. 

미 공군은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정찰기와 연락장교를 파견해 한국 공군기가 작전하기 전에 미리 지상의 동향과 공격 목표를 지정해주고 있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우리 전투비행대에 출격명령이 내려졌다. 

공비를 토벌하는 경찰부대로부터 긴급 지원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4대의 비행기가 사천 비행장을 출발해 지리산으로 향했다. 

비행기마다 각각 500파운드 폭탄 2개와 5인치 로케트탄 6개, 캘리버 50 기관총 1.800발씩을 장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찰기의 목표 제시용 연막탄이 해인사 마당에 떨어져 하얀 연막을 내고 있었다. 

이때 김영환 편대장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각 기는 내 뒤를 따르되 편대장 지시 없이 폭탄을 사용하지 말라.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사격하라" 

잠시 후 정찰기에서 독촉 훈령이 내려왔다. 

"해인사를 폭탄으로 공격하라~ 도대체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나?" 

편대장의 2차 명령이 떨어졌다. 

"각 기는 폭탄 공격을 하지 말라~" 

4대의 비행기는 해인사를 지나쳐 뒷산 능선 너머에서 폭탄과 로케트탄을 빨치산들에게 퍼부었다. 

그날 저녁, 미 공군 고문단의 한 소령이 편대장실에 나타났다. 

그는 김영환 대장에게 물었다. 

"아까 목표를 알리는 연막탄의 흰 연기를 보셨습니까?"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곳을 공격하더군요" 

"소령께서는 경찰의 요청에 따라 목표를 지정했지만 그 곳은 사찰이었습니다" 
"사찰이 국가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공비보다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세계적인 국보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미군도 2차대전 때 귀중한 문화재가 많은 교토시를 폭격 대상에서 제외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말문이 막힌 미군 장교는 돌아가버렸다. 

이렇게 해서 천년고찰 해인사와 장경판전, 고려대장경판은 우리 곁에 남아있게 되었다. 

이 일화를 알게된 해인사는 2002년에 높이 2.2m 높이에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본떠 오석과 황동석으로 제작한 공적비를 해인사 마당에 세웠다. 

큰 스님이 상원사에 없었다면, 차일혁과 김영환 두 분이 상부의 명령을 따랐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는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Posted by qlstnfp
2014. 9. 2. 13:00

고려석탑 약탈한 日관료…분노한 英 청년

2014-04-10 10:52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4414


[임기상의 역사산책 ⑭]현해탄 건너간 경천사십층석탑...박물관에 우뚝 서다

총칼을 앞세우고 약탈해간 경천사십층석탑 









조선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뺏긴 후 2년이 지난 1907년 3월.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총칼을 들고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부소산 기슭에 있는 경천사 절터로 몰려왔다. 

이 당시에는 사찰의 건물은 다 사라지고 특이한 형태의 대리석 석탑 하나만 우뚝 서있었다. 

13.5m의 큰 키에 탑신마다 섬세하게 조각된 불상과 보살상은 화초들로 뒤덮여 있었지만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석탑을 마구 해체하고 포장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인근 주민들과 군수 일행이 가로막자 '고종 황제가 하사했다'는 거짓말을 내세워 총검으로 위협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달구지 수십대에 석탑 조각들을 싣고 개성역으로 빼돌린 뒤 일본으로 실어갔다. 

어떻게 해서 백주대낮에 이런 날강도짓이 벌어진건가? 

대리석탑을 탐내 사기극을 벌인 다나카 미쓰아키 

다나카 미쓰아키는 일본의 궁내대신으로 문화재 약탈자 가운데 최고 악질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904년에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라는 책에서 본 경천사십층석탑에 흠뻑 빠졌다. 

높은 탑이지만 위압감보다는 상승과 안정의 느낌을 주면서 균형감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회색 대리석 탑이었다. 

그는 자나깨나 이 탑을 자기 집 정원에 갖다 놓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1907년 1월 24일에 열린 대한제국 황태자(순종)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집어갈 방법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러다 뒷돈을 주고 무뢰배들을 고용해 명령을 내렸다. 

"고종황제가 결혼식 기념으로 나에게 하사했다. 개성 근처의 절터에 있는 대리석탑을 도쿄에 있는 우리 집 정원으로 가져와라" 

그래서 이같은 문화재 약탈과 야반도주라는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들끓는 여론...야만적인 약탈을 준엄히 꾸짖은 푸른 눈의 외국인들 

황제의 이름을 팔아 문화재를 훔쳐간 이 사기행각은 순식간에 한양으로 전해져, 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젊은 영국인의 귀에 들어갔다. 

바로 35세의 언론인 어네스트 베셀이다. 

베셀은 영국 특파원으로 조선에 왔다가 이 쓰러져가는 나라를 돕기 위해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뉴스>라는 일간지 2개를 발간하고 있었다. 

그는 통감부의 매수와 회유를 뿌리치고 이 전대미문의 문화재 약탈 소식을 신문에 실었다. 

1907년 3월 12자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다. 

"개성군과 풍덕군 접경지역에 있는 경천사탑은 고려 공민왕 때 공주를 위해 옥석(대리석)으로 10층 높이로 세운 수백년된 유물이다. 그런데 무슨 허가를 받았는지, 일본인들이 그 탑을 무너뜨려 일본으로 실어간다 하기에 두 군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사적으로 맹세했다고 한다" 

이렇게 군민들은 맨 손으로 우리 유물들을 지키려고 했지만, 이 사정을 알고 있는 중앙 조정은 남의 일처럼 바라봤으니 정말 참담한 일이었다. 

다나카가 잠시 조선에 왔을 때 심상훈 궁내대신에게 이 탑이 탐난다고 말하자, 조선의 대신이라는 인물이 "탐이 나거든 가지고 가시지요"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베셀이 연일 이 사건을 보도하자, 통감부가 지원하는 <서울프레스>와 일본 정부의 대변지인 <저팬 메일>은 '이것은 분명한 거짓말'이라고 반박해 일대 논전이 벌어진다. 

인류의 양심에 호소한 선교사 헐버트 

서울에서 <코리아 리뷰>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이 소식을 접하자 피가 끓어 올랐다. 

그는 1905년 일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하기 위해 워싱톤에 다녀오기도 했고,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도 밀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헐버트는 일본 고베의 영자신문 <저팬 크로니클>과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신문인 <뉴욕 포스트>에 이 사실을 알려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했다. 

이처럼 국내외의 여론이 들끓자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석탑 약탈을 없는 사실이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나서 다나카를 질타하고 조선으로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고민하는 조선총감부...버티는 다나카 

여론이 악화되자 당시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다나카는 실어간 석탑을 조선의 원래 위치로 돌려보내라. 그것은 불법적인 반출이다"라고 요구했다. 

데라우치가 양심적인 인물이라 그런 게 아니고 곧 조선을 병탄해야 하는데 반일감정이 고조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초대 총독으로 올라서는 데라우치는 조선의 유물 반출을 엄금했는데, 이는 조선이 억년만년 일본 땅이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그도 조선을 떠날 때 석굴암 본존불을 반출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다나카는 귀를 막고 11년동안 버텼다. 

1918년 결국 국내외 여론의 단합과 계속되는 총독부의 반환 요구에 무릎을 꿇고 탑을 경성으로 보낸다. 

41년간 방치된 경천사십층석탑...경복궁에 다시 서다 

우여곡절 끝에 경천사십층석탑은 현해탄을 건너 고국에 돌아왔지만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애써 찾아오고도 해방 때까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 

결국 세월이 흐른 뒤 1959년 경복궁 내 전통공예관(현재의 경복궁 관리사무소) 앞에 세워졌다. 

3년 후에는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복구기술이 낙후해서 조잡스럽게 복원되었다. 

일부 훼손된 부분을 시멘트로 칠하고,야외에 세워놓으니 산성비나 풍화작용에 의해 계속 망가져갔다. 

결국 1995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석탑을 해체한 뒤 10년간 보존.복원작업을 벌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넓은 홀에 위용을 드러내다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서면 넓은 홀의 맨 끝에 있는 아름다운 대리석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늘씬하게 솟아 올라간 몸매와 독특한 생김새, 탑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 등 늘 볼 때마다 그 우아한 멋에 감탄하게 된다. 

이 탑이 세워진 것은 1348년 고려 때이다. 

생김새도 특이하지만 '병을 치유해주는 약황탑'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팔작지붕의 기와집들이 빼곡하게 마을을 이룬 듯 보이는 걸작이다. 

이 수려한 탑을 보고 지나가는 저 어린이들이 이 탑을 지키려고 맨 몸으로 총칼에 덤빈 군수와 군민들, 이 척박한 나라를 사랑했던 푸른 눈의 외국인들을 기억할까?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했던 베셀과 헐버트의 유해는 유언대로 고국에 가지 않고, 합정동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묻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Posted by qlstnfp
2014. 9. 2. 12:51

[임기상의 역사산책 ⑬]최초의 '처녀 왕릉' 발굴…파국으로 끝나다

◈도굴을 면하고 처녀분으로 남은 '무령왕릉' 자태를 보이다 

http://m.nocutnews.co.kr/news/4003491

# 장면 1 

"어~ 이게 뭐지?" 

일본인 교사 카루베가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제6호분을 파헤친 후 39년이 지난 1971년 7월 5일 6호분의 뒷산. 

배수로를 파던 인부의 삽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그것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조금씩 파내려가 보니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카루베가 죄다 도굴해버린 6호분은 벽면 사방에 사신도만 남고 도굴되는 과정에서 천장이 훼손돼 물이 스며들었다. 

또 여름만 되면 무덤 안과 밖의 기온 차이로 이슬이 생겨 벽화가 훼손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해 여름부터 배수로를 만들기 위해 뒤쪽 언덕을 파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다 인부의 삽날에 왕릉 입구의 전돌이 걸린 것이다. 

인부들은 서둘러 공사 책임자인 김영배 국립공주박물관장을 찾았다. 

# 장면 2 

김영배 관장은 이날 새벽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돼지인지 해태인지 모를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꿈이었다. 

'무슨 짐승일까?' 

이 꿈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공사현장에서 점점 파내려가니 벽돌로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다음날까지 흙을 파헤치니 이 구조물이 6호분이 아닌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백제무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공사가 중단되고 서둘러 문화재관리국에 신고를 했다. 

# 장면 3 

보고를 받은 문공부장관은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는 발굴단을 파견했다. 

7월 7일 오후에 현장에 도착한 발굴단원들은 벽돌로 쌓은 구조물이 또다른 전실묘의 입구란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날 밤 큰 비가 내리면서 쏟아지는 빗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배수구 설치공사를 밤 늦게까지 벌였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무덤의 문을 열기로 하고 철수했다. 

이때만 해도 발굴단은 무덤은 맞지만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 '무령왕릉'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백제고분은 신라고분과는 달리 출입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열이면 열 모두 도굴됐기 때문이다. 

또 이번 발굴작업이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참사로 끝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수라장이 된 발굴현장 

7월 8일 어떻게 알았는지 조간신문인 한국일보가 공주에서 왕릉을 발견했다는 특종보도를 냈다. 

이 바람에 보도진과 구경꾼들이 꾸역꾸역 송산리로 몰려들었다. 

발굴단은 아침 8시쯤부터 인부를 투입해 무덤 입구로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오후 3시쯤 무덤 입구가 나타났다. 

발굴단은 일단 막걸리와 수박,북어를 올려놓고 위령제를 지냈다. 

이어 김원용과 김영배는 막아놓은 부분의 맨 위 벽돌 2개를 들어냈다. 

그 순간 무덤에서 하얀 수증기가 새어나왔다. 

1,400년 이상을 밀폐상태로 갇혀 있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를 만나 흰 수증기로 변한 것이다. 

마침내 무덤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무덤이 조성된 뒤 한번도 개봉되지 않은 처녀분을 만난 것이다. 

김영배는 꿈에 본 멧돼지처럼 생긴 돌짐승을 보고 크게 놀랐고, 김원룡은 입구에 놓인 무령왕의 지석을 보고 놀랐다. 

'석수'라고 불리는 돌짐승은 악귀를 쫒아 죽은 이를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지석은 왕릉 주인공의 신원과 조성 연도 등을 새긴 돌이다. 

수많은 왕릉이 발굴되고 도굴되었지만 그 무덤이 어느 왕의 무덤인지를 확실한 기록과 유물로 알려준 것은 무령왕릉이 처음이었다. 

이때부터 발굴 책임자들을 시작으로 다들 흥분하면서 이성을 잃었다. 

무덤에 들어간 지 20분 후에 두 사람이 나와 무령왕릉 발견 사실을 발표했다. 

발굴 현장은 집단 패닉에 빠졌다. 

보도진들이 앞다투어 들어가려고 하자,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한 언론사당 서너컷만 찍기로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 무덤 안에 함부로 들어가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도 일어나고, 뒤늦게 도착한 모 신문사 기자는 자기네 회사에 연락이 늦었다며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뺨을 때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구경꾼을 통제해야 할 경찰들마저 "나도 한번 구경해보자"며 대열의 앞장에 섰다고 한다. 

이런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면 경찰의 협조를 받아 철조망을 둘러쳐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충분한 장비를 갖춘 뒤 몇달이고 몇년이고 눌러 앉아 연구를 했어야 했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 안쪽에서 발굴단은 긴급 회의를 가진 끝에 사고 방지를 위해 신속하게 발굴을 끝내기로 했다. 

있을 수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17시간만에 끝난 무령왕릉 발굴...천추의 한으로 남다 

발굴단은 급조된 발전기로 마련한 전등 2개를 갖고 철야작업에 들어갔다. 

조사팀을 2개로 나눠 한 팀은 왕 쪽을, 다른 팀은 왕비 쪽을 맡아 사진 촬영과 실측 작업을 벌였다. 

속전속결로 진행한 작업은 밤 10시쯤 마무리됐다고 하니 이건 그냥 통에다 유물을 쓸어담은 셈이다. 

자정쯤부터 유물을 밖으로 반출하기 시작해 다음날 아침 9시경 바닥 청소까지 끝냈다. 

처음 무덤에 들어간 지 17시간만에 모든 조사와 유물 수습을 끝내는 기네스북 기록을 남겼다. 

◈발굴 이후의 혼란… 

이 혼란의 와중에 김영배 관장은 몰래 중요 유물을 상자에 넣어 고속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일종의 충성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은팔찌 같은 걸 휘어보고 해서 다들 기겁을 했다고 한다. 

김 관장은 유물을 갖고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로 돌아왔다. 

국보급 유물을 운송 차량이나 호위 없이 상자에 넣어 고속버스로 이동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한편 대통령이 유물을 갖고 노는 것을 TV로 본 공주시민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공주서 출토된 유물은 우리 고장의 소중한 재산인데 멋대로 서울로 가져가다니..." 

주민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유물의 서울 반출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급하게 내려온 허련 문화재관리국장과 김원용이 주민 대표들과 협상을 벌여 이렇게 합의를 봤다. 

1.공주에 무령왕릉 출토물을 전시할 박물관을 짓는다. 
2.그전에 유물의 보존 처리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임시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송한다. 

이렇게 해서 무령왕릉 유물보존을 위한 국립공주박물관이 다음해 준공됐다. 

◈2천여점의 유물 서울로 이송‥…끊이지 않는 저주 
7월 16일 새벽 무장경관들의 호위 속에 유물을 실은 차가 공주를 떠났다. 

차량들이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 출발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문화재관리국장 차량의 운전기사가 넘어졌는데 공교롭게도 엉덩이 정맥이 터져 운전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단 유물차량과 호송차량이 먼저 출발했다. 

이번에는 모 신문기자에게 뺨을 맞은 장인기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지프차 운전기사가 동대문 근처에서 어린애를 다치게 하는 사고를 냈다. 

다음해 서울대로 복귀한 김원룡 교수는 어쩌다가 빚더미를 떠안아 살던 집을 처분해야 했다. 

고고학계에서는 큰 무덤,즉 왕릉을 파면 액이 따른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이렇게 해서 고대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수많은 정보가 엉터리 발굴 과정에서 영원히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발굴 작업에 참가했던 고고학자 조유전 씨는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남겼다. 

"무령왕릉 발굴은 고고학 발굴사에서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보도진들의 현장공개 독촉과 공주읍민 등 현장에 몰려든 일반인들의 이상 열기, 경비에 자신이 없었던 공주경찰서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현장의 분위기는 어떤 거대한 힘에 떠밀리듯 통제 범위를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무엇보다 체계적인 준비없이 왕릉 발굴을 하룻밤만에 해치운 일은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