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14일 영국 해군성은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던 도웰(Dowell) 중국해 사령관에게 거문도를 점령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러시아가 점령할 지 모르니까 먼저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이튿날 아가멤넌 호 등 영국 군함들은 거문도를 점령했습니다. ‘거문도 사건’의 시작입니다.
'SKETCHES FROM KOREA, EASTERN ASIA - PORT HAMILTON, KOREA'. This half page view was published by the Illustrated London News in 1865.
http://www.antiquemapsandprints.com/iln124.jpg
거문도사건당시의 기록사진.
영국 정부는 1885년 4월20일, 중국과 일본 정부에 거문도 점령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조선 조정에는 5월20일에야 통보했습니다. 그것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을 예방코자 거문도를 잠시 거수(居守)한다’는 의례적인 내용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야만인들이어서 점령하는 데에 아무런 의식도 필요 없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던 거지요. 거문도 사건은 영국과 러시아가 1885년 3월 30일 아프가니스탄 펜제(그레이트 게임에서는 펜데라고 번역했습니다)에서 충돌한 사건에서 비롯됐습니다. 러시아군은 영국군의 훈련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는 방안을 모색합니다. 영국의 윌리스 제독은 거문도 점령은 방어적인 것이 아니라 침략적인 것이며, 거문도는 러시아의 극동지역에 대한 공격기지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사건 직후 조선조정은 외교 고문인 묄렌도르프와 엄세영을 나가사키에 보내 도웰 사령관에게 항의했습니다. 통서 독판 김윤식은 영국은 물론 중국 총판, 미국, 독일, 일본 공사에게 거문도 점령이 공법에 어긋난다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조선을 무시하고, 중국 정부를 교섭 상대로 택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한반도에서 영향력이 강화된 청나라의 입장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물론 중국도 조선의 종주권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거문도 사건을 활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거문도 문제에 관한 영국의 협상은 천진(天津)의 직예총독 이홍장과 이루어졌고, 조선은 당사국이면서도 국외자로 전락했지요.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이홍장의 조선 지배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겁니다. 영국도 러시아가 향후 10년간 한반도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최대의 피해자는 조선입니다. 1885년에 이미 강대국의 쟁탈과 타협의 대상으로 전락한 겁니다. 1910년 경술국치의 예고편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러시아가 장차 조선의 영토를 점거할 의사가 없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영국 함대는 1887년(고종 24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영국해군 소속 선박
"데어링호"의 데이비스선장(가운데)과 펫가서스호(데이비스선장의 우측) 그렌펠선장이 거문도 주민들과 찍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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