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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01 병인양요 (丙寅洋擾)
- 2009.12.22 甲午战争1894-1895年
- 2009.12.11 조선풍속화
유길준(兪吉濬)
1856(철종 7)∼1914. 개화사상가·정치가.
1870년(고종 7)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김윤식(金允植) 등 개화청년들과 실학사상을 배우는 한편, 위원(魏源)의 《해국도지 海國圖志》와 같은 서적을 통하여 해외문물을 습득하였다
1881년 박규수의 권유로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 일본의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사와(福澤諭吉)가 경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유정수(柳定秀)와 함께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중국·일본 등 동양삼국의 단결을 목적으로 조직된 흥아회(興亞會)에도 참가하여 일본의 학자 및 정치가들과 교유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영익(閔泳翊)의 권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1883년 1월에 귀국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主事)에 임명되어 한성판윤 박영효가 계획한 《한성순보》 발간사업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민씨척족세력의 견제로 신문발간사업이 여의하지 않게 되자 주사직을 사임하였다.
그해 7월 보빙사(報聘使)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도미, 일본유학 때에 알게 된 생물학자이며 처음으로 다윈(Darwin, C.)의 진화론을 일본에 소개한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피바디박물관장인 모스(Morse, E. S.)의 개인지도를 받았다.
1884년 가을 담머(대학예비) 고등학교(Governer Dummer Academy)에서 수학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유학생이 되었다.
1883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 일행.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앞줄 : 로웰(P. Lowell)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오례당 뒷줄 : 현흥택 일본인 통역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국한문 혼용체 문장을 구사한 유길준의 1883년「세계대세론」(1883) ⓒ유길준전집편찬위원회
1884년 경, 하버드(Harvard) 대학 진학을 위해 대학입학예비고등학교(prep school)인 담마학교(Governor Dummer Academy)에 다니던 시절의 유길준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12월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1885년 12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다 하여 개화파의 일당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한규설(韓圭卨)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하고 1892년까지 그의 집과 취운정에서 연금생활을 하면서 《서유견문 西遊見聞》을 집필, 1895년에 출판하였다.
국한문혼용체로 서술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서양의 근대문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개화를 인간사회가 ‘지선극미(至善極美)’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역사가 미개화·반개화·개화의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는 문명진보사관(文明進步史觀)을 제시하였다.
그의 문명진보사관은 종래의 상고주의사관(尙古主義史觀)을 비판하여 문명의 진보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그의 개화사상은 실학의 통상개국론(通商開國論), 중국의 양무(洋務) 및 변법론(變法論), 일본의 문명개화론, 서구의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 및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며, ‘군민공치(君民共治)’, 즉 입헌군주제의 도입,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한국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 즉 ‘실상개화(實狀開化)’를 주장하였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한 청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수립된 친일내각에 참여, 외아문참의겸군국기무처회의원(外衙門參議兼軍國機務處會議員)·의정부도헌(議政府都憲)·내각총서(內閣總書)·내무협판(內務協辦) 등의 요직을 지내면서 갑오경장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1895년 10월에 을미사변 후 이 사건의 뒷수습을 위하여 일본 공사 이노우에(井上馨)와 접촉하는 한편, 내부대신이 되어 단발령을 강행함으로써 보수적인 유림과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러내각(親露內閣)이 수립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한국인 청년장교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와 연결, 쿠데타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음모가 양국간의 외교분규로 비화되자 일본정부에 의하여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유폐되었다.
1907년 고종이 폐위된 뒤 귀국하여 흥사단 부단장, 한성부민회(漢成府民會)회장을 역임하고, 계산학교(桂山學校)·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 등을 설립하여 국민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호남철도회사·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조직하여 민족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http://kr.blog.yahoo.com/linapk3456/4500.html?p=1&t=3
또, 1909년에는 국어문법서인 《대한문전 大韓文典》을 저술, 간행하였고, 1910년에 훈일등태극대수장(勳一等太極大綬章)을 받았다.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에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국권상실 후 일제가 수여한 남작의 작위를 거부하였다.
국어 문법서 중 최초로 출판된 책
그의 저서로는 《서유견문》·《구당시초 矩堂詩抄》·《대한문전》·《노동야학독본 勞動夜學讀本》 등이 있으며, 1971년에 유길준전서 편찬위원회가 구성되어 《유길준전서》 전4권이 간행되었다.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0557
오슬로 국립대학 박노자 교수는 <국가와 주군에 대한 일본식 희생정신을 '계몽'으로 여겼던 유길준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에서 유길준이 명성황후 시해에 연루되었을 행적을 지적하고 있다.
박교수는 "<윤치호 일기>와 같은 사료에서 갑오 내각의 주요 인물이었던 유길준과 명성황후 시해의 관련성이 뚜렷하게 보이는 등 그(유길준)의 행적이 결코 ‘모범적’이지만은 않았음에도, 오늘날의 교과서에서는 그의 모습을 '근대화의 선구자' '국민 계몽의 주역' 등 긍정 일변도로 서술하고 있다" 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유길준이 친일행각이 얼마나 컸던지 이른바 '한일합방' 때 일본 정부가 제시한 남작의 작호를 부여하겠다는 일도 벌어졌었다. 박노자 교수는 "종합적으로 질풍노도의 개화기에 유길준 이상의 친일적 정치·사회계 거물도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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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eres de Paris)관련 글
http://www.euro-coree.net/euro/viewbody.php?board=alaune&page=51&number=1781&search=category&genre=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을 말한다. 대원군은 병인년(1866)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비롯하여 남종삼(南鍾三) ·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체험기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userId=kinocine&logId=4205916
외규장각도서 반환 관련 글
5월 한국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베이징[北京]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lonett, H.D., 백락내(伯洛內)]는 청국정부에 공한(公翰)을 보내어 한반도로 진격할 결심을 표명하고, 이후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든 청국정부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청국 총리아문사무(總理衙門事務)의 공한을 통해 프랑스 동태를 알게된 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변경(邊境)의 수비를 굳게 하였다.
9월 18일 리델 신부와 한국인 신도 3명(최선일(崔善一), 최인서(崔仁瑞), 심순여(沈順汝) ) 안내로, 로즈 제독이 인솔한 프랑스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다. 극도로 긴장한 조정에서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에게 표하군(標下軍) ·훈국마보군(訓局馬步軍)을 거느려 경인연안을 엄중 경비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함대는 이러한 경비태세에 불리함을 느꼈는지, 9월 25일 강류(江流) ·연변만 측량하고 지도 3장을 만든 뒤 중국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芍藥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다.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조선은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신헌(申櫶:申觀浩) ·이기조(李基祖) · 중군으로 이용희(李容熙) ·한성근(韓聖根)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 등 무장들에게,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 ·정족산성(鼎足山城) 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19일 일단 프랑스측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http://100.nate.com/dicsearch/pimage.html?s=&i=233678002&en=233678&q=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퇴거할 것을 통고하였다. 로즈는 회답을 통하여 선교사 학살을 극구 비난하고, 그 책임자를 엄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기와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맞섰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미리 잠복, 대기중인 한성근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등 처음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이로부터 민가 ·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만행은 황해도 연안(延安)에까지 미쳤다.
로즈함대와 수병들
1865년 나가사키항 방문 당시의 그림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5/AdmiralRoze.jpg/200px-AdmiralRoze.jpg
11월 7일 프랑스 해병 160명은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 ·대기 중인 양헌수가 이끈 500명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사망 6, 부상 30여 명의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양헌수는 원래 제주 목사로 있었는데 천총에 임명되면서 통진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 549명을 이끌고 덕포에서 프랑스군에 들키지 않고 한밤중에 잠도작전(潛渡作戰)으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점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金沂明) 지휘하에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哨官) 이렴(李濂) 지휘하에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哨官) 이대흥(李大興) 지휘하에 경군(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 하고 프랑스 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이 정족산성에서의 참패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저상시켜, 로즈 제독도 조선 침공의 무모함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하였다.
1866년 10월 11일부터 12월 2일까지 52일간의 양헌수 출전일기.
당시의 전쟁 상황과 장수로서의 고뇌가 담겨 있다.
https://www.warmemo.or.kr/info/info_5_view.jsp?nextURL=bm90ZWlkPTk2MjYmY3BhZ2U9MSZsaXN0X3NlcT0xMzA=
11월 11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銀金塊:당시 화폐로 환산하여 3만 8000달러)와 외규장각 도서 345권 등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로써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그 기세를 돋구어 쇄국양이(鎖國攘夷)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구미열강은 이를 계기로 조선을 청국의 종속국가가 아닌 독립한 주권국가로 인식하여, 종래의 한 ·청 관계를 재검토하였다. 프랑스군이 탈취한 많은 서적 ·자료 등은, 뒷날 유럽사람들이 한국 ·동양을 연구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인터넷
"http://www.kanghwado.net/YeokSa/ByeongInYangYo/index.html"참고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때 한국군대와 전투를 벌인 프랑스 해군부제독의 친필서한 (4쪽)VICE-AMIRAL ALBERT ROUSSIN 1866 EXPEDITION COREE ROZE.
http://www.oldbookbank.com/main.html?menu=view&uid=8290&category=%C1%A4%C4%A1%A1%A4%C7%E0%C1%A4%A1%A4%B1%BA%BB%E7%A1%A4%B9%FD%B7%FC%A1%A4%B0%E6%C1%A6%A1%A4%BB%F3%BE%F7%A1%A4%BF%A9%BC%BA%A1%A4%B1%B3%C0%B0-%B1%B9%B9%E6%A1%A4%B1%BA%BB%E738
Stanislas Férron, <<Dictionnaire Francais-Coreen>>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1869]). 1869년 페롱신부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불한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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