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27. 13:03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선교사



알렌의 한자명은 안연(安連).을 사용하였으며 의료선교사로서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884년 9월 우리 나라에 한국에 최초의 장로교선교사로입국하여 미국공사관 의사로 일하던 중 그 해 12월 갑신정변을 만났다.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에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하여 준 것이 계기가 되었고, 우정국사건 3일 후 청·일 충돌에서 부상당한 100여 명의 청병(淸兵)을 치료하여 명성을 높이게 되자 곧 궁중의 전의(典醫)를 겸하게 되었다.


고종은 그의 서양식 병원건립 건의를 받아들여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혁파하여 1885년 2월 29일 광혜원(House of Extended Grace)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한성 재동에 설치된 왕립병원이었다.

처음 명칭은 왕립광혜원(王立廣惠院)이었다.

건물은 이윤용(李允用)의 집(창덕여자고등학교 자리)을 쓰게 하였는데, 이 명칭은 그 사무를 담당하였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계(啓)에 의하여 그 해 3월 12일 제중원(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개칭되었다.

환자의 수가 늘어나서 진료업무가 복잡하게 되자 알렌은 한때 미국 감리교회 선교의 스크랜턴(Scranton,W.B.)의 도움을 받기도 하다가, 곧 추가로 파견된 선교의 헤론(Heron,J.H.)과 함께 진료에 종사하였다.


188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부터 여의(女醫) 엘러스(Elless,A.J.)가 파견되어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왕실 여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


이렇게 제중원의 진료업무가 더욱 번창하자 1887년에는 한성 남부의 동현(銅峴:현 을지로 입구와 2가의 중간, 한국외환은행본점 자리)으로 옮겼는데, 이곳은 갑신정변 이후 몰수한 홍영식(洪英植)의 집이었다.


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떠나게 되자 제중원의 진료업무는 헤론이 전담하게 되었고, 부인부의 여의는 엘러스가 혼인하게 됨에 따라 호르톤(Horton,L.S.)으로 교체되었다.


그 뒤 알렌이 돌아왔으나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으므로 병원진료는 하지 않았고, 1890년 여름 헤론이 병사하자 캐나다에서 다시 파견된 빅톤(Victon,C.C.)이 의료업무를 이어 맡다가 1893년 다시 추가로 파견된 에비슨(Avison,O.R., 魚丕信)에게 인계되었다.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L.H.)의 재정지원으로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에비슨에 의하여 1899년 제중원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편되면서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제중원은 진료활동 외에도 1886년 3월에는 조수 양성을 위하여 16명의 학생을 뽑아 의학교육을 실시한 바 있는데, 고종은 이들 미국 의사들의 공로를 치하하여 1886년 5월에 알렌과 엘러스에게 각각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을 내렸으며, 그 해 9월에 알렌에게, 이듬해 11월에 엘러스에게도 각각 그 품계의 벼슬을 특별히 내렸다.



1887년 참찬관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의 고문으로 미국으로 파견이 되었다가 대한제국에 대한 청나라의 불법적인 간섭을 미국무성에 알리고,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다시 내한하여 외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92년 [한국휘보 The Korean Repository]를 창간하였으며,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일등및 태극대수장을 받은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귀국했다. 그의 주요저서로는 [Korean Tales], [Things Korean], [The Awakening of Korea]가 있습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