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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濟物浦)는 구한말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던 인천의 별칭(別稱)이다.
http://news.joins.com/article/567/4044567.html?ctg=1200&cloc=home|list|lis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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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俄館播遷)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자 고종은 친일 세력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틈을 노리던 고종
당시 일본과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1896년 2월 11일 심야에 세자(순종)와 함께 궁녀처럼 변장하고 경운궁(덕수궁의 옛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을 빠져나온 두 대의 가마는 1896년 2월 12일 오전 7시30분, 러시아공사관에 숨어들었다.
러시아 해군대령 몰라스가 이끄는 100명의 수병과 60명의 육군이 공사관을 호위했다.
이범진을 중심으로 한 친러파와 엄 상궁, 러시아공사의 합작품이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파천 당시에는 “파천”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나중에 붙인 명칭이다.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고종과 세자는 아라사 공사관 즉,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http://hime01.egloos.com/6516897
고종은 옮긴 당일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유길준, 어윤중, 조희연, 장박, 정병하, 김종한, 허진, 이범래, 이진호를 면직하고, 유길준 등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김홍집과 정병하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어 김병시를 내각총리대신에 명하는 등 내각 인사를 새로 하였다.
박정양과 이범진·이완용 등의 친러파 내각이 들어섰다.
공사관 측은 고종에게 방 2개를 내주었고 각부 대신들은 병풍을 치고 임시사무실로 사용했다. 러시아 제국 국기가 게양된 이곳에서 국사가 행해졌다.
고종의 공사관 생활은 수인(囚人)과 다름없었다.
경비를 맡은 러시아군은 대포까지 끌고 와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일본군과 대치하기도 했다. 고종은 비좁은 방에서 집무하다가 공사관 뜰을 관망했고 이따금씩 두려움에 떨며 이웃한 경운궁의 노대비(명헌 태후)를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미국 사진작가 잭슨(W.H. Jackson)이 1896년 찍은 사진에는 러시아공사관 동북쪽 후문에서 덕수궁으로 이어진 돌담길이 보인다. 고종은 이 길로 경계를 갖추고 노대비를 예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2180189
나라가 백척간두였던 시절, 고종은 러시아 측이 제공한 커피『노서아 가비(露西亞加比ㆍ러시아 커피의 음역)』를 마시면서 두려움과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고종은 커피의 쓴맛과 검은 색깔 때문에 이를 보약으로 생각했다는 말도 있다. 매일 대접에 담아 한 번에 들이켰다는 것이다. 반면 고종이 커피 향을 음미하고 마셨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임금이 커피를 즐기면서 한반도에 커피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리라.
커피는 고종과 황태자(순종)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했다.
바로 김홍륙의 독다(毒茶) 사건(1898년)이 그것이다. 당시 고종의 러시아어 통역 담당이었던 김홍륙은 러시아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다. 고종이 거액을 착복한 김홍륙을 유배 보내려 하자 그는 앙심을 품고 1898년 고종의 생일 만찬에서 고종과 황태자가 마실 커피에 독약을 탔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김홍륙은 원한을 품고 어전에서 음식을 담당하던 김종화를 매수해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독약을 타도록 꼬드겼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셨던 고종은 한 번 마시고 토해 냈지만, 맛을 구분하지 못하던 황태자는 맛을 보다가 복통과 어지럼증으로 쓰러졌다.”
이 사건으로 나중에 ‘조선 최후의 왕’이 된 순종의 몸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
베베르 공사는 수시로 고종과 독대하며 국사를 좌지우지했다.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경원·종성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 시베리아 연결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수많은 이권사업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이에 구미 열강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해 경인·경의선 철도부설권 등 큰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고종은 아관파천 기간 동안 엄 상궁과의 사이에서 마지막 황태자 이은(李垠)을 낳는다.
공교롭게도 황태자의 이름 은(垠) 자가 끝 혹은 낭떠러지를 뜻하는 글자다.
그러나 러시아는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에 일본과 가까워지며,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정을 맺는다.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을 받는다.
또한 러시아는 경원과 경성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과 같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다.
환궁을 요구하던 친일파(개화파)들..
차일 피일...덕수궁의 궁전이 보수돼면 가겠다 핑계를 대다
결국 1897년 2월 25일,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12일 오전 2시에 황제 대관식을 거행한다. 국방력도 외교력도 없는, 지상에서 가장 초라한 대한제국의 탄생이었다.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자주적이지 못한 외세 지향의 행동이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상황의 논리”와 그 주체적 의도를 높이 봐야 한다는 평가가 대립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C%95%84%EA%B4%80%ED%8C%8C%EC%B2%9C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 불과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고종이 경운궁의 수리를 명했다는 점을 들어 아관파천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아관파천 이후의 계획이 이미 준비되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 우리의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기셨습니다. 신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자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주러 한국공사 이범진(李範晉:1852~1911)이 고종에게 남긴 유서다. 그는 1911년 1월 13일 낮 12시, 거실에서 천장 전등에 밧줄을 매달아 자결했다. 밧줄로 목을 맨 상태에서 권총으로 3발을 쐈으나 탄환이 벽과 천장을 향해 빗나갔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잠들어 있다.
병인양요 때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경하의 서자 이범진은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다. 미국특명전권공사를 거쳐 1901년 3월 러시아 상주공사로 임명됐다. 을사늑약 후 일본 외무성이 한국 공관들을 폐쇄 조치했으나 이 공사는 끝까지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고종의 밀사 이준과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그를 찾았을 때 이범진은 탄원서 작성을 도왔고 둘째 아들 이위종을 통역으로 동행시켰다. 프랑스 샹생 육군사관학교에 다닌 이위종은 영어·프랑스어·러시아를 구사하는 최고의 엘리트로서 러시아의 귀족 놀켄 남작의 딸 엘리자벳과 결혼했다. 훗날 생활고와 울분에 시달리던 이위종은 엘리자벳과 이혼한 뒤 독립운동에 전념했지만 러시아 당국에 의해 추방당했다. 이름을 바꾸고 시베리아를 떠돌던 그는 행적이 묘연하다.
고종은 전주 이씨인 이범진 공사를 조카라고 부르며 ‘짐이 죽은 뒤에도 러시아에 남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편지를 보낸다. 이 공사는 조국으로부터 재정 지원이 끊긴 뒤에도 비서와 함께 어렵게 생활하면서 조국 독립을 도왔다. 항일 언론의 모태 ‘해조신문(海朝新聞:주필 장지연)’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되자 지원금을 보냈고 연해주 의병 투쟁 조직 ‘동의회’에 1만 루블을 지원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사재를 정리해 각지에 후원금으로 보냈다. 미주 지역과 하와이, 연해주 등을 가리지 않았다. 장례비로 5천 루블만 남겨 둔 상태라서 옷이나 시계 등 가재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려 쓰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범진 공사는 아관파천을 주도해 나라의 이권을 러시아에 넘긴 친러파로 낙인이 찍혀 있다. 하지만 그가 택한 의로운 죽음은 책임 있는 관료의 전범(典範)이자 그의 허물을 상쇄해 주는 행적이다. 『주역』 ‘대과(大過)’괘 효사에 ‘과섭멸정(過涉滅頂)이니 흉하나 허물이 없다’고 했다. 목숨은 하나다. 범속한 소인들은 목숨에 연연하지만 대인은 죽음 앞에서도 떳떳한 도리를 생각한다. 나라를 빼앗기는 암흑의 시대를 만나 물에 빠져 죽는 처지에서도 그는 허물없는 군자의 삶을 택했다. 59세 때였다. 조선 왕조가 망했지만 책임 있게 행동한 지도층은 얼마 되지 않는다. 국치 100년을 맞아 우리가 이범진 공사의 죽음을 기려야 할 이유다.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2/08/3620840.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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