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 06:32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 ]


1882년(고종 19) 8월 23일 체결된 조선과 중국 상인의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규정.

이 장정의 원명은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이지만 줄여서 ‘조선통상장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표면상으로 근대 서양제국의 조약 체결의 형식을 모방하고 있으나, 내용은 종속관계 성격으로서 비준서 교환과 같은 공법상의 절차 없이 체결과 동시에 효력이 발생하였다.


[장정 체결의 배경]

종래 조선과 청나라간에 이루어지던 교역에는, 첫째 사대사행(事大使行)의 내왕과 관련되어 행해지는 것, 둘째 국경지방인 의주·회령·경원에서 물품을 교역하는 개시(開市), 셋째 사상(私商)의 밀무역 등 세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개시에도 갖가지 통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른바 잠상(潛商)은 시대가 내려갈수록 늘어났다.


조선 후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사회 불안과 가뭄 때문에 농사를 망해 국경을 넘어 만주 벌판에서 농사를 일구는 사람이 많았다. 이것은 양국간에 외교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종래의 엄격한 왕래 통제는 변화가 오고 있었다.


이즈음 동아시아의 전근대적 사회는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조선의 개화운동 등과 간접적으로 서양 열강의 충격에 자극받아 구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해 나가고 있었다.


조선이 1876년 2월 일본과 〈병자수호조규〉를 맺고 개국하자일본이 청나라에 앞서 조선에 침투한 데 당황한 이홍장은 1879년 7월경에 조선의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에게 글을 보고 청나라의 주일공사 하여장(何如璋), 부공사 장사계(張斯桂), 참찬관 황준헌(黃遵憲) 등을 시켜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金弘集)을 설득한다.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은

러시아 방어의 대책으로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親中國 結日本 聯美國)’가 제시하였다. 이에 영향을받은 조선의 관제들은 부강의 방법으로서 우선 연미론을 주장하고


통상문제도 봉황청(鳳凰廳) 무역을 보다 넓혀 중국 상인으로 하여금 부산·원산·인천 등 각 항구에 와서 통상하게 해야 일본 상인의 농단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개항장에서의 일본의 독점무역, 일본상인의 횡포는 말할 것도 없고, 두만강 하류 일대의 러시아 세력의 진출과 그들의 통상요구로 어차피 청나라와는 해륙 양로의 통상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에 황준헌이 내놓은 방안은 현안 문제 해결에 실마리를 던져준 셈이었다.


1882년 2월 17일 어윤중은 이조연(李祖淵)과 함께 문의관(問議官)에 임명되어 통상문제와 연미사를 논의하기 위해 톈진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톈진에 도착하였을 때[3월 28일]에는 미국의 제독 슈펠트(Shufeldt, R. W.)가 이홍장과 세 차례의 회담을 마치고 조미조약(朝美條約)의 초안을 가지고 같은 달 24일 조선으로 떠난 후였다. 결국 조미조약이 성안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연미론의 문제는 덜어진 셈이었다.


이조연은 4월 초에 귀국하였고 어윤중이 혼자 통상문제를 담당하였다.


어윤중은 통상관계가 수립되면 무역업무가 증대될 것이므로 미리 해관 설립과 관리, 운영할 사람의 인선을 상의하였다. 얼마 뒤 묄렌도르프(Moellendorff, P. G. von)가 고용되어 한국 해관이 설립되었다.


이럴 즈음에 러시아가 육로 통상을 제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어윤중은 5월 2일 통역관 김성손(金性孫)을 해관서로 보내 통상 거부의 자문을 전하였다.


주복은 “조미조약이 체결된 이상 공법에 따라 제삼국의 통상 제의를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로 수락을 권고하였다. 주복은 조선에의 미국의 진출이 확정된 만큼 러시아 세력을 끌어 들여 세력 균형을 유지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어윤중 또한 조약 체결의 전권을 위임받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측의 자문을 기다리던 중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결국 어윤중과 김윤식은 청나라 군대의 향도관으로 6월 27일 귀국하였다.


임오군란이 끝나고 어윤중이 8월 12일 다시 문의관에 임명되어 진주사(陳奏使) 조영하, 부사(副使) 김홍집, 종사관(從事官) 이조연 일행과 함께 톈진으로 가서 중단되었던 통상 논의를 재개하였다.


신랄한 논의를 거듭해 수정을 가한 끝에, 8월 23일 청나라측의 직례총독 이홍장·주복·마젠충 등과 조선측의 조영하·김홍집·어윤중 등이 전문 8조의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장정의 첫머리에 “이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각 대등 국가간의 일체 균점(均霑)하는 예와는 다르다.”고 하여 불평등 조약임을 밝혔다. ② 상무위원의 파견 및 양국 파원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의 위치를 대등하게 규정한 것(1조),

③ 조선에서의 중국상무위원의 치외법권 인정(2조),

④ 조난 구호 및 평안도·황해도와 산동·봉천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3조),

⑤ 북경과 한성의 양화진에서의 개잔무역을 허락하되 양국 상민의 내지채판을 금하고, 다만 내지채판과 유력(遊歷 : 돌아다니는 일)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4조, 관세 3·4조 및 세칙 5조),

⑥ 책문(柵門)·의주, 훈춘(琿春)·회령에서의 개시(5조), 홍삼 무역과 세칙(6조),


⑦ 초상국윤선운항 및 중국병선의 조선연해 내왕·정박, 장정의 증감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회(咨會)로 결정한다는 것(7조), 등이다.


이 장정은 8월 29일 이홍장이 광서제에게 보고하여 9월 12일 재가를 받음으로써 실효를 보게 되었다.


1883년 10월 3일 묄렌도르프와 진수당(陳樹堂) 사이에 〈윤선왕래상해조선공도합약장정 輪船往來上海朝鮮公道合約章程〉을 체결해 윤선이 운행하였다. 그런데 이 장정이 의결되자 청나라내 강경파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특히 완고파에 속하는 성경장군(盛京將軍) 숭기(崇綺), 봉천부윤(奉天府尹) 송림(松林) 등은 11월 초에 조선의 정세가 불안하므로 군비를 갖추어 대비해야 하고 종속관계를 종전보다 강화해 조선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육로통상장정이 체결되기 전에 숭기·송림 등은 청나라에 유리하도록 무역 왕래의 한계, 개시장의 변경, 어채활동의 제한 등을 미리 설정해 조선측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장정에 삽입하였다.


① 육로 교역은 조청(朝淸)상인에 한정한다는 것(1조), ② 개시장을 책문에서 중강으로 옮기고 봉천 성내의 여행을 금한다는 것(2조), ③ 압록강 이내 평안도 근방 각처 하구로서 제품관어(祭品官魚)를 잡는 곳에는 어선 왕래 및 민간인의 사포(私捕)를 금한다는 것(3조), ④ 중강·책문 이외의 공도(貢道 : 朝貢 사행이 다니는 길)에서 상인의 상행위 금지(11조), ⑤ 양국 교섭시 조선은 청나라를 상국(上國) 또는 천조(天朝)라 부르고, 청나라는 조선을 귀국이라 부른다는 것(2·3조) 등이다. 이밖의 것은 기본 장정에 준한 규정이었다.


그리고 〈회령통상장정〉은 봉천성 근처인 역대 왕의 능묘가 있는 곳과 러시아 국경 근처로 여행함을 금한다는 것(2조), 구르카(庫甫喀)·경원간의 호시(互市 : 양쪽에서 번갈아 가며 시장이 열리는 것)를 폐지한다는 것(3조) 이외는 〈중강무역장정〉의 내용과 비슷하다.


이처럼 청나라는 조선과 맺은 〈상민수륙무역장정〉의 서두에 종속관계를 천명했음은 물론, 치외법권, 개항구 통상, 해상방위의 담당 및 연안 어업 등의 특수 권익을 독점하고 제삼국의 균점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양제국은 청나라와 조선간의 종속관계를 무시하고 청나라의 특수권익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먼저, 일본은 1883년 6월 22일에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하고 제42조에서 최혜국 대우를 규정해 청나라의 이익 독점은 사실상 일본에 균점되고 말았다.


영국과 독일은 같은 해 4월 10일 주일나가사키영사 아스톤(Aston, W. G.)을 시켜 전해에 체결한 양국 조약의 비준을 연말까지 연기할 것을 조선에 요청하였다. 조약의 세칙 문제와 조선정부로부터 받은 조회문[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 한 것] 때문에 본국 의회에서 비준이 거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청국주재영국공사 파크스(Parkes, H.)는 조약 개정차 조선으로 떠났다. 같은 해 10월 27일에 영국과 독일이 조선과 통상장정을 체결했는데 여기서 양국 상인의 조선의 내지채판이 인정되었다.


이로써, 영국·독일이 청나라에 앞서 조선 내지에서의 상행위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청나라도 부득이 영국·독일의 뒤를 따라 〈상민수륙무역장정〉의 제4조를 개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양대신의 요청에 따라 1884년 2월에 조선 국왕의 동의를 얻어 제4조가 개정되었다.


이상에서 살펴 보면, 조선과 청나라의 통상관계의 수립은, 오랫동안 쌓여온 왕래제한의 폐단을 버리고 세계정세에 맞추어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자강운동의 일환이었다. 비록 청나라에 대한 종속관계를 끊어버리지는 못했지만, 조선으로는 낙후성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주체적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참고문헌≫ 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에 대해(金鍾圓, 歷史學報 31·32合輯, 1966)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