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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일 사학자들이 독립유공자를 심사하겠습니다"
2014-06-10 11:56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41]친일파 신석호,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영화 누리다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는 신채호, 박은식 선생 등 민족사학자들이 한 손에는 총을,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우리 역사를 치열하게 쓰고 있지 않았을까?
◈ 친일파 신석호, 이병도와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에 나서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물은 단 2명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다.
이승만이 쫒겨나고 5.16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인 1962년, 군사정권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선정과 표창에 나섰다.
공적조사위원회에 참석한 김승학, 김학규, 김홍일, 오광선 등 평생을 조국 해방에 바친 독립운동가들은 깜짝 놀랐다.
천하가 다 아는 대표적인 친일 사학자 이병도와 신석호가 떡하니 심사위원실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분노한 어느 독립운동가가 일갈했다.
"임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해 뭐 암마?"
두 사람은 얼굴만 붉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웃기는 것은 그 망신을 당하고도 두 사람은 계속 공적심사위원회에 기웃거렸다는 사실이다.
다음 해에는 신석호가, 1968년에는 두 사람 다 참석하고, 1980년에는 신석호가 끈질기게 끼어들었다.
그 전해에 신석호는 사망하고, 이병도는 나이가 들어 기력이 떨어져서 불참했다고 한다.
<장면 2>
2004년 9월 국사편찬위원회는 친일사학자 신석호의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지' 발간 계획을 취소했다.
위원회는 "과거사 규명 논란 등 어수선한 세상에 신석호가 '친일 논쟁'에 휘말릴 우려가 있어 논의 끝에 발간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 걸 신석호의 지인과 제자들만 모르고 있었다.
2005년 3월 28일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일제청산위원회는 '민족 고대'를 더럽힌 학내 친일잔재 명단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기자회견에서 "일제에 편승해 매국 매족했던 이들이 해방 후에도 호의호식하며 기득권을 누려온 역사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보성전문학교 교장, 고려대 총장, 교우회장에 이르기까지 민족을 배신한 자들의 면면을 찾았다. 앞으로 연구 조사를 통해 대학 내 (친일) 인적 잔재와 학문적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강조했다.
제자들이 민족의 혼을 좀먹은 스승들을 내치는 장면이다.
선정된 친일파에는 신석호와 이병도를 비롯해 고원훈, 김성수, 선우순, 유진오, 이각종, 장덕수, 조용만, 최재서가 선정됐다.
제자들이 발표한 스승 신석호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수사관 등으로 활약하며 일제의 역사왜곡, 식민사관 구축에 동참, 협력했음.
(특징) 해방 후에도 국사편찬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
◈ 신석호, 졸업과 동시에 곧바로 조선사편수회에 합류하다
이에 따라 부랴부랴 준비작업을 거쳐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발족했다.
총독부가 노린 것은 한국인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한국사 전체를 재조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한반도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했다는 허구를 도입했다.
처음에는 일본인 학자들로만 출발한 조선사편수회에 경성제국대학을 갓 졸업한 식민사학자들이 한명씩 두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5명,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신석호. 홍희 등이 그들이다.
거기서 열심히 충성을 다한 결과로 촉탁에서 시작해 1930년 수사관보, 1937년 수사관으로 착실히 승진했다.
황국사관 학자들과 식민사학자들은 드디어 1938년 <조선사> 총 35권을 완간했다.
이 방대한 저서의 골자는 간단하다.
"조선사는 주체성이 없어 주변 민족의 지배와 간섭, 침략에 의해 전개되어왔다. 조선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타율성에서 벗어나 발전한다"
◈ 신석호, 반민특위가 무산되자 재빨리 국사학계 접수하다
신석호는 해방 후에도 건재를 과시했다.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만들어 교사를 양성했다.
역사를 왜곡한 장본인이 새 국가의 인재를 키운 셈이다.
이어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취임해 열심히 식민사관을 교과서에 반영하고, 틈틈히 독립운동사도 저술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기록을 보면, 신석호는 자기 재임 기간을 '1929.4~1965. 1.21'로 적어 놓았다.
그가 보기에는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사편수회의 연장인 셈이다
이승만 정권 때는 이승만을 찬양하고, 박정희 시대에는 그를 칭송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민족주의자로 둔갑했다.
해서는 안될 독립운동사 기술과 독립유공자 심사는 물론, 애국지사들의 기념사업회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1954년에 민충정공(민영환) 기념사업회 이사로 임명돼 신도비문까지 지었다.
다음 해에는 애국가 작사가 조사위원으로, 1958년에는 독립기념사업회 위원으로 취임한다.
1961년에는 이준 열사 사인조사위원회 위원으로, 1963년에는 동학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등극한다.
동시에 이병도는 서울대 교수로,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로 역할을 분담해 사학계를 주름잡고 다녔다.
◈ 이제야 실상이 드러나는 식민사관과 친일 사학자의 욕된 인생
신석호가 죽은 지 20년이 넘어서야 그의 친일행각과 해방 후 행적이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우리 현대사의 또다른 비극이다
그들이 반민특위 해체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한국사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신석호와 이병도를 사랑하는 제자로 여겼던 황국사학자 쓰다 소키치나 이케우치 히로시가 해방 후 그들의 활약상을 봤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역시 "한민족의 민족성은 강자에는 굴종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그 반대이며, 거기서 노예적 근성이 보인다"고 흐뭇하게 웃지 않을까?
스에마끼 야스카즈가 누구인가?
그는 "고대부터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황국사관의 선봉장이었다.
그는 대표작 <임나흥망사>에서 "일본의 한반도 영유(임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본의 자랑이며, 구한말 일본에 의한 조선 병합은 고대의 복현이다"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이런 인물을 김원룡은 하늘처럼 떠받들며 충성을 다했다.
경성제대에서 스에마끼 야스카즈로부터 일제 식민사학을 전수한 김원룡은 그런 사관에 입각해 '원삼국시대설' 등 해괴한 학설을 주장하고 다녔다.
이런 인물이 '고고학계의 태두'라고 불리며 서울대 고고미술과 교수, 대학원장을 지내고 역사학회 회장, 한국고고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한다.
일제는 1927년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인은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고 끊임없이 세뇌시켜왔다.
그리고 일제의 이같은 세뇌작업은 문창극을 통해 다시 한반도에서 부활하고 있다.
지하에 있는 친일사학자의 정신적 기둥 '쓰다 소키치'가 들으면 "드디어 우리가 해냈다"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쓰다 소키치나 스에마끼 야스카즈 등 황국사학을 신봉한 일본인 학자들이 전파한 식민사관의 핵심은 3가지다.
1.'일선동조론'으로, 일본 민족의 조상과 한민족의 조상은 애초에 하나였으니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
2.'만선사관'으로 한반도는 대륙에서 실패한 정치 세력이 옮겨 자리잡은 곳으로 만주와 하나로 묶어야만 역사나 문화가 체계화된다.
3.'정체성론'으로 한반도는 발전이 정체돼 있었고, 일본 때문에 고대적인 것에서 근대적인 것으로 도약했다.
문창극의 주장은 정확하게 세번째 논리와 일치한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한반도에 남겨놓고 떠난 '식민사관의 망령'이 이제 대한민국 '일인지하 만인지상' 권력자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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