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2. 12:25

"조선인은 노예처럼…" 마지막 조선 총독의 저주

2014-04-07 10:36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1864

[임기상의 역사산책 ⑪]아직도 유령처럼 떠도는 '식민사관'


◈ 저주를 남기고 떠난 마지막 조선 총독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 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놨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이 섬뜩한 말을 남기고 간 아베 노부유키는 누구인가? 

그는 1944년 7월부터 패전 때까지 조선 총독을 지낸 인물로, 재임 기간 중에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의 물자와 인력을 쥐어짰다. 

친일을 거부한 조선인들을 탄압하고, 여자정신대근로령을 공포해 12~40세의 미혼여성들을 끌고 가 군수공장에서 강제노역하거나 전선에 보내 군 위안부로 착취한 인물이다. 

그가 자신있게 조선을 떠나기 전 총독부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내뱉은 것은 바로 총독부에 설치한 '조선사편수회'라는 조직과 거기서 일했던 친일파 때문이다. 

◈ 총독부,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 설치하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등 한국사 연구단체와 독립운동 단체들은 지난 3월 19일 국회에서 '식민사학해체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했다. 

국민운동본부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 이래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 식민사관에 맞서는 대응 논리를 세우기는 커녕 지속적으로 그에 동조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동북아재단이 올해 초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를 통해 발간한 연구서 '한국 고대사 속의 한사군'(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이 한국 고대사에 대한 식민사관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운동본부는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한반도 북부는 중국 식민지가 되고 남부는 일본 식민지가 된다"며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가 정립한 식민사학을 국가기관이 세계 학생과 재외공관에 배포하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재단 측은 서둘러 기자간담회를 통해 "구미학계에서는 심지어 1930년대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인식이 영문으로 번역돼 유포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국내외의 기존 연구성과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면서 한사군을 중심으로 일본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한국 고대사 내용을 설명한 책"이라고 반박했다. 

동아시아의 영토·역사 분쟁에 맞서는 대응논리를 만들라는 정책 목표로 설립된 국가기관이 동북아역사재단이다. 

연간 수백억대의 국고가 지원되고 있어 대다수 국민들은 당연히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침략사관에 맞서 싸우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에 동조해 매국적인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그 뿌리는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역사가인 박은식 선생이 중국에서 저술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조선에 유입되자 당황했다. 

그래서 서둘러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식민사관을 토대로 한 <조선사>편찬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 단체에는 천황을 신봉하는 일본인 어용학자를 중심으로 친일 소장 한국인 학자들이 대거 참가한다. 

또 구색을 맞춘다고 이완용,박영효,권중현 등 거물 친일파들을 고문으로 위촉했다. 

이들이 저술한 <조선사>의 요체는 조선의 역사는 식민지 혹은 외세의 압제에서 시작했다고 강조하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는 고대사회에서 일약 근대사회로 도약시켰다고 조작한 것이다. 

이 역사 조작의 주역은 일본 학자로는 이마니시 류가, 조선 학자로는 이병도와 신석호가 주도했다. 

◈ 식민사관을 완성한 이마니시 류와 이병도 
<조선사> 편찬에 앞장선 한.일 학자들은 '한국사는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에서 출발했다'는 침략논리를 세우고 역사서 조작을 통해 한국사의 주체성을 부정했다. 

이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가 고대사다. 

한국사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해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중국 식민정권인 한사군이 한국을 발전시켰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병도는 한사군의 위치를 만주로 본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을 부인하고, 한반도에 있었다고 강변했다. 

이마니시 류는 '단군조선'을 곰과 호랑이의 허황된 이야기라고 왜곡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또 1천년간 불리어 온 '삼각산' 이름마저 지워버렸다.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지명을 바꿀 때 그가 제멋대로 '북한산'이라고 기록해버렸다. 

◈ 일본인들은 떠났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을 떠도는 '식민사관' 

해방과 함께 역사학계는 친일 학자를 강단서 쫒아내고 식민사관의 뿌리를 근절해야 했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무산되고 박은식, 신채호 선생에 이어 민족주의 사학자인 안재홍, 정인보 선생이 떠나면서 그 공백을 친일학자들이 채우게 된다. 

조선사편수회에서 맹활약한 이병도와 신석호는 각각 서울대, 고려대 교수로 들어가 제자를 양성했다. 

이병도가 걸어온 길을 보자. 

서울대 대학원장~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대한민국 학술원 회원~국사편찬위원~문교부장관~대한민국 학술원 원장. 

경력 중 특이한 것은 1962년에 문교부 산하 독립유공 공적조사위원회에 같은 친일학자인 신석호와 함께 참가한 것이다. 

평생을 친일문제를 연구한 임종국 선생은 생전에 친일 전력가들이 삼가해야 할 몇가지를 언급했는데 그 중 하나가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였다. 
이렇게 청산이 안된 식민사관이 흘러 흘러 동북아역사재단에 침투해 급기야 해방이 되고도 69년이 지난 이 시점에 '식민사학해체 국민운동본부' 가 출범한 것이다. 

아베총독의 마지막 저주를 곱씹어봐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최근 식민사학을 분석한 문제작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저술한 소장 역사학자 이주한 씨는 이렇게 강조했다. 

"식민사관의 가장 큰 폐해는 진실을 훼손해 국민들에게 열등감을 주입하고,비주체적인 삶을 내면화한다는데 있다. 민족에게 노예의식을 심는데 식민사관만큼 효과적인 수단도 없다. 이것이 역사학자가 아니었던 단재 신채호,위당 정인보,석주 이상룡 등이 무장투쟁을 하면서도 역사연구에 매진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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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 12:15

도망가기 바빴던 이승만…'스탈린은 달랐다'

2014-04-04 10:20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0927

[임기상의 역사산책⑩]'빨리 도피한다' VS '수도 사수한다'...엇갈린 국가의 운명

▣도둑같이 새벽 기차 타고 서울 떠난 대통령 
"각하~ 지금 서울을 버리고 떠나시면 안됩니다. 대통령이 피신하면 한국군 병사 전체가 전쟁을 포기합니다" 

"내가 북한군에게 잡히면 한국한테는 재앙이야" 

운명의 1950년 6월 25일 밤.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주한 미국대사 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즉시 서울을 빠져나가겠다는 대통령의 고집을 꺽으려고 남의 나라 외교관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무초 대사는 대통령이 적군의 수도 함락을 사수하다 군대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그러나 적군에 잡히지 않을 그 순간까지 머물러 있어 달라고 호소했다. 

끝내 설득은 실패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내각이나 국회에도 알리지 않고 달랑 4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객차 2량만 달린 낡은 3등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가다보니 대구다. 

"어~ 너무 내려갔다. 대전으로 돌려라" 

대전에 도착한 대통령은 또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인다. 

녹음방송을 통해 마치 자신이 서울에 남아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서울시민은 물론 국민들 모두 안심하라고 연설했다. 

서울로 올라간 녹음테이프는 27일 밤 10시부터 여러 차례 방송되었다. 

최고 지도자가 서울에 남아 '안심하라'고 방송하니 서울시민들은 피난을 가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입소문을 통해 대통령이 서울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와 군, 경찰의 고위 관계자들과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일제히 가족과 함께 재산을 챙겨 서울을 탈출했다. 

방송 다음날인 6월 28일 새벽 2시 15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 시민 대부분과 국군 주력부대, 많은 군사장비들이 고스란히 한강 북쪽에 남게 되었다.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3개월 후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서울이 수복되자 군경은 적 치하에 남은 서울시민들을 상대로 검거작전에 나섰다. 

시민들은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정부로부터 다시 부역, 친공, 북한협력 등의 혐의로 처벌받거나 처형되었다. 

국민과 정부를 버리고 도망간 이유로 처벌받은 자들은 한명도 없었다. 

다음 해 1월 4일 중국군이 밀고 내려오자 서울시민들은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한번은 속지만 두번은 속지 않는 법이다. 

▣왜군 무서워 압록강 거쳐 만주로 도망가려 했던 선조 
지금부터 422년전인 1592년 4월 28일. 

믿었던 신립 장군마저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겁에 질렸다. 

<선조실록>은 이날 "충주에서 패전 보고가 이르자, 임금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가는 것)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고 기록했다. 

패전 소식에 패닉 상태에 빠진 선조가 가장 먼저 도주하겠다는 얘기다. 

대신들은 통곡하며 반대했다. 

이 시점에서는 남은 병사를 모아 한강 교두보를 지켜야 하는데 다 포기하고 도망가겠다니 대신들은 아연실색 했을 것이다. 

선조는 반대를 뿌리치고 이틀 후 새벽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궁궐을 나왔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자 한양 일대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먼저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다. 이 곳은 공사 노비들의 문서가 보관돼 있는 곳이다. 

이 혼란 속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도 다 불에 타 폐허로 변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강방어선도 맥없이 무너지고 장수와 병사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다. 

한편, 벽제관~개성~평양을 거쳐 압록강변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이번에는 강 건너 요동으로 넘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라를 가장 먼저 포기한 인물이 국왕이다. 

신하들이 반발하고 명나라가 '오지 말라'고 통보하자 그제서야 주저앉았다. 

이 와중에 나라를 지킨 것은 전국에서 들고 일어난 의병들과 바다에서 일본 해군을 궤멸시킨 이순신 장군과 그 휘하의 수군들이었다. 

▣ 적 침공 앞에서 혼란 수습하고 수도 지킨 스탈린 

1941년 10월 16일 모스크바는 대혼란에 빠졌다. 

3갈래로 소련을 침공한 히틀러의 '전쟁기계' 독일군은 서와 남, 북에서 모스크바를 압박해 들어왔다. 

독일군 선봉대는 모스크바 교외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희미하게나마 크레믈린 궁의 나선형 탑이 보이는 곳이다. 

외국 외교관들이 모두 동쪽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대거 수도를 빠져나가거나 약탈, 파업에 가담했다. 

영화관들은 문을 닫고 지하철은 운행을 멈추었다. 

시민들은 절규했다. 

"우리의 지도자 스탈린은 어디에 있는거야? 그는 우리를 버렸다" 

그 시간에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집무실에 앉아 반전의 계기를 찾고 있었다. 

집무실로 장군들과 참모들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매년 거행하던 볼셰비키 혁명 24주년 기념일 퍼레이드를 올해도 실시하겠다" 

부하들은 대경실색했다. 

독일군이 코 앞에 온데다 독일 공군으로부터 폭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다시 강조했다. 

"모스크바 시민뿐 아니라 전국의 군대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열병식을 거행한다" 

1941년 11월 7일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드넓은 붉은 광장에서 소련군의 장중한 행진이 벌어졌다. 

이어 스탈린이 연단에 서서 연설을 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떠한 군사적 지원도 없이 단독으로 해방을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독일 침략자들은 소련 국민들을 섬멸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당하게 해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운명이 어떠했는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연설은 라디오 방송과 확성기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퍼레이드와 연설을 직접 본 시민들이나 중계를 들은 소련 국민들 가슴에 피가 끓어 올랐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스탈린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한 병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최고 지도자가 모스크바에서 우리와 함께 있기로 결정한 사실을 확인한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에 고무되어서 우리는 마치 진군하는 나찌놈들을 잡아 관에 가두고 못질 하듯이 의기양양하게 행진했습니다" 

1년 후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궤멸시키고 쾌조의 속도로 베를린을 향한 진군을 시작한다. 

스탈린의 공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이때 이 순간만은 진정한 '지도자'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한국전쟁에서 한민족의 지도자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중요한 것은 국난 속에서 리더는 백성과 군대와 자리를 함께 해야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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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 12:00


조선인이 조선인 잡는 '간도특설대'를 아십니까?

2014-04-03 09:13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0118

[임기상의 역사산책⑨]죄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실제는 국군 수뇌부


◈ 혼돈의 만주벌판…일본군, 조선청년 모아 독립군 토벌에 나서다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이 준 무기를 들고 조선 독립군에게 총을 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소설 같은 장면이 1930~1940년대에 만주벌판에서 실제 펼쳐졌다. 

1931년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동북항일연군'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고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중국 본토 침략 때문에 바빴고, 만주인을 주축으로 구성된 만주국 괴뢰군은 전투의지도 없고 군기도 엉망이었다. 

이에 따라 만주의 대표적인 친일파인 간도성 성장 이범익 등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조선인으로 구성된 독립적인 특수부대를 만들기로 했다. 

1938년 12월 14일 만주국 기병대가 쓰던 밍웨거우의 병영에서 간도특설대 1기 지원병 입대식이 열렸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1945년 8월 15일 패망 때까지 7기에 걸쳐 매년 약 690명을 선발했다. 

하사관을 포함한 사병은 모두 조선인이었고, 장교는 일본인과 조선사람이 섞여 있었다. 

이들의 토벌대상은 연변 일대를 무대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조·중 연합 독립군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동북항일연군 등 다양한 항일조직이 군대와 관헌의 추적을 피하면서 집단주거 마을시설과 격리된 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간도특설대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5년간 전투를 벌였다. 

항일운동을 하는 조선 청년들과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친일 조선인 사이에 총질이 벌어진 것이다. 

간도특설대의 진압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역사학자 필립 조웰은 "일본군의 만주점령 기간 중에 간도특설대는 잔악한 악명을 얻었으며,그들이 점령한 광범위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일본군과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연합작전에 밀려 동북항일연군은 1로군 총사령 양징위가 사살되고 남은 부대가 소련으로 넘어가면서 1943년을 기해 자취를 감췄다. 

이후 간도특설대는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북경의 동북쪽으로 이동해 모택동의 팔로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도 받지 못한 채 팔로군 토벌작업을 계속 벌였다. 

어처구니없게도 팔로군측이 일제의 패망 소식을 전해주면서 전투가 종식되었다. 

소련군에게 쫒기던 간도특설대 대원들은 일본군이 남긴 돈을 나눠 갖고 각자 살기 위해 뿔뿔히 흩어져 한반도로 도피했다. 






◈ 항일부대에 귀중한 탄약 10만발을 넘겨준 일본군 병사 

1933년 3월 하순. 

만주 젠산쯔(尖山子,뾰족산) 일대에서 항일 유격대와 일본군·만주군 혼성 토벌대 간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토벌대가 철수한 뒤 전쟁터를 살피던 유격대원들은 울창한 숲 속에서 일본군 군용트럭 한대와 한 일본 군인의 주검을 발견했다. 

이 군인은 일본어로 쓴 유서를 남겼다. 

"나는 당신들과 만나서 공동의 원수를 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파쇼 야수들에게 포위되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살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운반해 온 10만발의 탄알을 귀군에게 드립니다. 바라건대 그 탄알로 파쇼 군대를 쏘십시오." 

이다라는 군인은 일본군이 트럭을 회수하지 못하도록 엔진을 부순 상태였다. 

유격대는 이다의 주검을 이번 전투에서 전사한 유격대원들과 함께 매장했다. 

사흘 후 다시 이다의 묘소에 모여 엄숙하게 추도식을 거행하고 그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이 지역의 소학교 이름을 '이다 소학교'로 개명했다. 

변절한 조선 청년들이 같은 민족을 살육하는 동안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일본인 군인은 자기 목숨과 탄알을 식민지 해방에 바친 것이다. 

◈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로 올라선 간도특설대 대원들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던 대원들은 해방 후 과거를 숨기고 신생 대한민국의 국군에 들어갔다. 

이들 중 상당수가 장관, 군사령관, 고위 관료로 출세했다. 

해병대의 경우 신현준, 김석범에 이어 김대식 등 간도특설대 출신이 사령관을 맡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이들 중 일부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으나 누구 하나 자발적으로 당시의 일을 고해하거나 참회한 인물은 한 명도 없다. 

가장 유명한 인사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 장군이다. 

그는 간도특설대 복무와 관련해 국민들에게 진지하게 설명하거나 사죄한 적이 없다. 

그나마 일본에서 일어판으로 발간한 '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에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리들이 쫒아다닌 게릴라 가운데 조선인이 많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려는 일본의 책략에 그대로 끼인 모양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래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고 비판받아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게릴라전이 전개된 지역의 참상을 알게 되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그냥 "젊은 날 철이 없어 우리 민족에게 죽을 죄를 졌다"고 하면 될 것을 해괴한 논리로 포장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군에 복무해도 소좌 이상만 등재했지만, 간도특설대는 '독립군 말살'이란 악랄한 임무 때문에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등재했다. 

최근 만주벌판 현장을 답사하며 '간도특설대'라는 걸작을 저술한 언론인 김효순 씨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간도특설대가 민족의 자랑거리였느니, 민중의 편이었느니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그래도 그 경력을 살려 '한국전쟁에서 공비를 토벌했다'는 말이 항일 영령을 악귀처럼 내쫒아버리는 전능의 부적으로 사용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공비 토벌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Posted by qlstnfp
2014. 9. 2. 11:51

악질 친일경찰, 광복군 장군의 뺨을 때리다

2014-04-02 09:42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1216257 


해방 후 친일파 득세…의열단장 끝내 '평양 행'

▣해방된 조국에서 수모를 당한 의열단 단장 

중국에서 27년간 무장투쟁을 벌인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김원봉은 해방 후 석달이 지난 1945년 12월 1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분단된 한반도에서 그의 앞길에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와 갈등을 빚은 김원봉은 임정을 탈퇴하고, 좌우합작 운동에 주력했다. 이마저 여의치 않자 중간파를 이끌고 좌익계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이 시작됐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자 그 배후로 몰려 성북경찰서에 연행 구금돼 친일경찰들한테 폭행을 당했다. 이어 공공연한 협박은 물론 테러 위협까지 받자 중국에서처럼 거처를 수시로 옮기고 잠행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월북을 결심한다. 

김원봉은 남북에서 정부가 수립되기 전 마지막 회담인 평양의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남았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김원봉이 북한을 선택한 건 친일경찰 노덕술의 폭력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경찰서에 붙잡혀가 대표적인 악질 친일파 노덕술한테 뺨을 맞고 욕설을 들었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고 모욕을 당했으니…. 의열단 활동을 같이 했던 유석현 집에 가서 꼬박 사흘간 울었다."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은 누구인가? 

해방 후 1주일동안 전국에서 경찰관에 대한 군중들의 폭행사건이 177건 발생했다. 이 가운데 111건이 조선인 경찰에 대한 보복이었다. 

침략 당사자인 일본 경찰보다 조선인 경찰을 더 미워한 것은 그들이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인물이 노덕술이다. 

그는 일제하에서 경찰로 일하면서 체포된 학생, 사회주의 운동가, 신간회 간부 등 나이, 성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다. 그 결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다가 또는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인물이 미 군정청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변신해 평생을 의열단원과 광복군과 함께 총을 들고 일본과 싸운 의열단 단장의 뺨을 갈겼으니 그 심정은 어땠을까? 

▣해방 후 다시 마주친 독립운동가와 친일군경 

김원봉보다 더 기막힌 사연은 많다. 
여성 독립운동가(1900~1991) 정정화는 상해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려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가 부역죄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구타를 당했는데,자기를 때리는 경찰관이 일제 때 자기를 구속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일제 말인 1943년 합천독서회 사건으로 구속돼 1년여 동안 감옥에 있었던 이구영(1920~2006)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가 1958년 7월 남파공작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접선에 실패하고 2달만에 부산에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를 체포한 형사 역시 일제시대에 그를 고문했던 형사였다. 

저명한 언론인이자 문인인 송지영씨의 사연도 기구하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와 연결된 혐의로 1944년 2년 선고를 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 있다가 해방 후 출소했다. 

그는 국내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활동하다 5.16 쿠데타 직후 민족일보 사건과 관련돼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 그를 살리기 위해 국제 엠네스티는 물론 문인과 언론인 104명이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박창암 혁명검찰부장에게 제출했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나와 만주군 장교로 일했던 인물이고, 박창암은 우리 독립군을 잡기 위해 만든 간도특설대 출신의 친일파다. 서명을 해주던 문인과 언론인들 모두 혀를 찼다. 

"독립운동가가 친일파들한테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세상이 됐구나."

왜 이런 비극이 벌어진걸까? 

어느 나라건 외세로부터 해방되면 국가건설과 함께 2가지 일에 착수한다.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을 거둔 애국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식민지 시절 동포를 핍박한 매국노를 처단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 두가지 과제 수행에 실패했다. 나치 독일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드골장군은 적에게 협력한 군인, 경찰에 이어 문인과 학자, 언론인 1만명을 체포해 대부분 교수형대로 보냈다.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일부 주장에 대해 그는 "위대한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타락시킨 매국노를 처단했을 뿐이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