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5월3일 53세였던 미국인 메리 스크랜턴(1832-1909) 가족이 서울 땅을 밟았다.
목사의 맏딸 스크랜턴은 남편을 사별하고 외아들을 의대로 보냈다. 외아들인 윌리엄 이 조선으로 가는 의료선교사로 지명되자 그도 선교사 신청을 해 며느리 손녀까지 3대가 함께 조선에 왔다.
29세이던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은 예일대를 졸업한 의사이자 목사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입국 이듬해인 1886년 2월부터 지금의 정동 이화여고 자리에 학교건물을 짓기 시작해 11월에 이사했다. 이 학교에 대해 1887년 고종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린다.
1900년대 초 이화학당 수업 풍경
1911년 이화학당 졸업생들
1886년 6월 가난한 한 여인이 딸을 이화학당에 맡기자 주변에서 "처음엔 좋은 음식과 옷을 주지만 나중엔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말렸다. 그래서 이 여인이 아이를 도로 데려가겠다고 하자 학당장(교장)은 서약서를 써 가까스로 아이를 두 번째 입학생으로 삼을 수 있었다. '당신의 딸 복순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 없이는 서방(西方)은 물론 조선 안에서도 단 열흘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를 서약함.'
그 교장이 한 해 전 우리나라 첫 여성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들어온 메리 스크랜턴이었다. 그는 서울 정동에 초가집 19채를 사서 여학교를 세웠지만 1년이 가도록 오는 학생이 없었다. "여자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던 세상이었다. 이듬해 5월에야 "영어를 배워 황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진 관료의 소실을 첫 학생으로 받아 비로소 학교 문을 열게 됐다. 1887년 명성황후로부터 '이화'라는 교명을 하사받았고 10년 뒤엔 8~17세 학생 50명이 다니는 학교로 키웠다.
그는 "배우고 깨우치는 것만이 잘사는 길"이라며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1909년 10월 남대문의 상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 현재 한국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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