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문.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있었다.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 하단부는 돌 주초, 상단부는 목재 문으로 구성돼 있다
1407년(태종 7)에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개칭하여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金安老) 등 3정승이 계(啓)하여 모화관 남쪽의 홍살문을 개축하여 청기와를 입히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액자를 걸었다.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칙사가 올 때에는 조(詔)·칙(勅)과 상사(賞賜)를 가지고 오는데, 영조문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고 영은문(迎恩門)이라 써서 걸도록 하여 이에 따라 이름을 고쳤다.
임진·정유 왜란 후인 1606년(선조39) 영은문을 재건한 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와서 액자를 다시 써서 걸었는데, 그 액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청일전쟁 후인 1896년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하여 독립관(獨立館)이라 고쳐 부르고,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독립문을 세웠다.
영은문을 헌 자리에 세운 독립문. 가운데 한옥은 모화관을 개조한 독립관
독립문 완공 직후 모습. 독립관 주변으로 초가들이 있고, 독립문 뒤로 인왕산이 둘러처져 있다
영은문의 기둥을 세웠던 초석은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독립문 바로 앞쪽에 있다. 주초석은 방형의 배흘림 장초석(長礎石)인데 4방의 모를 죽여 8각같이 보이고 위에는 가구구조(架構構造)를 고정시켰던 홈이 있다.
1896년 1월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는데, 그와 개화파들은 국민계몽과 정부의 개화정책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 신문 발간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정부의 재정지원(4,400원)과 각계의 도움을 받아 1896년 4월 7일자로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이를 기념하여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함)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기념 첫 사업으로 ‘나라의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문 건설을 주창하였는데, 위로는 왕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1883년 미국방문길에 나선 개화파 일행. 앞줄 오른쪽 두번째부터 서광범, 민영익, 맨 왼쪽이 홍영식. 뒷줄 왼쪽 네번째는 유길준
이에 서재필, 윤치호 등은 개화파들의 지원 하에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를 모태로 독립협회를 결성(1896. 7. 2)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서재필은 고문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밖에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에는 김가진, 김종한, 이상재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이듬해 11월 중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며, 인근에 있는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독립문 건설이 결정된 날 독립협회는 "조선이 몇 해를 청(淸)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느님의 덕으로 독립하였다."며 기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을 통해 조선이 '청의 속국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려는 것이었고, 그런 연유로 독립문 건립 위치를 대중(對中)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 자리로 잡은 것입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1895년 일본과 체결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 포기'를 공식 천명한 바 있어 독립협회가 언급한 ’하느님‘은 결국 일본인 셈입니다.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등 ‘독립’ 두 글자만 들어가도 순사들이 눈알을 부라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절에도 독립문은 '독립' 두 글자를 달고도 온전히 살아남았습니다. 탄압은커녕 오히려 당국의 보호와 배려를 받앗습니다. 총독부는 1928년 10월 경성부(현 서울시)를 통해 독립문 상단부에 대해 보수공사를 해주었으며, 8년 뒤인 1936년 5월엔 독립문을 아예 '고적 제58호'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 영은문 주초는 '고적 제59호'로 지정됨)
'독립' 두 글자라면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던 일제가 대체 왜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재필 등이 주도해서 세운 ‘독립문’은 처음부터 일제(일본)가 타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완용은 당시 친미성향의 '정동파'의 핵심멤버로 독립협회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초대회장 안경수에 이어 제2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독립협회 운영비 전체 모금액 510원 가운데 100원을 그가 내는 등 협회의 재정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회장이 된 후에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협회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독립협회 자체가 사실상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 구성된 단체였던만큼 이완용은 독립문 건립의 최대 공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 이런 공로(?) 때문인지 <독립신문>은 1997년 11월 11일자 1면 논설에서 이완용을 '대한의 몇 째 안가는 재상'이라며 칭송하기도 했었습니다.)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유일한’ 역사적 기록은 일제 당시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는 '내동리 명물(名物)'이라는 고정연재물이 실려 있는데, 독립문을 다룬 이날짜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독립문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기록은 현재까지는 이 기사가 유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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