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eres de Paris)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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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을 말한다. 대원군은 병인년(1866)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비롯하여 남종삼(南鍾三) ·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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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도서 반환 관련 글
5월 한국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베이징[北京]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lonett, H.D., 백락내(伯洛內)]는 청국정부에 공한(公翰)을 보내어 한반도로 진격할 결심을 표명하고, 이후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든 청국정부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청국 총리아문사무(總理衙門事務)의 공한을 통해 프랑스 동태를 알게된 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변경(邊境)의 수비를 굳게 하였다.
9월 18일 리델 신부와 한국인 신도 3명(최선일(崔善一), 최인서(崔仁瑞), 심순여(沈順汝) ) 안내로, 로즈 제독이 인솔한 프랑스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다. 극도로 긴장한 조정에서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에게 표하군(標下軍) ·훈국마보군(訓局馬步軍)을 거느려 경인연안을 엄중 경비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함대는 이러한 경비태세에 불리함을 느꼈는지, 9월 25일 강류(江流) ·연변만 측량하고 지도 3장을 만든 뒤 중국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芍藥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다.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조선은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신헌(申櫶:申觀浩) ·이기조(李基祖) · 중군으로 이용희(李容熙) ·한성근(韓聖根)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 등 무장들에게,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 ·정족산성(鼎足山城) 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19일 일단 프랑스측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http://100.nate.com/dicsearch/pimage.html?s=&i=233678002&en=233678&q=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퇴거할 것을 통고하였다. 로즈는 회답을 통하여 선교사 학살을 극구 비난하고, 그 책임자를 엄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기와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맞섰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미리 잠복, 대기중인 한성근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등 처음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이로부터 민가 ·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만행은 황해도 연안(延安)에까지 미쳤다.
로즈함대와 수병들
1865년 나가사키항 방문 당시의 그림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5/AdmiralRoze.jpg/200px-AdmiralRoze.jpg
11월 7일 프랑스 해병 160명은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 ·대기 중인 양헌수가 이끈 500명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사망 6, 부상 30여 명의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양헌수는 원래 제주 목사로 있었는데 천총에 임명되면서 통진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 549명을 이끌고 덕포에서 프랑스군에 들키지 않고 한밤중에 잠도작전(潛渡作戰)으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점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金沂明) 지휘하에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哨官) 이렴(李濂) 지휘하에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哨官) 이대흥(李大興) 지휘하에 경군(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 하고 프랑스 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이 정족산성에서의 참패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저상시켜, 로즈 제독도 조선 침공의 무모함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하였다.
1866년 10월 11일부터 12월 2일까지 52일간의 양헌수 출전일기.
당시의 전쟁 상황과 장수로서의 고뇌가 담겨 있다.
https://www.warmemo.or.kr/info/info_5_view.jsp?nextURL=bm90ZWlkPTk2MjYmY3BhZ2U9MSZsaXN0X3NlcT0xMzA=
11월 11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銀金塊:당시 화폐로 환산하여 3만 8000달러)와 외규장각 도서 345권 등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로써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그 기세를 돋구어 쇄국양이(鎖國攘夷)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구미열강은 이를 계기로 조선을 청국의 종속국가가 아닌 독립한 주권국가로 인식하여, 종래의 한 ·청 관계를 재검토하였다. 프랑스군이 탈취한 많은 서적 ·자료 등은, 뒷날 유럽사람들이 한국 ·동양을 연구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인터넷
"http://www.kanghwado.net/YeokSa/ByeongInYangYo/index.html"참고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때 한국군대와 전투를 벌인 프랑스 해군부제독의 친필서한 (4쪽)VICE-AMIRAL ALBERT ROUSSIN 1866 EXPEDITION COREE ROZE.
http://www.oldbookbank.com/main.html?menu=view&uid=8290&category=%C1%A4%C4%A1%A1%A4%C7%E0%C1%A4%A1%A4%B1%BA%BB%E7%A1%A4%B9%FD%B7%FC%A1%A4%B0%E6%C1%A6%A1%A4%BB%F3%BE%F7%A1%A4%BF%A9%BC%BA%A1%A4%B1%B3%C0%B0-%B1%B9%B9%E6%A1%A4%B1%BA%BB%E738
Stanislas Férron, <<Dictionnaire Francais-Coreen>>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1869]). 1869년 페롱신부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불한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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