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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29 전후 문학의 세대 논쟁
  2. 2015.07.29 4·19 혁명, 4월혁명
  3. 2015.07.29 한국전쟁의 해석
  4. 2015.07.29 맥아더 재평가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2015. 7. 29. 11:09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1) 전후 문학의 세대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6162210495&code=210100&med_id=khan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논쟁이 시들해졌다.

논쟁이 없었다는 게 아니다. 논쟁은 진행돼 왔으되 그 치열함이 약화됐다는 의미다.

 

왜일까.

한편으론 그만큼 우리 문화가 세련되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문화 내 소통이 활기를 잃은 까닭도 있다. 사회의 제도화와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논쟁이 부드러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논쟁은 치열할 때 그 쟁점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 선명성은 생각의 넓이와 깊이를 더하게 한다.

 

광복 70년을 돌아보면 지금보다 과거의 논쟁이 훨씬 격렬했다.

좋게 말하면 거침이 없었고, 나쁘게 얘기하면 공격성이 두드러졌다.

초점에서 벗어나 지엽적 문제에 매몰되기도 했고, 때로는 인신공격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렇게 치열한 논쟁은 특히 그 구도가 이념과 세대에 기반을 뒀을 때 더욱 분명한 형태를 띠었다.

한국현대사에서

해방 공간의 논쟁 구도를 이룬 축이 이념이었다면,

1950년대 전후 시대의 논쟁 구도를 형성한 전선은 세대였다.

 



전후세대 문학 논쟁을 주도했던 김동리, 조연현, 서정주, 유종호, 김우종, 이어령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동리와 이어령의 논쟁

 

1950년대 세대 논쟁의 주역은 단연 이어령이었다.

 

전쟁의 폐허가 복구되기 전인 1956<우상의 파괴>로 혜성처럼 나타난 이어령은 조연현, 염상섭, 김동리와 세대 논쟁을 벌임으로써 전후 신세대를 대변하는 존재로 부상했다.

<우상의 파괴>, <화전민 지역>(1957), <저항의 문학>(1959)이라는 패기만만한 제목들이 보여주듯 20대 청년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문단의 배덕아이자 신세대의 총아였다.

 

4월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1959년에 전개된 김동리와 이어령의 논쟁은

1950년대 세대 논쟁의 대표격이었다.

이 논쟁은 두 사람이 당시 신구세대의 전형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소설가 김동리는 시인 서정주, 문학평론가 조연현과 함께 문학적 권위그 자체였다.

해방공간에서 그는 좌파에 맞선 우파의 대표 작가이자 이론가였던 동시에 한국전쟁 이후에는 문단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군림했다.

 

반면 이어령은 막 대학을 졸업한, 시적 감수성으로 빛나는 문체를 구사한 20대 중반의 신예 문학평론가였다.

 

구세대와 신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떠들썩하게 제대로 좌판을 벌인 논쟁이었다.

 

논쟁은 이렇게 진행됐다.

 

19591월 서울신문에 김동리가 본격 작품의 풍작기라는 글을 통해 신진평론가들의 비평 태도를 비판하자,

신진평론가였던 김우종이 중간소설을 비평함이라는 글을 통해 김동리를 반비판했다.

이에 김동리가 논쟁 조건과 좌표 문제라는 글을 통해 김우종을 재비판하자,

이번에는 김동리의 글에 언급된 이어령이 2월 경향신문 지면에 영원한 모순-김동리씨에게 묻는다라는 글을 발표해 김동리를 비판했다.

여기에 김동리가 좌표 이전과 모래알과-이어령씨에게 답한다라는 글을 통해 이어령을 반비판하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치열한 논전이 오갔다.

 

이 과정에서 문학평론가 원형갑·이철범, 소설가 박영준 등이 가세함으로써 김동리와 이어령의 논쟁은 문학을 포함한 문화계 전반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논쟁 과정과 방식은 화려했지만,

그 쟁점과 내용은 빈곤했다.

 

논쟁의 핵심은 김동리가 지성적’, ‘실존성’, ‘극한의식이라고 몇몇 작품을 규정한 것이 과연 온당한가에서 시작됐다.

전체적으로 김동리는 신진평론가들의 미숙한 한국어 문장을 비판한 반면, 이어령은 지식의 정확성에 주목해 기성 작가들을 비판했다.

 

1976년 언론인 손세일이 편집한 <한국논쟁사 2: 문학·어학>에 실린 관련 글들을 읽어보면 논리 대결보다는 용어 해석을 둘러싼 감정 대립이 앞선 논쟁이었다.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신구세대의 일대 격돌이라기보다는 소문만 무성한 잔치에 가까운 논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이 경향신문 1959년 2월9일자 4면에 기고한 ‘영원한 모순-김동리씨에게 묻는다’.



세대 논쟁의 현재적 의미

 

이 논쟁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어령, 김우종, 유종호 등으로 대표되는 전후 신세대의 문제제기다.

 

그때 나는 22세라는 젊음의 재산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 가진 것이라고는 분노와도 같은, 자기(自棄)와도 같은, 광기(狂氣)와도 같은 젊음의 반역뿐이었다. 홀몸이었다. () 구세대의 작가나 비평가는 그 어려운 시절에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이 붙은 집에서 바둑을 두고 포탄이 터지는 전선에서 자장가를 노래하는 사람같이 보이기만 했다.”

이어령이 <저항의 문학>(증보판, 1965)에서 한 말이었다.

 

논쟁의 범위를 넓혀보면 이어령은 한국적 전통이라는 특수성을 넘어서 인류적 보편성을 위한 문학 본연의 의미와 역할을 묻고 있었다.

 

1950년대 당대로 돌아가면 선배세대가 모두 직무유기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황순원과 안수길의 소설, 김광섭과 김현승의 시에서 볼 수 있듯,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현실과 역사, 삶과 사회에 대한 성찰들은 계속 이뤄지고 있었다.

 

이어령의 비판이 겨냥했던 것은 권력화된 문단, 무엇보다 기성세대의 빈곤한 문학적 통찰과 상상력이었다.

 

한국전쟁은 세계적 시간과 한국적 시간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했고,

시인 김수영이 고백했듯 거미처럼 까맣게 타버린 설움을 느끼게 했다(<거미>, 1954).

폐허와 절망의 현실에서 후배세대가 선배세대의 문화 권력을 비판하고 새 문학적 꿈과 힘을 치열하게 모색하려 했던 것은 자연스럽고 소망스러운 일이었다.

 

세대 논쟁의 이중적 의미

 

첫째, 세대 논쟁은 본디 인정투쟁(recognition struggle)’의 성격을 갖는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학문이든 이른바 체계화된 지식은 사회 변화에 대응하며 발전한다. 이 발전은 새로운 논리로 무장된 후배세대가 낡은 논리에 사로잡힌 선배세대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다시 말해 인정을 요구하는 방식을 취한다. 선배세대의 논리가 언제나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세대 논쟁은 결과적으로 그 사회의 문화적 사유와 상상력을 풍요롭게 했다.

 

둘째, 과거의 논쟁에 비교해 오늘날의 세대 논쟁은 그 활력을 크게 잃은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초반에 진행된 신세대 논쟁이후 사회적 관심을 크게 모은 세대 논쟁은 거의 없었다.

그 일차적인 까닭은, 젊은 세대가 앞선 세대에 도전하기에는 기성 권력과 구조에 과도하게 포위되고 속박돼 있다는 데 놓여 있다.

구조화된 청년 실업과 한층 제도화된 문화 권력의 현실은 1950년대 전후세대처럼 젊은 패기를 발휘하라고 선뜻 말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역사 발전이 도전과 응전으로 이뤄지듯, 문화적 성숙은 젊은 세대의 도전과 앞선 세대의 응전을 통해 성취된다. 바람직한 세대 논쟁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이런 포위되고 속박된 젊음을 기성세대가 먼저 풀어줘야 할 것이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서문에 새 공화국 사는 보람4·19 혁명 경험, 전후세대의 문제의식 표출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

<광장>196010월 이어령이 편집을 맡고 있던 잡지 새벽에 발표된 중편소설이다.

그가 <광장> 초판 서문에 쓴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라는 진술은 당시 전후세대의 문제의식을 집약한다.

 

구정권은 이승만 정권을, ‘빛나는 44월혁명을 뜻한다.

 

최인훈은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에서, 이후에는 남한에서 살아온 그는 분단 상황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체험했고, 이를 고스란히 <광장>에 담았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사멸했습니다. ()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명준이 북한에서 발견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명준을 통해 진술된 남과 북의 모습은 광복 이후 한반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광장 없는 밀실’(남한)밀실 없는 광장’(북한)은 광복 이후 1950년대까지 한반도에 존재한 두 자화상이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명준은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중립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자살을 감행한다.

이런 소설의 결말은 1950년대 우리 사회에서 중도의 비극을 함의한다.

최인훈은 현실의 좌파와 우파로부터 모두 벗어나려는 자유주의를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의 전후 현실에서 이 자유주의는 그 어디에도 닻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젊은 세대의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고통스러운 열망의 끝에 최인훈이 빛나는 4이라고 부른 19604월혁명이 존재했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Posted by qlstnfp
2015. 7. 29. 11:08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0) 4·19 혁명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092139095&code=210100





 

한국 사회와 같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는 전 세계에 몇 개 국가밖에 없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빠르고 효율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민주화로 대표되는 사회·정치적 발전이 그 주요 요인이다.

 

게다가 인민의 세기(people’s century)’라고 불리는 20세기를 통해 시민사회의 힘으로 세 차례에 걸쳐 정부를 바꾼 나라는 없다.

아래로부터의 세 차례에 걸친 변화는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전쟁을 겪고 나서 30년 내에 일어났다.

 

정부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과대화라고 해야 하는가?

그런 연유로 외국의 학자들은 한국 사회를 분석하면서 강한 국가, 논쟁적인 사회(strong state, contentious society)’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강한 정부가 있으면 시민사회는 약해야 하는데, 강한 정부와 시민사회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맨 앞에 1960년의 4·19가 있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시민사회가 제대로 자리매김하기도 전에 일어난 4·19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19603·15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이 난무하자 일어난 학생과 시민들은 일주일간의 항쟁을 거쳐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산에서 아시아 최고를 자랑했던 자신의 동상이 무너지는 것을 뒤로하고 하와이로 떠나야 했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서울 시민들이 계엄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승만 대통령이 4·19 혁명 이후 하야 성명을 발표한 뒤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는 사실을 특종보도한 경향신문 1960년 5월29일자 1면.




4·19는 한국 민주주의의 꽃으로 3·1 운동과 함께 헌법 전문에 수록됐다.

한국의 민족주의적 정신은 3·1 운동으로부터, 민주주의 정신은 4·19로부터 비롯됐다. 독재정부하에서도 그 기념식을 금지하지 못할 정도로 4·19의 정신과 성과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 5·16 쿠데타 세력들도 4·19의 민족정신을 이어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5년 교과서포럼

 

그런데

2005년 교과서포럼이 조직돼 4·19에 대한 재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4·19에 대한 논란이 시작됐다.

 

교과서포럼은 한국사 교과서들이 4·19를 혁명, 5·16을 군사정변으로 규정한 것을 좌편향으로 보고, 4·19를 학생의거, 5·16을 혁명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19를 기념하는 단체들의 강한 반발 속에서 2006년 교과서포럼은 <새로운 한국근현대사> 편집본을 냈다. 교과서포럼은 같은 해 1130<새로운 한국근현대사> 편집본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했고, 급기야 4·19 관련 단체들이 토론장에 들이닥쳐 토론회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들은 혁명을 학생운동으로 폄훼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4·19를 둘러싼 논란이 5·18 광주민중항쟁의 성격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여론이 악화되자

 

뉴라이트에서는

같은 해 1130일 성명을 발표했다.

 

교과서포럼은 우리들의 자매단체라고 전제하면서,

“5·16은 결과적으로 산업화를 성공시킨 세력의 탄생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재해석될 수는 있어도 쿠데타였다는 그 집권 과정의 문제점이 가려져서는 안되며” “4·19는 헌법 전문에 그 중요성이 적시돼 있듯이 당연히 혁명으로 표기되어야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아울러 교과서포럼에 의한 사태는

교과서포럼 구성원들의 다수 의견과도 배치되는 일부 소수자들의 사견이 충분한 내부 의견수렴 과정 없이 마치 조직의 입장인 양 유포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하면서 이번 사안은 결코 뉴라이트의 공식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발을 뺐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4·194·19 혁명 또는 4월 혁명으로 규정됐다.

 

이 혁명이 미완의 혁명인지 아니면 실패한 혁명인지, 혁명이 본격화된 일자로 규정할 것인지, 아니면 19604월에 일어났던 모든 항쟁을 묶어서 4월 혁명으로 할 것인지에 논란이 있지만,

이 사건을 혁명으로 규정하는 데 있어서는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고 있다.

 

혁명이라는 것이 단기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19604월의 항쟁을 혁명이라고 규정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승만 정부 붕괴의 가장 중요한 원인에 대한 논쟁.

 

큰 틀에서 봤을 때 이승만 대통령 하야의 가장 큰 요인이 3·15 부정선거 이후 김주열 사망 사건, 대구 학생시위, 그리고 4·18에서 4·19로 이어지는 학생들의 항거와 이에 대한 시민의 지지에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미국의 개입이 미쳤던 영향에 대한 평가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물러나겠다고 선언하기 전에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시민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의 경무대 방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과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은

전자의 만남을 강조한다. 주변의 간신들로 인해 419일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점차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됐고, 시민·학생 대표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결국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미국의 개입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판단은 다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기 전날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와이로 망명한 이후에도 19603월과 4월에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정부의 발표와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모든 시위는 공산주의자들이 조종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정부는 경찰과 군을 동원해 피의 4을 만들었다.

경찰과 달리 군은 시민의 편에 섰지만, 경무대에 남아 있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편지를 보면 419일 이후에도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미 국무부의 문서를 보면

매카나기 대사는 미국이 당시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이것이 곧 대통령 하야의 결정적 요인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면, 이승만 정부의 붕괴는 어쩌면 1952년 부산 정치파동부터 계속됐던 이승만 제거계획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도 있다.

미국과의 환율논쟁이 결국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4·19 정신은 한국 사회의 하나의 소중한 자산

불의를 참지 못했던 한국 전통의 선비정신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조금씩 사그라들었던 민주주의의 소중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헌법 전문에 규정되어 있는 4·19 정신은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5·186·10을 거쳐 지금도 4·19 혁명이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950년대 한·미 간 환율논쟁

, 원조 감축 위해 원화 평가절하 요구

 

1950년대 한·미 간의 가장 큰 불화는 환율논쟁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원조를 얻고자 했던 이승만 정부와 원조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아이젠하워 정부 사이에 환율을 어떻게 정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인위적으로 환화의 평가절상을 통해 저환율을 유지하려고 했고, 미국 정부는 시장에서의 실질환율을 적용해 평가절하를 통해 고환율을 적용하고자 했다.

 

미국은 1954년 한·미합의의사록에 근거해 한국군 유지를 위한 비용을 한국 정부에 제공해야 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넘겨주는 대신 한국 정부에 약속한 것이었다. 그런데 환율이 낮게 책정된다면 미국은 한국 정부에 더 많은 원조를 주어야만 했다. 만약 한국군 유지비용으로 100억환이 든다고 가정할 때 환율이 1달러 대 500환이면 2000만달러 상당의 원조를 주어야 했지만, 1달러 대 1000환인 경우 1000만달러 상당의 원조만 해주면 됐다.

 

당시 아이젠하워 정부의 정책 기조는 긴축을 통한 재정의 합리화였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원조를 감축시키는 것이 중요했고, 이로 인해 한·미 간에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1953년 한국 정부가 통화개혁을 단행한 것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환율을 고정화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로 인해 1959년 신임 주한미국 대사로 매카나기가 부임할 때 가장 중요한 임무가 환율을 인상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스티븐 휴 리 교수).

매카나기 대사 부임 후 이승만 정부에서 환율을 올렸지만, 4·19 혁명 직전에 작은 폭으로 했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미 간의 환율에 대한 합의는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에 가서야 해결됐다.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이 시작된 1960년대 이후에는 고환율 정책이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한·미 간에 더 이상 환율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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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5. 7. 29. 11:08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9) 한국전쟁 해석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6022157495&code=210100&med_id=khan



 

첫째, 분단이 전쟁의 배경을 이뤘지만, 전쟁은 분단을 공고화시켰다. 냉전 분단체제는 산업화와 민주화로 이어진 우리 사회 모더니티의 구조적 조건을 형성했다.

 

둘째, 한국전쟁을 연구 분야로 삼은 역사학자와 사회과학자들 중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정치학), 캐스린 웨더스비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역사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의 연구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2>(1981·1990)

 

 

커밍스의 핵심 주장은 일제강점기부터 축적돼 온 계급갈등이 한국전쟁의 기원을 이뤘다

그는 식민지시대 적색농조의 투쟁, 해방 직후 지방인민위원회의 활동, 미국의 대한(對韓) 전략과 이와 연관된 냉전의 구조화 속에서 강화된 지주와 농민 간의 계급투쟁에 한국전쟁이 예비돼 있었다

한마디로 전쟁은 갑자기 시작(start)게 아니라 사회변동의 결과로 도래(come)했다

 

커밍스의 분석은 수정주의

수정주의란 미국 국제정치학계에서 전통주의에 맞서 등장한 학파다.

전통주의가 냉전의 원인 제공자로 소련을 지목했다면, 수정주의는 미국의 책임을 주목했다.

이런 수정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커밍스는 다양한 이론적 자원들을 활용해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거시적 분석을 시도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과 폴라니의 자본주의론에 기댄 구조적 접근,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한국 농민혁명까지의 국제정치학·사회학·역사학 연구들을 아우르는 학제적 접근, 해방 전후 한국의 사회변동을 중국·베트남·일본의 사회변동과 견줘보는 비교적 접근은 커밍스 연구를 풍성하게 한 방법론이자 이론틀이었다.

 

커밍스의 견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원인보다 기원에 대한 역사구조적 분석을 제시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의 질문에 대한 응답보다는 전쟁으로 다가가는 20세기 한국 사회의 예정된 진로에 대한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커밍스의 논리와 분석은 사실분석과 가치판단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의 물음은 전쟁이 가져온 비극적 참상을 돌아볼 때,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캐스린 웨더스비의 비판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를 명확히 규명한 것은 웨더스비와 박명림이었다.

 

웨더스비는 우드로 윌슨 센터의 냉전국제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러시아 모스크바의 대통령문서보관소에 있던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분석했다(강규형·캐스린 웨더스비, <소련 문서를 통해 본 6·25전쟁의 기원>, 2010).

 

웨더스비의 핵심 주장은 1950625일 남한에 대한 대규모 군사행동을 김일성이 창안했고, 이는 소련 스탈린의 후원과 중국 마오쩌둥의 승인 아래 이뤄졌다는 데 있다.

이러한 견해는 전쟁을 내전으로 파악한 커밍스의 수정주의적 견해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은 북한·소련·중국이 함께 계획하고 집행한 국제전이었다는 게 웨더스비의 결론.

 

하지만 그의 연구에서 아쉬운 것은 전쟁의 결정 과정만을 주목한 나머지 전쟁의 기원·배경·원인·결과에 대한 포괄적 분석은 결여돼 있었다.

 

이에 박명림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1996)에서 전쟁에 대한 입체적 분석을 시도했다.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첫째,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그는

식민지 시대 기원론‘625일 기원론을 모두 거부하고 1945분단기원론’.

 

그는 전쟁의 기원을 길게 1945년 해방과 미·소의 분할점령으로부터, 짧게는 1948년 분단정부의 수립으로부터 설정했다.

 

박명림이 특히 중시한 것은

1948년부터 1950년까지의 남북갈등을 함축하는 ‘48년 질서.

그에 따르면 ‘48년 질서속에서 북한의 리더십이 급진 군사주의에 경도돼 소련·중국의 후원 아래 한국전쟁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급진 군사주의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구조에 따른 대쌍관계동학의 결과인 동시에 북한 리더십이 독자적으로 채택한 전략이었다는 게 그의 핵심 주장.

 

사실판단의 측면에서 박명림의 견해는 커밍스의 견해가 갖는 한계를 넘어 전쟁에 대한 원근법적 분석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박명림은 역사적 사건에 내재한 구조와 행위의 상호관계를 주목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사회과학에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

 

한국전쟁의 기원을 규명하기 위해선 전쟁으로 다가가는 사회구조의 거시적 해명이, 한국전쟁의 발발을 규명하기 위해선 그 구조 아래서 움직이는 리더십과 집합행위자 선택의 미시적 분석이 요구된다.

 

박명림의 연구는 전쟁의 구조적 기원과 행위적 원인을 포괄적이며 미세하게 추적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 마땅하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는 한국전쟁의 국제 논쟁에서 우리 학계의 자존심을 세워준 연구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이뤄진 반면 전쟁이 가져온 결과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정치학)<비동시성의 동시성: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2014)에서 전쟁의 결과로 반공국가의 건설, 민족의 파괴, 지주계급의 몰락과 해체, 자본가 계급의 창설, 노동자 계급운동의 쇠퇴, 자영화된 농민의 보수화, 미국·일본·주변국들의 동맹으로 이뤄진 동아시아 중추와 부챗살 안보체제의 등장이 진행됐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한국전쟁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다층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동족상잔의 마당에 외세가 겹들어서 우리의 조국은 이제 무서운 살육과 파괴의 수라장으로 화하고 있다.” 북한이 서울을 지배하던 195091일 역사학자 김성칠이 남긴 기록인 <역사 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일기>의 한 구절이다.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1950년대 사회변동이 갖는 일반성과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은 물론 결과와 영향에 대한 연구들이 더욱 활성화돼야 할 이유다.

 

한국전쟁 미시사: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

 

주민 증언 통해 밝힌 후방 마을 학살 갈등

 

최근 역사학을 중심으로 보통 사람들이 겪은 마을의 작은 전쟁들에 대한 연구들이 진행돼왔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역사학)<마을로 간 한국전쟁: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돌베개·2010·사진)

한국전쟁에 대한 미시사 경향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의 갈등 구조다.

 

박찬승에 따르면 당시 마을에는 과거의 양반·평민 간의 신분 갈등과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 갈등, 친족 내부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종교·이념 갈등 등 복합적 갈등들이 존재했고 그 배경으로는 남북한 국가권력의 개입과 폭력이 놓여 있었다.

 

박찬승은 10여년간 진도·영암·부여·당진·금산의 마을들을 답사하고 구술을 채록해 연구를 수행했다.

한국전쟁 시기 후방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했다는 점을 돌아볼 때 이 연구는 전쟁에 담긴 참혹한 비극의 또 다른 측면을 생생히 증거한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북한 신천 지역 학살을 다룬 황석영의 소설 <손님>을 떠올리게 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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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5. 7. 29. 11:08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8) 맥아더 재평가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5262151195&code=210100&med_id=khan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


 최소한 1990년대 중반 옛 소련 문서가 공개될 때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정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남침론과 북침론(북한과 중국, 옛 소련), 남침유도론(일부 수정주의자)이 제기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을 전달받았다. 

여기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의 대화록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리고 위장평화 공세 후 남침을 개시할 것이며, 북한이 남침을 시작할 경우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남한 정부가 자체적으로 몰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들의 예상은 어느 하나도 들어맞은 것이 없었다. 


이 자료는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자료였고, 이후 한국전쟁 발발과 관련된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해졌다.




■ 1951년 봄에 끝났어야 하는 전쟁이 왜 2년간 더 계속되었는가? 

맥아더는 왜 해임되었는가? 

포로교환을 둘러싼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의 공방은 왜 1년6개월이나 계속되었는가?

 미국 정부의 문서를 이용한 해외에서의 연구가 선구적 역할을 했다면, 

한국 연구자들은 미국의 문서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옛 소련의 문서들도 이용해 한국전쟁의 쟁점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렇게 연구가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적지 않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직후 38선 이북으로의 북진과 중국의 참전, 이 과정에서의 맥아더 장군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2005년 7월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둘러싼 논쟁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 맥아더 장군에 대한 비판은 2005년까지 50여년간 금기 사항 중 하나였다. 


이승만 대통령을 지원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을 이끌고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원,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통해 멸공 통일에 다가갔던 맥아더의 공헌에 대해 누가 감히 비판의 칼을 들이대겠는가?

1992년 윤금이 사건과 2002년 미선·효순이 사건은 주한미군뿐만 아니라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한반도에 원자탄을 사용하려 했던,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하려고 했던 점령군의 사령관’이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맥아더 동상 철거와 철거 반대 세력이 인천 자유공원에서 부딪쳤고, 이는 급기야 맥아더 장군에 대해 비판적 글을 썼던 강정구 교수에 대한 친북논란으로 이어졌다. 

당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검찰에 대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해 검찰총장에게 불구속 수사를 하게 함으로써 김종빈 검찰총장이 이에 반발해 사임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2005년 9월11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를 놓고 통일운동단체와 보수단체 회원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명장인가, 명령 무시한 군인인가

논쟁의 핵심은 


첫째로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이 올바른 결정이었는가의 문제이다. 


1950년 유엔이 결정한 유엔군의 임무는 38선 이북으로 북한군을 돌려놓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북한이 더 이상 침략을 하지 못하도록 북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북진이 곧 중국군의 개입을 부를 것이고, 이는 곧 또 다른 세계대전을 부를 것이기 때문에 유엔군이 38선을 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엔군이 38선을 넘은 지 열흘 만에 중국이 참전했다.

둘째로 맥아더의 전술에 대한 평가이다. 


한국 사회에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최고의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맥아더를 몸신으로 모시는 무당도 있다. 


그러나 1978년 미국의 합동참모본부에서 발간한 합동참모본부사 3권 <한국전쟁>(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1990년에 번역)의 평가는 다르다. 


이 책에서 맥아더는 미국의 군 통수권자(트루먼 대통령)나 군 지휘계통에서 상부기관(합동참모본부)의 명령계통을 무시하는 군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취소하지 못하도록 구체적인 계획을 너무 늦게 본국에 보낸 것이 “군의 명령계통을 무시한 첫 번째 사례”였고, 

워싱턴의 결정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유엔군이 국경선까지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압록강 근처에 대한 폭격을 지시한 것 역시 “합동참모본부 훈령의 범위를 벗어나 왜곡하여 내린 명령의 마지막이 아니었다”.(290쪽)

또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결정한 정책들을 벗어나는 성명들을 발표했다.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 군 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416쪽)으로 간주했다. 

“합동참모본부의 모든 구성원들은 군은 항상 민정당국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종종 피력해왔다. 그들은 이번 경우에 있어서도 모두, 만일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지 않으면 각 계층의 미국 국민이 민정당국은 이미 군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고 비난할 것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다.”(426쪽) 이 점은 맥아더 청문회를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결정적으로 맥아더의 실수는 

중국군의 참전에 대한 오판이었다. 


맥아더는 중국군이 대규모로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일부 후퇴를 통해 방어적 진지를 구축하라는 본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전격적인 북진을 지시했다. 

이는 결국 미국에 거대한 재앙이 되었고, 합동참모본부는 플랜 B로 한반도의 포기와 대한민국 망명 임시정부의 수립까지도 고려해야 했다.

중국의 개입으로 인한 재앙은 미국에 트라우마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 시 미국은 북베트남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중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소련과 중국이 갈등을 벌일 때도 미국은 중국에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1972년까지 미국은 적의 분열을 이용하지 못한 것이다.

2013년 인천상륙작전 63주년을 앞두고 재현되기도 했던 맥아더 동상의 철거를 둘러싼 논쟁은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로부터 시작되었고, 한국 사회 집단지성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온 지 25년이 되었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도 냉전시대에 살고 있다. 맥아더를 둘러싼 논쟁은 남남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 반공포로 석방
정전협정 교착 빠지자 미국, 이승만 제거 계획
이승만에 대한 평가 등 비이성적 논쟁의 사례


1953년 6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영천·대구·상무대·논산·마산·부산·부평 등의 수용소에 있던 2만7389명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공산군뿐만 아니라 공산군과 타협하려 했던 유엔군에 대응하는 일대 쾌거였다. 국제관계를 해치는 계기가 됐다는 비판과 함께 반공포로 석방에 항의했던 조병옥은 테러를 당했고 결국 수감되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전협정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중단시키려던 미국의 노력이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재가동하였고, 국무부 차관보를 보내 한국 정부가 정전협정에 찬성하도록 설득, 협박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반공포로 석방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반공포로 석방 2개월 전에 한국 정부에 조약 체결을 제안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원했던 것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마찬가지로 유사시 미군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은 이를 보장하지 않았다. 

결국 반공포로 석방은 한·미관계에서 불신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2년 하비브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편지를 보면 한·미관계에서 불신을 일으킨 세 가지 사건 가운데 이 사건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반공포로 석방을 둘러싼 논쟁은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진행됐다. 

사실 이 논쟁은 현재의 역사 관련 논쟁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진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한편으로는 한·미동맹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미동맹에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역할을 한 이 사건을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으로 내세우면서 그를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항거한 애국 민족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은 모두 무시되고 있고, 
반공포로 석방에 항의한 조병옥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역사책에도 서술되어 있지 않다.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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