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27. 15:19

호러스 뉴턴 앨런(Horace Newton Allen, 1858423~ 19321211)

 

미국의 조선 주재 외교관, 선교사로, 한국어 이름은 안련(安連)이다.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하여 웨슬리언 대학교 신학과,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83년 미국 장로교회 의료 선교사로 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중국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하려던 중 한국 거주 외국인을 대상으로 수익성있는 사업을 벌일 수 있을 거라는 동료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다시 장로회 본부에 조선행을 요구하여 1884년 조선에 왔다. 당시 주한미국대사 루시어스 푸트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조선 땅에서 선교사 신분을 내세우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앨런을 '미국공사관부 무급의사(Physician to the Legation with No pay)'에 임명했다.

 

알렌을 조선 정부에서 인정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최초의 양방의료기관을 설립한 미국인 의사로, 조선의 독립을 일관되게 주장한 친한파 외교관으로 칭송하지만 최근 알렌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조선에 들어오게 된 그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였고, 앞으로는 조선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미국의 제국주의 침탈에 앞장선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알렌은 조선에 도착한 지 3개월 뒤 1884124일 갑신정변에서 민비(사후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자, 묄렌도르프는 알렌에게 치료를 맡겼다.

 

알렌은 당시 미국에서 상당한 실력을 갖춘 의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의사들이 갖지 못한 서양 의술, 특히 외과 의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큰 이점이었다. 알렌이 도착하기 전 모여 있던 열네 명의 한의사들은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지만 자신들의 의술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민영익을 수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제중원(처음에는 광혜원이라 함)의 설립과 함께 왕실의 의사와 고종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민영익의 치료 과정에서 서양 의학, 특히 외과 의술에 대한 조선인의 호응을 확인한 알렌은 1885127일 민영익을 통해 서양 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의 설립을 조선 정부에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중원 설립의 기초가 된 알렌의 병원 설립안이다.

 

알렌은 병원 설립안에서 설립 목적이 질병 치료뿐 아니라 한국인 의료진 양성임을 밝혔다. 알렌은 해외 선교의 원칙대로 의료와 교육을 앞세웠고, 한국인 의료진 양성이야 말로 의료 선교를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고종의 윤허로 병원의 설립은 빠르게 진행되어 18854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재동(현 헌법재판소 구내)에서 개원하였다. 제중원의 개원은 조선 근대사의 중대한 한 장면이자, 의학사, 교회사, 교육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 역사적 사건이었다

 

고종은 412일 병원의 명칭을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란 뜻으로 '광혜원(廣惠院)'이라 붙였다. 하지만 2주일이 지난 426일 병원의 명칭을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란 의미의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하였다.

 

제중원은 선교사들에게 모든 권한이 위임된 일종의 위탁 경영이었다.

 

조선 정부는 하급 관리를 파견하여 필요한 경비 지원과 함께 의료진을 돕도록 했다. 제중원의 재정도 이원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운영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건물의 수리 비용, 일꾼들의 급료, 장례 비용, 음식비, 피복비, 연료비 등 일반 운영 경비에 해당하는 부분은 주사의 소관이었고, 의약품, 의약 기구, 학교 비품 구입 등 의료와 의학교육에 관련된 경비는 의료선교사의 소관이었으며 외아문에서 직접 받아 집행하였다.

 

조선 정부는 제중원의 개원에 즈음하여 '치료가 어려운 질병이 있는 자는 모두 내원하여 치료받아 국가에서 널리 구제하고자 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할 것'을 알렸다. 제중원은 전통적인 온돌방을 사용하였고, 40병상 수준의 병실과 하루에 외래환자 100명을 치료할 정도의 시설을 갖추었다.

제중원 설립 후 알렌, 헤론, 빈튼이 차례로 책임을 맡았다. 하지만 이들 이외에도 각 선교부에서 파견한 많은 의료선교사들이 제중원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여자 의사인 엘러스(Annie J. Ellers), 호튼이 내한함으로써 제중원에 여성만을 위한 진료를 할 수 있었다.

 

제중원에서의 진료는 그 대상 범위가 매우 넓었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는데, 거지나 나병 환자, 궁중의 높은 양반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같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이는 당시 신분상의 차별과 남녀 간의 차별이 엄존하던 우리나라의 봉건적 관습을 깨뜨리고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알렌이 한국에 온 지 1년이 되었을 때 '(조선은) 사람이 살아보려고 시도한 나라 중 제일 성질나는 곳'이라고 하였으며, '미국인들이 들여온 전차 덕분에 막노동자들까지도 전차를 탈 수 있다'는 우월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1885년 고종은 최초의 서양 병원인 광혜원을 세우고 그로 하여금 서양 의술을 가르치게 하였다. 개신교 선교사인 앨런과 조선왕실과의 친밀한 관계는 개신교가 조선왕조의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들을 낸 가톨릭과는 달리 선교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알렌은 18854월 제중원이 만들어진 이후 동료 선교사들과 불화를 겪으면서 선교활동에 환멸을 느꼈다고한다

 

1887년 참찬관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의 고문으로 미국에 가서 청나라의 간섭을 규명하고 독립국 사신의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등 독립국으로서의 조선의 처지를 국무성에 밝혔다.

 

1890년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어 외교 활동을 했고, 총영사·대리 공사 등을 지냈다.

전임자의 임기가 남았음에도 미국 정치권에 직접 로비를 하여 주한미국공사가 되었을 정도로 정치적 야심이 있었으며, 재직하는 동안 서울의 전기, 전차, 상수도 등의 이권사업이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언한 수완가이기도 하였다.

 

앨런은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한 초기부터 조선 광산의 매장량, 위치 등을 조사했다. 그 광산탐사 보고서를 토대로 평북지방의 운산금광이 노다지 금광인 것을 확인했고, 그 채굴권을 미국회사에 넘겨주도록 조선 왕실에 요청했다.

 

1892년 이래 <코리안 레포지토리>를 간행하고, 1897년 전차·전등 등에 관한 설치권을 미국에 넘겨 주었다.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을 직접 획득해 미국인 사업가들에게 넘겼고, ‘노다지(no-touch)’라는 말을 만들어낸 운산금광채굴권은 40년간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을 채굴해 5600만 달러의 수익을 미국에 건네줬다.

 

또한 앨런은 아관파천을 주선해 친미세력이 대거 등용된 뒤에는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냈는데 두달 만에 일본에 넘기면서 약 200만 원의 차익을 챙겼다. 이어 친미파 세력들이 결집력을 상실하자 미국의 이권에 호의적이었던 친일파 세력들을 간접적으로 후원했고, 일본의 조선지배가 확실시 되었을 때에는 일본에 친미파 인사들의 명단을 넘겨주었고 이들에게 일본에 협력을 권고하였다는 점을 자부했다고 알려졌다.[2] 실제로 또한 미국인 회사들이 조선 관료와 민간인들과 마찰을 겪을 때마다 앨런은 자국민의 권리수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때문에 한미외교관계사 연구가인 손정숙은 앨런을 친한적이라기보다 미국적인 미국 외교관이라고 평가했다

 

1900년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 조선 지부를 결성하여 회보를 발행하는 등 문화 발전에 공로가 있었다. 1902년부터 한국 위보를 간행했다.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 1등과 태극 대수장을 받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실제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경위는 당시 가쓰라-태프트 밀약 에 반대하다가 미국 정부에 의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된 경우이다.)

 

학계에서는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자 앨런이 한국의 독립 보전에 관심이 있었던 친한적 인물이 결코 아니다그의 외교정책의 기본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만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 7명에게 주어진 의사면허 발급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의 제4대 병원장이던 에비슨은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협조를 구했다. 이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는 이들의 졸업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고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17422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5840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B%9F%AC%EC%8A%A4_%EB%89%B4%ED%84%B4_%EC%95%8C%EB%A0%8C

 

https://en.wikipedia.org/wiki/Horace_Newton_Allen



Korean Tales

H. N. Allen

G. P. Putnam's SonsYear

1889

Copyright1889, G. P. Putnam's Sons

Being a collection of stories translated from the Korean folk lore; together with Introductory chapters descriptive of Korea




http://chestofbooks.com/fairy-tale/Korean-2/

에서 모든 TEXT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림은 http://www.amazon.com/gp/product/1421262517?ie=UTF8&tag=theultimatlearna&link_code=as3&camp=211189&creative=373489&creativeASIN=142126251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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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1. 1. 27. 13:25

Things Korean

by Horace Newton Allen, M.D.

Fleming H. Revell Company
1908


아래페이지에서 영인본 모두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archive.org/stream/cu31924023275872#page/n0/mode/2up





























Posted by qlstnfp
2011. 1. 27. 13:03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선교사



알렌의 한자명은 안연(安連).을 사용하였으며 의료선교사로서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884년 9월 우리 나라에 한국에 최초의 장로교선교사로입국하여 미국공사관 의사로 일하던 중 그 해 12월 갑신정변을 만났다.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에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하여 준 것이 계기가 되었고, 우정국사건 3일 후 청·일 충돌에서 부상당한 100여 명의 청병(淸兵)을 치료하여 명성을 높이게 되자 곧 궁중의 전의(典醫)를 겸하게 되었다.


고종은 그의 서양식 병원건립 건의를 받아들여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혁파하여 1885년 2월 29일 광혜원(House of Extended Grace)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한성 재동에 설치된 왕립병원이었다.

처음 명칭은 왕립광혜원(王立廣惠院)이었다.

건물은 이윤용(李允用)의 집(창덕여자고등학교 자리)을 쓰게 하였는데, 이 명칭은 그 사무를 담당하였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계(啓)에 의하여 그 해 3월 12일 제중원(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개칭되었다.

환자의 수가 늘어나서 진료업무가 복잡하게 되자 알렌은 한때 미국 감리교회 선교의 스크랜턴(Scranton,W.B.)의 도움을 받기도 하다가, 곧 추가로 파견된 선교의 헤론(Heron,J.H.)과 함께 진료에 종사하였다.


188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부터 여의(女醫) 엘러스(Elless,A.J.)가 파견되어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왕실 여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


이렇게 제중원의 진료업무가 더욱 번창하자 1887년에는 한성 남부의 동현(銅峴:현 을지로 입구와 2가의 중간, 한국외환은행본점 자리)으로 옮겼는데, 이곳은 갑신정변 이후 몰수한 홍영식(洪英植)의 집이었다.


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떠나게 되자 제중원의 진료업무는 헤론이 전담하게 되었고, 부인부의 여의는 엘러스가 혼인하게 됨에 따라 호르톤(Horton,L.S.)으로 교체되었다.


그 뒤 알렌이 돌아왔으나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으므로 병원진료는 하지 않았고, 1890년 여름 헤론이 병사하자 캐나다에서 다시 파견된 빅톤(Victon,C.C.)이 의료업무를 이어 맡다가 1893년 다시 추가로 파견된 에비슨(Avison,O.R., 魚丕信)에게 인계되었다.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L.H.)의 재정지원으로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에비슨에 의하여 1899년 제중원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편되면서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제중원은 진료활동 외에도 1886년 3월에는 조수 양성을 위하여 16명의 학생을 뽑아 의학교육을 실시한 바 있는데, 고종은 이들 미국 의사들의 공로를 치하하여 1886년 5월에 알렌과 엘러스에게 각각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을 내렸으며, 그 해 9월에 알렌에게, 이듬해 11월에 엘러스에게도 각각 그 품계의 벼슬을 특별히 내렸다.



1887년 참찬관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의 고문으로 미국으로 파견이 되었다가 대한제국에 대한 청나라의 불법적인 간섭을 미국무성에 알리고,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다시 내한하여 외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92년 [한국휘보 The Korean Repository]를 창간하였으며,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일등및 태극대수장을 받은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귀국했다. 그의 주요저서로는 [Korean Tales], [Things Korean], [The Awakening of Korea]가 있습니다.

Posted by qlstnfp
2011. 1. 26. 15:44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 Dec. 5, 1832; died Sept. 19, 1903)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으로 중국 상해에서 일을 하고 있던 상인이었다.


그는 아직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있는 조선과 통상을 하여 일확천금을 얻고자 몇 차례 내항하였다. 고종 3년(1866) 2월 영국 상인의 도움으로 영국 상선 토니호를 이용하여 해미현 서면 조금진 근처에 정박하였으나 통상에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갔다. 이처럼 1차내항에 실패한 오페르트는 그해 6월 26일 엠페리호를 타고 조금진에 이르렀으나 또 실패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조선 항해가 실패로 돌아간 뒤 2년 후 (1868) 고종 5년에 제 3차 항해를 계획하게 된다.

1868년 4월 제3차 한반도답사를 계획, 한때 상하이 미국영사관에 근무한 미국인 모험가 F.젠킨스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하여 차이나호(號)에 백인 8명, 말레이시아인 20명, 한국 천도교인 약간 명, 청국인 승무원 약 l00여 명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항, 충청도 홍주군 행담도에 도착하였다.

행담도에 도착한 오페르트는 북독일연방(北獨逸聯邦)의 국기를 게양하고 소증기선 그레타호에 옮겨타고 삽교천으로 올라와 덕산군 고덕면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덕산 군수 이종신등이 침입의 이유를 물어도 답하지 않고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면서 함부로 총칼을 휘둘러 지방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다음, 덕산 관아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어 어둠을 타서 덕산 가동(伽洞)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및 몇몇 주민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무장한 서양인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주민들이 몰려오며 내하(內河)의 퇴조(退潮)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관곽(棺槨)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2일간에 걸친 이 사건이 관찰사 민치상(閔致庠)에게 알려지자 즉시 군관 100여 명을 출동시켜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한편, 오페르트는 경기도 영종진 앞바다로 북상하여 영종도에 상륙하려 했으나 그곳 주민과 군인들의 저항으로 2명의 시체를 남기고 퇴각해 버렸다.

곧 충청도 관찰사 민치양은 이사건을 대원군에게 보고하였고, 이 보고를 접한 대원군은 크게 격분하여 서양 세력을 추격 궤멸하라는 엄명을 내리게 되었고 천주교도들과의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천주교도들의 색출과 처단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을 내고 말았으나, 국제적으로도 물의을 일으켜서 미국인 젠킨스는 불법파렴치로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 버렸다.

이들의 항해목적은 뒷날 젠킨스가 이 사건으로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의하면, ① 조선왕국과 통상조약의 체결을 교섭하는 것, ② 조선의 사신 1명을 배에 태워 세계일주여행을 시키자는 것, ③ 이와 같이 하여 은둔국인 조선을 세계에 소개하자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다.


미국인 역사가 그리피스(1843-1928)의 저서 "은둔국 한국"에 보면 한국인들은 외국인이 이 땅에 침입하려는 주목적이 시체를 강탈하고 가장 신성시 하는 인간의 본성까지 유린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목전에서 생생하게 확인하게 되었다. 결국 외국인은 모두 야만이요, 그들의 대부분은 절도나 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국인들은 믿게 되었다."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오페르트의 도굴사건으로 인해 조선인들은 외국인들에 대한 증오가 커지게 되었고, 그들을 배척하는 사상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A Forbidden Land: Voyages to the Corea


Published 1880



http://j.mp/hxSGYd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