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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5.10 인천해관
  3. 2011.05.06 전차 (電車)
  4. 2011.02.16 Angus Hamilton이 본 구한말 - Korea -
2011. 5. 10. 16:22

한국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

1892년에 설립된 사립학교 영화학당.

이화학당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던 마거릿 벤젤이 인천에 정착하여 여자 어린이 교육을 시작한 것이 영화학당의 시작이다. 벤젤은 인천 내리교회 제2대 담임 존스 목사와 결혼하여 존스 부인으로 불렸다.

1892

영화학당은 1892년 8월에 내리교회 안에 설립되어 교육에서 배제되어온 여자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출발하였다.

초기에는 선교사에 대한 배타적인 의식으로 학생 수가 거의 늘지 않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점차 인천의 명문 학교로 발전하여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서울의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데 반하여 영화초등학교는 초등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학교를 졸업한 여자 어린이들은 선교사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기도 했다.

이화학당 제1세대로 한국 여성계의 선구자인 김활란, 서은숙, 김애마, 김영의가 모두 영화학당 출신이다. 그러나 영화초등학교에 이들의 학적부는 남아있지 않다. 그밖의 유명한 영화학당 졸업생으로는 일장기 말소 사건의 동아일보 기자 이길용과 영화배우 황정순이 있다.


1910


1916

1928

1930


1936

1936


1948
http://db0353.blog.me/1008820561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yberali&logNo=80056043055&categoryNo=35&viewDate=&currentPage=1&listtype=0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36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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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1. 5. 10. 16:18

인천이 강제개항되던 해인 1883년 인천해관은 부산해관(1878년 설립)에 이어 국내에서 두번째로 설립됐다. 인천해관은 그러나 설립 초기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미군정 시절까지 64년 동안 외국인들이 세관장을 맡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http://inchon.edukor.org/i_6/in6_4.htm


http://ecustoms.tistory.com/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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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1. 5. 6. 15:51


전차 (電車)


1899년 음력 4월 초파일, 돈의문(새문)에서 종로를 거쳐 동대문밖 청량리까지 길게 이어지는 전차선로의 개통식이 있었다.


조선 황실이 단독 출자해 세웠지만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이 운영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성전기회사가 당시 한성(서울)에 전차사업을 추진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서울에 대중교통 수단이 없었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이 황후의 능인 청량리 홍릉(현재는 경기도 금곡으로 이장)에 행차할 때마다 10만원의 비용이 들었는데, 전차를 타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과 보스트윅이 고종에게 접근, 전차를 가설하면 행차 비용도 절감되고 백성들도 편리하게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한다. 솔깃한 고종은 전차 설치를 허락한다.

낙성대경제연구소(소장 이영훈)에 따르면 당시 10만원은 80㎏ 쌀 1만 가마 이상을 살 수 있는 돈이다.


경성에서 전기철도를 부설하려고 해도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교토전철의 설계자였던 미국공학사 남작 마키 헤이이치로(眞木平一郞)씨에게 위촉했고, 마키씨는 역시 미국공학사인 오하타 코우노스케(大圃孝之助)씨와 이시쿠마 노부노유(石외信乃雄)씨 기타 2명을 동반하여 명치 31년(즉 1898년) 10월 경성에 도착하여 마키 남작은 설계에, 오하타 이시쿠마 양씨 기타는 실무를 담당하였다.


기공식은 1898년 9월 15일 경희궁 앞에서 열렸다.


서대문, 홍릉(청량리) 간의 단선궤도부설(單線軌道敷設)과 더불어 가선공사(架線工事)에 착수했고 동년 12월 25일에 준공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동대문 내에 발전소용지를 선정하여 동 12월부터 기초공사를 착수하였으나 때마침 혹한이 있을 때에 공사가 여의치 않았지만 마침내 다량의 목탄을 태워 현동소설(玄冬素雪)의 가운데 공사를 마쳐 75킬로 직류 600볼트 1백마력 기기(汽機) 매킨토시식 보일라 바브코크식 등을 설치하고 전차의 조립 등도 마쳤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발행한 <경성전기주식회사 20년연혁사> (1929)

운전수는 전부 교토전철(京都電鐵)에서 경험을 가진 일본인들로만 초빙하였다.




1899년 4월 26일 콜브란이 사회 저명 인사에게 보낸 초청장에는 ‘대중이 익숙해질 때까지 전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5마일(8㎞)로 운행할 것이며, 그 뒤로도 시속 15마일(24㎞)은 초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 있다.

전차는 5월 4일 오후 3시 동대문 경희궁 흥화문 간 첫 운행에 성공했으며,

1899년 5월 17일(음력 사월 초파일), 서대문∼청량리 간을 잇는 전차 개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귀족·고관·각국 사신 등을 태우고 화려하게 장식된 전차가 줄지어 “댕 댕”거리며 종로거리를 지나자 이 ‘기묘한 괴물’을 지켜보려는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전차 구경가세!"1899년 5월 4일 오후 3시 우리나라 최초로 도입된 전차의 개통식을 구경하기 위해 동대문에 구름처럼 모인 당시 한성 백성들. 동대문 아래쪽에 지붕을 세운 건물은 전차 보관소이다. 사진제공=김영준씨



전차 개통식을 구경하기 위해 동대문 성곽 아래쪽에 모인 백성들과 미국인들. 전차는 미국의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해 제작돼 개통식장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걸려 있다.


5월 20일부터는 정상 운행에 들어갔다.


처음 투입된 전차는 모두 9대, 1대는 황실 전용이었다. 정차장은 없었고 사람이 손짓하면 아무데서나 멈췄다. 전차를 타기 위해 일부러 시골에서도 올라올 만큼 인기를 끌다보니 전차를 타는 것도 쉽지 앉았다. 어렵사리 승차한 사람도 내릴 생각은 않고 종일 타고 다녀 전차 속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탑승객이 증가하면서 노선도 종로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1899년), 다시 남대문에서 용산까지(1900년 1월) 연장됐다.--서울시가 발간한 ‘서울 600년사(史)’

당시 독립신문 등에 따르면 전차는 정거장이 없이 손을 흔들어 탈 수 있었고, 5세 이하는 무료였다. 요금은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상등칸은 엽전 3전5푼, 하등칸은 1전5푼으로, 당시 쌀 1㎏ 가격이 4~5전인 점으로 미뤄 요금은 비싼 편이었다.


개통 초기 전차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일단 타면 동대문과 서대문 사이를 왕복하면서 좀처럼 내리지 않았고, 전차만 타다가 재산을 탕진한 사람도 있었다고 당시 신문들은 기록하고 있다.





정원은 40명 가운데는 양반의 특실















그러나 개통 직후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장안에서는 전차 때문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개통 1주일째 되던 1899년 5월 26일 파고다공원 앞에서 어린이 한 명이 전차에 치여 죽게 되자 전차에 대한 군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 이른바 전차소타사건(電車燒打事件)-


군중은 전차를 세운 뒤 일본인 운전사와 차장에게 뭇매를 가하는 등 폭동을 일으켜 전차는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 바람에 일본 교토전기철도에서 데려온 운전수와 기술자들이 신변보호문제로 5월 중순 일제히 파업 귀국하는 바람에 전차의 운전은 불능상태가 되고 전차는 3개월 가까이 운행을 멈추었다.


광복 후 23년간이나 대중의 발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바야흐로 전차의 시대는 가고 있었다. 1968년 11월 29일, 69년 6개월 12일 만에 마지막 전차가 왕십리를 떠났다.






























출처 : 조선일보.2003.05.16.김정형기자 jhkim@chosun.com ) 조선일보.2004.05.18.신형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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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1. 2. 16. 12:18

Angus was a historian who lived in Korea from the late eighteen hundreds until the end of 1903. He was there during a period of great upheaval when Korea was influenced from internal and external entities. Angus took it upon himself to write exclusively about what was happening in Korea. He saw the influences of America, France, England, Russia, China, Japan and other countries as well as the development internally with the intrigue of certain of the Korean ruling class as well as the King and Queen. A fascinating look at Korea, and interesting to read considering his time there being before the colonization by Japan so he doesn't look upon Japan's influence for what it was, a prelude to their invasion.


NY타임즈에서http://j.mp/eppmy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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