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 23:20

유길준(兪吉濬)



1856(철종 7)∼1914. 개화사상가·정치가.

1870년(고종 7)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김윤식(金允植) 등 개화청년들과 실학사상을 배우는 한편, 위원(魏源)의 《해국도지 海國圖志》와 같은 서적을 통하여 해외문물을 습득하였다


1881년 박규수의 권유로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 일본의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사와(福澤諭吉)가 경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유정수(柳定秀)와 함께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중국·일본 등 동양삼국의 단결을 목적으로 조직된 흥아회(興亞會)에도 참가하여 일본의 학자 및 정치가들과 교유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영익(閔泳翊)의 권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1883년 1월에 귀국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主事)에 임명되어 한성판윤 박영효가 계획한 《한성순보》 발간사업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민씨척족세력의 견제로 신문발간사업이 여의하지 않게 되자 주사직을 사임하였다.


그해 7월 보빙사(報聘使)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도미, 일본유학 때에 알게 된 생물학자이며 처음으로 다윈(Darwin, C.)의 진화론을 일본에 소개한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피바디박물관장인 모스(Morse, E. S.)의 개인지도를 받았다.

1884년 가을 담머(대학예비) 고등학교(Governer Dummer Academy)에서 수학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유학생이 되었다.

1883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 일행.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앞줄 : 로웰(P. Lowell)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오례당 뒷줄 : 현흥택 일본인 통역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국한문 혼용체 문장을 구사한 유길준의 1883년「세계대세론」(1883) ⓒ유길준전집편찬위원회


1884년 경, 하버드(Harvard) 대학 진학을 위해 대학입학예비고등학교(prep school)인 담마학교(Governor Dummer Academy)에 다니던 시절의 유길준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12월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1885년 12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다 하여 개화파의 일당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한규설(韓圭卨)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하고 1892년까지 그의 집과 취운정에서 연금생활을 하면서 《서유견문 西遊見聞》을 집필, 1895년에 출판하였다.




국한문혼용체로 서술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서양의 근대문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개화를 인간사회가 ‘지선극미(至善極美)’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역사가 미개화·반개화·개화의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는 문명진보사관(文明進步史觀)을 제시하였다.

그의 문명진보사관은 종래의 상고주의사관(尙古主義史觀)을 비판하여 문명의 진보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그의 개화사상은 실학의 통상개국론(通商開國論), 중국의 양무(洋務) 및 변법론(變法論), 일본의 문명개화론, 서구의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 및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며, ‘군민공치(君民共治)’, 즉 입헌군주제의 도입,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한국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 즉 ‘실상개화(實狀開化)’를 주장하였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한 청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수립된 친일내각에 참여, 외아문참의겸군국기무처회의원(外衙門參議兼軍國機務處會議員)·의정부도헌(議政府都憲)·내각총서(內閣總書)·내무협판(內務協辦) 등의 요직을 지내면서 갑오경장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1895년 10월에 을미사변 후 이 사건의 뒷수습을 위하여 일본 공사 이노우에(井上馨)와 접촉하는 한편, 내부대신이 되어 단발령을 강행함으로써 보수적인 유림과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러내각(親露內閣)이 수립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한국인 청년장교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와 연결, 쿠데타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음모가 양국간의 외교분규로 비화되자 일본정부에 의하여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유폐되었다.


1907년 고종이 폐위된 뒤 귀국하여 흥사단 부단장, 한성부민회(漢成府民會)회장을 역임하고, 계산학교(桂山學校)·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 등을 설립하여 국민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호남철도회사·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조직하여 민족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http://kr.blog.yahoo.com/linapk3456/4500.html?p=1&t=3


또, 1909년에는 국어문법서인 《대한문전 大韓文典》을 저술, 간행하였고, 1910년에 훈일등태극대수장(勳一等太極大綬章)을 받았다.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에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국권상실 후 일제가 수여한 남작의 작위를 거부하였다.

국어 문법서 중 최초로 출판된 책



그의 저서로는 《서유견문》·《구당시초 矩堂詩抄》·《대한문전》·《노동야학독본 勞動夜學讀本》 등이 있으며, 1971년에 유길준전서 편찬위원회가 구성되어 《유길준전서》 전4권이 간행되었다.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0557

오슬로 국립대학 박노자 교수는 <국가와 주군에 대한 일본식 희생정신을 '계몽'으로 여겼던 유길준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에서 유길준이 명성황후 시해에 연루되었을 행적을 지적하고 있다.


박교수는 "<윤치호 일기>와 같은 사료에서 갑오 내각의 주요 인물이었던 유길준과 명성황후 시해의 관련성이 뚜렷하게 보이는 등 그(유길준)의 행적이 결코 ‘모범적’이지만은 않았음에도, 오늘날의 교과서에서는 그의 모습을 '근대화의 선구자' '국민 계몽의 주역' 등 긍정 일변도로 서술하고 있다" 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유길준이 친일행각이 얼마나 컸던지 이른바 '한일합방' 때 일본 정부가 제시한 남작의 작호를 부여하겠다는 일도 벌어졌었다. 박노자 교수는 "종합적으로 질풍노도의 개화기에 유길준 이상의 친일적 정치·사회계 거물도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http://cafe.chosun.com/club.menu.bbs.read.screen?page_num=1&p_club_id=dreamview&p_menu_id=55&message_id=499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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