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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서당
광화문
명성황후 장례식
일제시대 충무로(혼마치)
1930 한국은행 미쓰코시 백화점(신세계)
1890년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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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甲午改革]
1894년(고종 31) 7월 초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간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을 말한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추진된(1895년 8월~1896년 2월) 제3차 개혁을 따로 분리하여 ‘을미개혁’이라고 부른다.
무력한 한말 정부는 내우외환의 다난한 속에 자주의식의 각성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전제로 한 강압에 못이겨 국내 개혁이 이루어지니 이것이 1894년의 갑오경장이다.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정부를 수립한다.
갑오경장 초기에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 폐서 시도에 착수했으나 좌절당하였다.
1차 갑오개혁
1894년(고종 31년) 7월부터 11월까지 이루어진 개혁이다
1차 김홍집내각은 김홍집, 김윤식, 김가진 등 1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임시 합의기관을 설치한다.
흥선대원군이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 받는다.
군국기무처는 3개월 동안 208건을 심의 의결하는 개혁의 주체세력이 되었다.
정치제도의 개혁을 단행,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청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宮內府)로 구별하고 종래의 6조(六曹)를 8아문(八衙門)으로 개편,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하였다.
또 국왕의 인사권·재정권·군사권 등을 박탈하거나 축소하였다.
군국기무처는 의정부와 8아문을 정부의 실질적 집권기구로 만들어 권력을 집중시키고
국왕의 권한을 축소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체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와 8아문을 원할하게 운용하기 위해 과거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관료제도를 도입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재정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하여 재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또 신식화폐장정(新式貨幣章程)에 의한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를 실시하였으며, 도량형(度量衡)을 개편하여 일본식으로 통일하였다.
이밖에 문벌·반상제도, 문무존비(文武尊卑) 구별의 폐지, 노비의 매매 금지, 연좌율 폐지, 조혼금지, 과부 재가 허용 등 조선사회의 폐단으로 지목된 여러 제도와 관습에 대해서도 개혁하였다.
2차 갑오개혁
1894년 11월부터 1895년 5월까지 이루어진 개혁이다.
2차개혁 때는 김홍집과 박영효연립내각 형태를 가졌다.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치고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文武官)을 개편하고 월봉제도(月俸制度)를 수립하였으며, 과거를 없애고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이 부여했다. 또한 행정제도를 23부로 개편하였으며, 신분제도의 개혁을 통해 문무,반상(班常)의 구별을 폐지하였고, 지방관에 의해서 집행되던 사법과 군사업무를 중앙에 예속시켜서 근대 관료체제를 이룩하였다.
2차개혁 때는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치고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文武官)을 개편하고 월봉제도(月俸制度)를 수립하였다.
지방행정구역은 8도(道)를 23부(府) 337군으로 개편하였다.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함으로써 횡포와 부패를 막아 지방행정체제를 중앙에 예속시키는 근대 관료체제를 이룩하였다.
사법제도는 행정기구에서 분리시켜 재판소를 설치하고 2심제(二審制)가 채택되었다.
1심 재판소로서 지방재판소와 개항장재판소(開港場裁判所)를, 2심 재판소로는 고등재판소와 순회재판소를 설치하였고, 왕족에 대한 형사재판을 위해서 특별법원을 두었다.
서울에 경무청(警務廳)을 두어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고 지방은 각 도 관찰사 아래 경무관을 배치하여 치안을 맡아 행정과 경찰권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제2차 개혁은 개혁을 추진하던 박영효가 1895년 반역음모 혐의로 정계에서 쫓겨나 일본에 망명하면서 끝나고 말았다.
http://blog.paran.com/qlstnfp2/29428740
1895년(고종 32년) 1월 7일, 고종은 세자와 대원군·종친 및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1894년 음력 12월 13일(1895년 1월 8일) 제정·반포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 독립의 서고문(誓告文)을 고한다.
이 서고문을 홍범 14조(洪範十四條)라 하며, 근세 최초의 순한글체와 순한문체 및 국한문 혼용체의 세 가지로 작성하여 발표하였는데, 순한글체에서는 홍범 14조를 ‘열 네 가지 큰 법’이라 표기하였다.
14개 조목의 강령으로, 자주 독립의 확립, 왕위 세습제, 후빈(后嬪)의 정치 불간여, 조세 법률주의와 예산 편성, 지방 관제의 개혁과 지방 관리의 권한 제한, 선진 외국의 학예와 문화 수입, 입법과 국민의 생명 재산 보호, 징병과 군대의 양성, 광범위한 인재 등용이 그 내용이다.
을미개혁
1895년 5월부터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 김홍집이 살해될 때까지 이루어진 개혁이다. 친일세력들이 내각 구성되어 주도한 개혁으로 가장 친일적성향이 짙은점이 특징이다.
을미개혁은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우체사 설치 및 단발령을 단행하였다.
을미사변 후 일본은 고종의 명을 받아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갑오개혁을 이어 계속 추진하게 되었다.
http://blog.paran.com/qlstnfp2/29603448
제3차 개혁의 주요 내용은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시행, 우체사 설치, 소학교 설치, 1세 1원(一世一元)의 연호 사용[1896년 1월 1일부터 건양(建陽)이라는 연호 사용], 군제 개혁, 단발령(斷髮令) 등이다.
그러나 단발령의 강제시행은 유생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반일·반개화운동을 초래하였다. 아관파천 후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김홍집은 분노한 국민에게 피살되기까지 하였다. 이로써 갑오개혁은 끝을 맺었다.
단발령 공포 후 전국 각지에 파견된 체두관(剃頭官)이 행인들의 상투를 강제로 자르는 모습
갑오개혁은 일본의 지원으로 추진되어 전반적으로 타율적인 개혁임을 부정할 수 없으나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 관료들은 개항 후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이나 유학생으로 외국에 있으면서 세계정세를 익히고 일본과 청나라의 개혁 등을 살핀 후 조선에 필요한 개혁방안을 실천에 옮긴 것이므로 자율적인 개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갑오개혁의 정신은 독립협회운동과 계몽운동으로 이어져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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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战争 / 中日甲午戰爭),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부른다.
http://blog.paran.com/qlstnfp2/29789338
http://blog.paran.com/qlstnfp2/29423691
http://blog.paran.com/qlstnfp2/29423691
http://blog.paran.com/qlstnfp2/29423691
. 아편 전쟁과 청불 전쟁의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청나라는 약해졌고 서양 열국의 간섭과 잠식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일본은 이를 조선에서 청나라 대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조선은 일본의 강요로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고, 대외적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해야 했다.
수구파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나라에서 파견한 위안스카이의 도움으로 재집권한다.
1884년, 개화파가 친청 경향의 보수 관료들을 일본군을 이용, 유혈충돌을 통해 몰아내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과정에서 청나라와 일본 군대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고,
1885년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양측은 ①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키고 ②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훈련교관을 보내지 않으며 ③ 변란 등의 중요 사건으로 어느 한 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했다.
189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혁세력인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되었다. 일본은 그 유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청나라를 이를 막고 청나라의 전함에 실려 조선으로 보냈고, 조선에서 그는 다시 능지처참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에 조선 정부가 청나라 정부에 지원병을 요청하자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 정부에 알렸고, 원세개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2,8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일본은 일본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원정군인 오시마(大島義昌) 휘하의 8,000 병력을 조선으로 보냈다.
이들은 조선의 항의에도 1894년 6월 9일 조선과 청나라는 항의하였으나, 약 4,500명의 일본 군대가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1894년 6월 11일, 동학농민운동이 종료되었다.
1894년 6월 13일,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이 기회를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할 기회로 판단하였고, 조선에서의 일본군의 지휘를 담당한 오토리 게이스케(大鳥 圭介) 공사에 가능하면 오랫동안 조선에 남을 것을 전달하였다.
1894년 6월 22일, 일본으로부터의 추가 병력이 조선에 도착하였다.
1894년 7월 3일, 오토리 공사가 조선의 정치 체제를 바꿀 것을 제안하였으나, 보수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894년 7월 7일, 청나라 주재 영국 대사에 의해 청나라와 일본 간의 중재가 있었으나 결렬되었다.
1894년 7월 19일, 일본 해군의 거의 모든 선박으로 구성된 일본의 연합함대가 전쟁에 대비하여 구성되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한양에 진입, 경복궁을 점령하여 새로운 친일 내각을 구성하였다. 새 내각은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
1894년 7월, 조선 내의 청나라 군대는 약 3,000 ~ 3,500명 정도였으며, 아산만을 통해서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일본의 목표는 우선 아산의 청국군을 봉쇄하고 일본 육군으로 포위하는 것이었다.
1894년 7월 25일, 아산 근해를 순찰하던 순양함 요시노(吉野), 나니와(浪速), 아키츠시마(秋津洲)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가 청나라 순양함 제원(済遠)과 군함 광을(広乙)과 마주쳤다.
1시간의 전투 끝에,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하여 암초에 좌초되고 제원호는 탈출하였다.
친일 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을 부여받은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약 4,000명의 일본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이동하여 아산과 성환(현재의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
1894년 7월 28일, 양측 군대는 아산 외곽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전투를 벌였다. 청나라 군대는 점차로 병력을 잃어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사상자는 500명에 달하였으나, 일본군 측은 82명에 불과했다.
8월 1일에는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일본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8월 4일 이전에 조선에 남은 청나라의 병력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고, 청나라로부터 파견된 병력과 합류하였다.
1894년 9월 15일, 일본군은 평양을 습격하여 청나라 군대를 항복시켰다.
일본군은 1894년 9월 16일 아침, 평양에 입성하였다. 평양 전투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다. 이로부터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1894년 9월 17일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의 함대와 압록강 하구에서 맞서 청나라측은 화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었으며, 85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4척 파손에 사망자 90명, 부상은 200명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4,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 부근에 상륙하였다. 북양함대는 여순항으로 피신하였다.
1894년 10월 25, 일본군은 단둥 동쪽 호산의 주둔기지를 공격하였다. 오후 10시 30분, 청나라 군대는 방어 위치를 버리고 다음날까지 단둥으로 후퇴하였다.
1894년 11월 21일까지, 일본군은 여순항을 점령하였다.
1894년 12월 10일까지 요동의 건양이 일본군 1사단에 점령되었다.
북양함대는 여순항을 거쳐 웨이하이 요새로 피신하였으나,1895년 1월 20일 웨이하이 요새는 일본군에 함락되었다.
1895년 3월, 일본군은 타이완에 상륙, 점령하였다.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는 조선을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고, 배상금 2억 냥(兩)을 일본에 지불하였으며, 요동반도·대만(臺灣)·팽호열도(彭湖列島) 등을 할양하였으며,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는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국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고, 일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표시하여 필연적으로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요동반도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 간섭으로 반환되었다.
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은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겨졌으며, 청나라 조정과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관에 치명타를 주었다.
조선의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일본은 이에 큰 위협을 느꼈고, 1895년 음력 6월 21일에는 일본 공사 마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의 2개 대대가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에게 왕비의 폐출 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그것을 거부하자 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조선을 압박하여 을미개혁을 실행하였으나, 민중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조선 내에서 일본의 세력은 감소하였다. 이듬해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한민족의 국가는 고대 이래 중국의 국가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는 독립성이 비교적 강할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다.
'만국공법'이란 이름으로 근대 국제법이 들어오기 이전,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국제 질서의 기반은 중국 중심의 천하 체제였다.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내려온 '천명(天命)' 관념을 중심으로 한 이 체제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로부터 각 지역의 군주가 정치적 권위를 위임받는다는 유기론적 세계관이었다. 진시황의 통일 이후 이 체제가 계속 확장된 결과 7세기 이후로는 동아시아 거의 전역이 편입되어 있었다.
만국공법의 원자론적 세계관과 달리 유기론적 세계관의 천하 체제에는 완전한 '독립'의 관념이 없었다. 지상 최고의 권위자인 천자조차 천명에 종속된 존재였다. 천자가 천명을 저버릴 때는 혁명의 대상이 되었다. 한민족 사회는 7세기에 이 체제에 편입되었고, 그 후로 역사의 대부분 기간을 통해 이 체제 안에서 허용되는 최대한의 독립성을 누려 왔다.
천하 체제의 종주국인 중국 왕조는 조공국의 급격한 변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공국의 왕조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민족 국가의 왕조 교체가 중국의 보호가 끊어질 때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다. 신라의 종주국 당나라가 멸망할 때 고려로의 왕조 교체가 있었고, 고려의 종주국 원나라가 망할 때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큰 부담을 무릅쓰고 출병했으며, 개항기에 청나라가 조선과의 관계에 집착한 이유의 상당 부분도 이 역할에 입각한 것이었다
천하체제의 붕괴가 완전히 확인된 계기는 청일전쟁(1894~95)이었다. 이 체제의 붕괴는 개별 국가의 쇠퇴와 멸망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존재 양식을 청산하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조공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존재 양식도 이로써 단절을 맞았고, 여기에 조선 망국의 큰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본다. 그 후 대한제국으로의 전환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려는 시도였지만, 그 시도가 성과를 거두기 위한 조건이 극히 열악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 왕조와 식민지 시대 사이의 과도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의 망국에 두 개 단계를 본다. 첫 단계인 천하 체제의 붕괴는 조선 왕국이나 한민족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가 함께 겪은 일이다.
대한제국(1897~1910)
망국의 두 단계 국권 상실
천하 체제의 붕괴를 계기로 사회, 경제, 문화, 정치의 모든 질서가 넓고 깊은, 그리고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러 방면의 빠른 변화를 효과적으로 조율해 나가지 못하는 사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침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226095124&Section=04&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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