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29. 11:08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7) 농지개혁 평가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5192154125&code=210100&med_id=khan



1949년 6월21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됐다. 

1950년 3월10일 개정법이, 3월25일에는 시행령이, 같은 해 4월28일에는 시행규칙이 공포됐다. 전쟁 중이었던 

1951년 피란 국회에서 

농림부 관계자는 시행규칙이 공포되기도 전인 1950년 4월15일 이미 농지개혁이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 


농지개혁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현실화된 것이다. 

수천년 동안 계속되어 온 지주-소작 관계도 청산됐다. 자기 땅을 자기가 경작해서 수확한 쌀을 스스로 소비할 수 있는, 농민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도 농지개혁은 필수적이었다. 땅에 묶여 있는 자본과 노동력을 산업화 과정으로 전이해야 했다. 


1980년대 초까지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는 인색했다. 


북한에서의 토지개혁(1946년)이 지주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고 소작인과 빈농에게 무상으로 분배했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았던 반면, 

남한에서의 농지개혁은 유상으로 몰수하고 유상으로 분배했기 때문에 농지개혁 이후에도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땅을 분배받은 농민들은 땅값을 상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수확량의 30%를 5년 동안 국가에 내야 했다. 총 120%만 상환하고 나머지 30%는 국가가 보상하자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안은 기각되었다. 

여기에 더해 한국전쟁 기간에 ‘임시토지수득세’라는 현물세가 등장해 농민들은 매년 수확량의 50%를 내야 했다. 

또한 기대와는 달리 농지개혁 이후에 농업생산성도 높아지지 않았다. 

녹색혁명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고, 홍수와 가뭄 피해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매년 봄이면 보릿고개에 시달려야 했고, 가을에도 저곡가 정책 때문에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없었다. 정부의 추곡수매에 의지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던 것이 농촌의 현실이었다.






■ 농지개혁, 실패냐 성공이냐

농지개혁을 통한 산업자본의 축적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국가는 지주에게 수확량의 150%에 달하는 지가증권을 땅값으로 주고 땅을 매입했는데, 계획대로 되었다면 지가증권을 받은 구지주들은 산업자본가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기간에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지가증권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게다가 농지개혁법에 따르면 분배받은 토지를 다시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비공개적으로 땅을 축적하거나 명의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지주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박현채와 황한식은 농지개혁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개혁의 주체가 농민이 아닌 지주와 보수적인 정치인들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소작지 중 20%만이 분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더 영세해졌고, 소작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농지개혁의 실패로 농촌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바뀌기 시작했다. 


1989년에 출간된 <농지개혁사 연구>는 그 출발점이었다. 농지개혁은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대체로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보상과 등기는 훨씬 더 시간이 지나 이뤄졌지만, ‘분배 예정지 통지’가 나간 시점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장상환과 김성호의 연구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농지개혁 이전에 이미 농지분배가 이루어졌다는 점도 중요했다. 

미군정은 일제 총독부 소유의 농지를 신한공사 아래 두었는데, 신한공사는 1947년 이미 농지를 소작인들에게 분배하였다. 또한 정부수립 이후 농지개혁의 실시가 확실해지면서 지주들이 제값을 받기 위해 개혁 이전에 이미 농지를 방매(放賣)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소작지가 분배되었고, 경자유전 원칙이 관철되었다는 것이 장상환의 주장이었다.


 한국의 농지개혁은 북한과는 달리 성공적인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개혁’이었다는 것이다.(장상환, ‘토지개혁과 농지개혁’) 


김성호 역시 ‘농지분배 일람표의 공고’가 완료된 시점(1950년 3월24일)에서 농지개혁이 완료되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장상환의 주장과 맥을 같이 했다.

농지개혁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김일영 교수에 의해 정치적 평가로 이어졌다.

 즉, 한국전쟁 직전에 있었던 1950년 5·30선거에서 야당이 패배한 것은 농지개혁의 결과였으며, 이미 전쟁 이전에 농지개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쟁 발발 직후 북한이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했을 때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명백한 ‘부정선거’, ‘관권개입’과 관계없이 1954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승리한 것까지도 농지개혁의 결과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후 경제학계에서는 <농지개혁사 연구>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지만, 역사학계에서 다시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특히 정병준의 ‘한국 농지개혁의 재검토’는 반론을 제기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병준은 ‘분배 예정지 통지’가 나간 시점을 농지개혁이 완료된 시점으로 봐야 한다는 장상환의 주장이 농민들의 심리적 상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분배된 시점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농지개혁이 완료되는 시점을 농민들에게 상환증서가, 지주들에게 지가증권 교부가 완료되는 때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 농지개혁 논쟁은 현재진행형

당시 신문을 보면 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7월 중순에 가서야 상환증서 발급이 완료될 예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주들은 농지개혁에 반발해 전업대책과 보상신청서 제출을 의도적으로 지연하고자 했기 때문에 지가증권의 발급이 어려웠고, 당시 한국 정부의 행정 능력을 고려할 때 농지분배 사업을 빨리 끝내기도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이 농림부 장관에게 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10월의 시점에서 “농지개혁법안의 실시가 시급히 필요하다”, 서울 수복 이후에는 “농지개혁 실시를 연기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린 것 역시 농지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제시되었다. 

오히려 그는 농지개혁은 정책결정자가 의도했던 바가 아니라 전쟁의 부산물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농지개혁 논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왜냐하면 사례 연구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해석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즉, 남한에서의 농지개혁 실시라는 사실을 통해 이승만 정부의 농민 친화적 성격을 주장한다거나, 남한 자본주의의 성공이라는 결과, 또는 그 반대로 농촌과 농업의 포기라는 서로 다른 현실을 근거로 농지개혁을 결과론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이다.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던 개발도상국에 비해 농지개혁을 실시했던 한국과 대만이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농지개혁이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농지개혁 평가에서 중요한 점은 개혁 자체가 한국 사회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다.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지주들이 산업자본가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는가? 

농지분배로 받은 대금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었는가? 

농지개혁의 결과로 농업 분야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충분한 사례 연구가 진행되기 전에 이루어지는 성급한 평가는 농지개혁에 대한 논쟁이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 될 것이다. 


농지개혁은 성공과 실패의 여부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적 질서와 산업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장상환의 지적에 주목해야 한다. 

연구가 다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성급한 정치적 평가는 현대사 연구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

▲ 임시토지수득세
한국전쟁 중의 현물세… 세금 낼 사람 사라지자 농민 수확량 절반 거둬


정부는 ‘임시토지수득세’를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걷기 시작했다. 
현물세였다. 
현물세라니, 다시 중세로 되돌아간 건가?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인플레이션이 심해졌다.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월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으며, 세금을 낼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세수가 없다고 해서 전쟁 중에 정부가 모든 활동을 중지할 수도 없었다. 

만만한 게 농민이었다. 
당시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전쟁 중이었지만 집을 떠나기 쉽지 않았다. 생계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피신을 했다가도 다시 돌아와 논으로 가야 했다. 

바로 이 점이 현물세인 임시토지수득세를 만든 이유였다.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백두진은 “임시토지수득세가 없었다면 경제체제가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농민들은 농지개혁으로 인한 지가 상환, 그리고 토지수득세로 인해 수확량의 45~60%를 세금으로 내야 했다. 
자기 땅에서 땀 흘려 얻은 수확을 자기가 갖는다는 기쁨을 누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임시토지수득세는 4·19혁명 직후인 1960년에야 폐지됐지만, 수득세를 내지 못해 연체된 세금은 1962년에 면제됐다. 

수득세는 현대사에서 전쟁과 정부의 무능이 서민들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Posted by qlstnfp
2015. 7. 29. 11:07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6) 해방전후사 해석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5122220025&code=210100&med_id=khan



1980년대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한 시기였다.

 대학원을 졸업한 소장 연구자들이 기성 진보적 학자들과 함께 사회구성체 논쟁을 벌임으로써 한국전쟁 이후 냉전분단체제 아래서 위축된 진보적 인문·사회과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가운데 한 축을 이룬 것은 해방 전후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이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전 6권으로 나온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은 바로 이러한 연구들이 집약돼 있다. 

이 시리즈의 필자들로는 

고(故) 박현채(조선대 교수·경제학),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역사학),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등 당시 진보를 대표하는 중견 학자들부터 

박명림(연세대 교수·정치학), 정해구(성공회대 교수·정치학), 이종석(전 통일부 장관) 등 패기만만했던 소장 연구자들을 망라했다.



고 박현채 조선대 교수·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왼쪽부터)


■ <인식> 대 <재인식>의 논쟁

<인식>에 참여한 학자와 연구자들 사이의 견해가 늘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광복·미군정·정부수립·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사회변동을 분단체제의 형성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 과정 속에 냉전의 구조화라는 국제적 상황은 물론, 좌우합작·농민운동·노동운동 등의 국내적 변동을 ‘민중적·민족적 관점’에서 일관되게 분석하고자 했다.

민중적·민족적 관점이란 

지배계급과 외세에 맞서는 ‘민중’과 ‘민족’을 중시하는 진보적 역사관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해방 8년사(1945~1953) 한국 현대사야말로 세계질서 재편기 국제적 수준의 갈등과, 혁명과 반혁명의 국내적 갈등이 총체적으로 맞물려 돌아간 시기”라는 박명림의 주장은 <인식>에 담긴 새로운 역사인식을 생생히 보여준다. 


<인식>은 출간되자마자 학계와 시민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열린 민주화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결합됐기 때문이다. 

<인식>은 특히 당시 큰 화제를 모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였는데, 

두 책 모두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 현대사 학습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인식>의 역사인식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2006년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을 통해 이뤄졌다. 

<재인식>은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우리 현대사를 새롭게 해석한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 


민족주의를 비판해온 탈근대 성향의 박지향(서울대 교수·역사학), 김철(연세대 교수·국문학)이 뉴라이트 학자들이라 할 수 있는 이영훈(서울대 교수·경제학), 고(故) 김일영(성균관대 교수·정치학)과 함께 편집한 저작이다. 

<재인식>이 큰 관심을 모은 까닭은 책 제목에 담긴 상징성에 있다. 

다시 말해 <재인식>은 <인식>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을 겨냥했다. 

<재인식>은 머리말에서 지난 20여년간 학계의 부단한 연구로 <인식>에서 제기된 주장의 잘못이 지적되고 수정되어 왔음에 주목해 그동안 진척된 수준 높은 학술 논문을 선정해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제시해 주자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 <재인식>은 

<인식>에 담긴 민족 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이 우리 현대사 해석에 끼친 폐해를 우려하고, 편협하지 않고 균형 잡힌 역사 이해를 요구했다. 

이러한 우려와 요구는 2006년 당시 진행된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학문적 연구에서 시작됐으나 정치·사회 현실 문제에 직접 개입했다는 점에서 당시 <인식>과 <재인식>을 둘러싼 토론은 학계 안팎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박지향 서울대 교수·김철 연세대 교수(왼쪽부터)


■ <인식>과 <재인식>의 한계

<재인식>에 대한 비판은 두 방향에서 제시됐다. 


하나는 <인식>에 가까운 진보적 역사학자들의 비판이었다. 

당시 ‘역사비평’의 주간을 맡고 있던 임대식(역사학자)은 <재인식>이 뉴라이트와 탈근대의 기묘한 연대라고 지적하고, 이러한 ‘이종 연대’가 개혁이라는 시대정신에 역방향으로 작용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젊은 탈근대 역사학자들의 비판이었다. 

윤해동(한양대 교수·역사학) 등은 

2006년 <근대를 다시 읽는다>를 펴내 <인식>과 <재인식>을 동시에 비판했다. 

이들은 <인식>과 <재인식> 모두 철 지난 진영적 대립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인식>의 민족주의나 민중주의가 현실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낡은 역사인식에 머물러 있다면, <재인식>의 경우 일부 예외적인 글들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 ‘보수우익’의 정치적 이해에 복무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좌우 대립에 편승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인식>과 <재인식>을 둘러싼 논쟁은 광복 직후 역사적 사실과 집단적 기억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연 우리는 광복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것은 <인식>의 일부 필자들이 주장하듯 제국주의의 지배에 따른 비극적인 분단국가의 형성 과정인가, 아니면 <재인식>의 일부 필자들이 강조하듯 훌륭한 선택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서의 대한민국 성립 과정인가. 


좌파 민족주의 대 뉴라이트의 역사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인식> 대 <재인식>의 이런 상반된 역사관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돌아보면 

<인식>의 역사관에는 1980년대의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에 대한 염원이 깃들어 있었다.

 당대의 관점에서 <인식>이 그동안 한쪽으로 편향된 역사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밝히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인식>에서 제시된 사실 복원 및 해석은 민중적·민족적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재인식>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근대를 다시 읽는다>의 편자들이 적절히 지적하듯이 <재인식>의 논리에는 ‘국가=문명, 민족=야만’이라는 낡은 이분법이 깔려 있고, 

우익적 ‘대한민국 국가주의’의 강화라는 이념적 목표가 도사리고 있었다.

<인식>과 <재인식>을 둘러싼 논쟁은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면 <인식>과 <재인식>은 역사 해석을 여전히 이념투쟁의 한 수단으로 보려는 정치적 독법(讀法)의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나라이건 역사 해석에서 하나의 시각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실의 복원과 평가 또한 고정돼 있지 않다.

요컨대, 역사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과 기억의 복원으로 재구성되며 재해석된다. 

역사 해석이란 본디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강제와 경로의존성의 출발점이 된, 광복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현대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됐다고 봐도 좋다. 

어떤 사실과 기억이 이 시대를 정직하게 반영하는지를 분석하고, 그것이 현재에 어떤 함의를 안겨주는지를 성찰하는 것은 우리 현대사를 연구하는 인문·사회과학자에게는 더없이 중대한 과제다.

▲ 조정래의 ‘태백산맥’
역사책 뺨친 소설… 현대사 시야 넓혀



1987년 이후 열린 민주화 시대의 해방 전후사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텍스트 중 하나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1989년 전 10권 완간)이다. 

<태백산맥>은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부터 빨치산 토벌이 끝나가는 1953년까지 전남 벌교를 중심으로 진행된 비극적인 현대사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태백산맥>은 ‘혁명의 시대’라는 198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염상진, 김범우, 하대치, 소화, 외서댁, 들몰댁, 그리고 염상구까지 <태백산맥>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해방 전후를 살아온 민중과 지식인의 전형적 인물들이었기에 그만큼 감동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맥>의 내용 때문에 조정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됐지만 2005년 11년 만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듯 <태백산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뜨거웠고, 우리 현대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태백산맥>은 250쇄 정도를 찍었다고 한다. 총 850만권이 팔렸고, 매년 10만권가량 나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설 속의 주 무대인 벌교는 1980년대의 추억을 가진 386세대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곳으로 꼽힌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Posted by qlstnfp
2015. 7. 29. 11:02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5) 친일파 논쟁




1907년 5월 구성된 친일파 이완용 내각. 이완용과 내각 대신들은 그해 6월 헤이그 특사사건이 발생하자 고종 황제에게 “물러나라”고 협박했다.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제국주의의 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사람들을 정치무대에 다시 서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화사첨족(畵蛇添足)임에도

 

해방 70년 동안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친일파문제이다. 1945년부터 시작돼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1947년 우익과 중도파 정치인들로 구성되었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대한민국은 헌법에 근거해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조직했다.

미 군정도 1946년 소위 추수폭동이 부일 경력을 가진 경찰의 쌀수집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점을 인정할 정도로 친일잔재 척결은 광복 후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돼 압송되고 있는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가운데)와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최린.


하지만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친일파 척결의 상징이었던 김구마저도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인사들이 다시 정부의 요직에 올랐다. 일본 왕에게 충성했던 경찰과 군인들이 다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역사학이나 정치학이 아닌 문학 전공의 선구적인 연구자 임종국이 1966<친일문학론>을 출간할 때까지 친일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금기시되었다.

 

영원한 금기(禁忌)는 없었다.

 

<해방전후사> 통해 수면 위로

 

1980년 서울의 봄이 오자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통해 친일파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1989<해방전후사의 인식>6권으로 마무리될 때까지 친일파 문제는 핵심적인 논의의 하나가 되었다. 너무나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와 함께 친일잔재의 척결이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적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실록 친일파>(1991)에서부터 <친일파, 그 인간과 논리>(1991), <친일파 죄상기> <친일파 99>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이상 1993) 등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 명단에 오르는 경우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반민특위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친일파로 규정할 수 있는 철저한 기준이 마련될 필요성도 제기됐다.

 

그러나 친일잔재 척결문제는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명제였다.

어떤 사회보다도 식민지 시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강했던 한국 사회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다는 것은 범죄행위였다.

2012년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 개인의 문제보다 박정희의 친일문제가 더 많이 회자됐다는 것을 보더라도 친일문제가 갖고 있는 사회적 폭발력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2002년 발간된 친일을 옹호한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

법원이 이 책을 청소년 유해도서로 판시하면서, 책은 더 유명세를 탔다. 마치 최근 <제국의 위안부>를 언론과 법원이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준 것과 유사한 상황이 이미 10년 전에 발생했던 것이다.

 

학계에서의 논쟁은 더욱 심각했다.

2001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인명사전> 출간 선언에

 

2002년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서양사)는 한 학회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집착을 비판했다.

안병직은 이후 과거사 규명, 무엇이 문제인가’(2005)라는 제하의 글을 발표하면서 한국 사회의 친일파에 대한 강박관념을 비판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강박관념이 식민지 시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고 있으며, 과거사 법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과거사 청산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또 친일잔재 청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식민지의 회색지대>(2003)를 출간한 윤해동 한양대 교수(한국사)

과연 친일파라는 모호하고 임의적인 대상을 깨끗이 청산해버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친일파 청산이란 정신적 위안을 얻기 위한 도덕적 정언명령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친일과 반일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틀로만 식민지 조선인들을 이해할 수 없으며, 다수의 회색지대가 존재했던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협력하고 저항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사실 규명과 정의를 세우는 문제

 

안병직과 윤해동의 주장은 역사학계와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친일파 인명사전>을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의 기준을 자발성고위직에 한정했기 때문에 지원제를 가장해 강제로 동원된 대학생들, 강제로 이루어진 창씨개명의 경우 친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식민지 시대를 반일과 친일의 이분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당시의 시대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이후 식민지 시기 연구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친일파 옹호와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

 

식민지 시대의 개발근대가 곧 식민지에 대한 수탈과 함께 카이로 선언에서 규정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팽창을 동반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망각한 채 강조된다면, 제국 일본의 식민지 정당화를 위한 논리와 다를 것이 없다.

 

둘째로 이 논쟁이 정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은 친일파 논쟁의 한 축이 되었다. 해방 직후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60년간 해결되지 못하면서, 과거사 문제는 남남갈등의 한 이슈가 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주류는 비주류에 의한 청산작업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친일파 척결을 주장하는 그룹은 좌빨로 규정되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제때 해결되지 못했을 때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민족적·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본래의 성격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당사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황에서 친일파 문제는 더 이상 처벌의 문제가 아니다.

 

학계에서는 사실 규명의 문제이며, 사회적으로는 정의를 세우는 문제이다. 더 중요하게는 친일파나 식민지근대화론 문제가 한·일 간 감정싸움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에 친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민족을 팔고 은사금을 받은 사람들, 탐욕과 폭력에 근거한 제국주의 전쟁에 협력한 사람들의 죄상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인류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다. ‘매국전쟁범죄의 진상을 밝히지 못할 때, 또 다른 매국과 전쟁범죄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동아일보 1985년 서로 친일이전투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파 논쟁은 198541일 동아일보 창간 65주년 기념호가 발단이 됐다. 동아일보는 3면에 실린 동아일보, 민족혼 일깨운 탄생이란 조용만 칼럼을 통해 총독부 당국은 신중히 고려한 끝에 민족진영 측으로 동아일보를 허가하고, 다음으로 실업신문을 내겠다고 하는 대정실업친목회 측에 조선일보를 허가하고 끝으로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는 국민협의회 측에 시사신문을 허가하였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일보를 실업신문을 위장한 친일신문으로 규정했다. 심지어 조선일보의 사장이 상업은행장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이 친일신문임을 알고 주식을 사지 않아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기회주의 신문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412일자에서는 동아일보가 일본 제국에 저항하는 국가의 적으로 규정되었다는 기사(7)를 게재하면서 조선일보가 일본에 협력한 일간지였음을 암시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당시 일본의 우익단체에서 발행한 신문에 불온한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와의 합판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총독부의 시책에 항거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며 동아일보가 민족지였음을 조선일보에 비교해 강조했다.

 

이틀 후 조선일보의 반격이 시작됐다.

논설고문 선우휘는 동아일보 사장에게 드린다는 글을 통해 동아일보의 친일적 성격을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창간 후 조선일보가 재빨리 옳은 주장과 바른 기사를 써서 사흘이 멀다 하며 압수와 정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동아일보는 무엇이라고 설명하겠습니까? (중략) 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김성수) 선생까지 욕보이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이에 동아일보는 다시 417일 사고를 통해 우리는 양지가 65년 전의 기록 시비로 더 이상 지면을 소비하고 자제를 잃을 경우 역사에 흠을 남기고 사회적 안정을 해칠 것을 걱정합니다라고 하면서 논쟁에서 한발 물러섰지만, 조선일보는 419우리의 입장: 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를 통해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 박영효의 친일 논란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가 반박하지 않음으로써 이전투구의 논쟁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이상 정운현, <임종국 평전> 참조)

 

친일을 둘러싼 두 신문의 논쟁은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한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조선일보 구독자가 급증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의 전력을 비난하고 나온 것이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친일 문제가 한국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잘 보여주는 해프닝이었다.

 

그래도 4·19 혁명 25주년에 실린 다음과 같은 조선일보의 마지막 기사 중 일부는 명문(名文)이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항용 특정계파의 일방적 자기미화의 논리로 잘못 기술되곤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친일 및 부일 세력과 항일투쟁 세력을 역사적 가치에 따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채 일제하의 친일이 해방 후의 지배세력으로, 그리고 반민족적 반민주적 세력이 민족세력으로 둔갑하는 오류를 반복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Posted by qlstnfp
2015. 7. 29. 10:22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4) 유일 합법정부 논쟁




19481212일 유엔 총회 195호 결의안은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유일한 정부라고 승인했다.

그러나 승인된 대한민국은 오직 유엔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에 선거가 실시되었던 지역에만 국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지역(that part)’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 점을 의미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유엔 총회의 승인안은 크게 세 가지 부분

 

첫째로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임시위원단이 관찰하고 협의할 수 있었고, 한국인의 대다수가 살고 있는 한국의 그 지역에서 통제와 관할권을 갖는 합법적 정부.

둘째로 이 정부는 한국의 그 지역에서 유권자들의 자유의지가 표현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임시위원단이 관찰한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에서 오직 그러한 정부.

 

 

 유엔이 결의안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했다는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948년 12월14일자 기사.



한국 정부의 관할권 문제

 

먼저 문제가 된 것은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1948510일에 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다. 4·3항쟁 때문이었다. 1949년에 가서야 유엔한국위원단의 감시 아래 선거가 실시된 이후에야 정식으로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다.

 

1950년 인천 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했을 때 누가 38선 이북 지역을 관할하는가가 문제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북 5도에 도지사를 임명했다.

그러나 유엔군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한국 정부가 임명한 도지사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은 그 지역에 관할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후 수복지구도 문제가 됐다.

서해5도와 강원도의 일부 지역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한 관할권이 없었기 때문에 1954년 총선거에서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유엔군과 한국 정부와의 협약에 의해 정전협정 후 1년이 지나서야 관할권이 이양되었다.

 

2000년 이전까지 모든 교과서는 유엔의 승인을 근거로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정의했다. 이것이 곧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근거였다.

 

1991년 문제가 발생했다.

917일 오후 33046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59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유엔에 가입한 것이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했던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에 금이 간 것이다.

 

남북한은 원래 유엔에 개별적으로 가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고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었기 때문에 남한과 북한이 각각 다른 국가로서 가입할 경우 통일의 원칙에서 어긋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암묵적 원칙을 먼저 깬 것은 남한 정부였다.

19736·23 선언을 통해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6·23 선언에서 북한이 우리와 함께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며(4), ‘북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5)라고 북한에 제안했다.

19911231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1)고 전제한 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했다.

 


1991년 12월13일 제5차 남북 고위급회담 제3차 본회의에서 남측의 정원식 총리(오른쪽)와 북측의 연형묵 총리(왼쪽)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공식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1991년 일본과 북한의 수교 협상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법적 지위에 대한 논쟁이 다시 재현되었다. 일본이 북한 정부를 법적으로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일본은 이미 국제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제195(III)를 상기한다는 조건에서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바 있다.

 

도대체 유엔의 결의안을 다시 상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일협정에서 일본은 대한민국 정부를 그 지역에서만 관할권을 갖는 정부로 규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북한 정부와도 수교협상을 진행한 것이다.

 

만약 1965년 한일협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전체에서 유일 합법정부로 규정했다면, 일본은 북한 정부와 수교를 할 수 없다. 북한의 유엔 가입도 마찬가지다. 유엔의 승인이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북한 정부는 불법 단체가 되며, 이는 북한 정부가 유엔의 성원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유엔 승인안, 헌법 3조와 충돌

 

 

민주화 이후 역사학자들은 유엔의 승인안에 기초해서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법적 지위에 대한 규정을 수정했다.

그 결과는 2003년부터 근현대사검정교과서에 반영되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총선거가 실시된 38선 이남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이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 3(‘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와 충돌하는 것이었지만, 이후 10여년간 정부의 승인 아래 모든 역사 교과서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1948510일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또는 38선 이남)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서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3년 갑자기 교육부가 검정을 통과한 한국사 교과서에 대해 수정권고안을 냈다.

교육부는 당시 유엔 결의문은 합법적인 정부로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뿐임을 명기하고 있기 때문에 ‘38도선 이남이란 표현을 삭제하라고 권고했다.

 

교육부의 수정권고안이 나오자마자 뉴라이트 학자들 사이에서 교육부의 입장을 옹호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국제법적 관할권을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 38선 이남으로 한정한 것은 유엔 결의안을 의도적으로왜곡한 것이며, 원문에는 한국에서’(in Korea)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안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 다시 재개되지 않았다. 승인안의 영문 표현을 보면 대한민국의 관할권이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승인안의 내용을 왜곡하면서까지 논쟁을 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유엔 승인안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유독 유엔과 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전쟁 시기 창설된 유엔군은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으며, 유엔은 유엔한국재건단(UNKRA)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조직, 전후 한국의 재건을 도왔다. 1980년대까지 유엔의 생일인 1024일이 공식 휴일(유엔데이)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과 합법성은 유엔의 승인에서만 찾아야 하는가?

 

한국이 이렇게 유엔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미국의 정책과 관련이 있다. 필리핀이나 일본과는 달리 유엔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던 것이다. 북한이 남침하도록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1950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의 연설에서도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되었지만, ‘국제기구를 통해 수립된 국가는 국제기구를 통해 지키겠다는 원칙이 천명되었다. 미국으로서는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유엔을 통해 그 절차적 합법성을 인정받고자 한 것이었다.

 

게다가 1948년 상황에서 유엔은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기구가 아니었다. 1960년대 이후 개발도상국들이 대거 가입하면서 유엔은 명실상부한 유일한 세계정부가 되었다.

 

현대 국가의 정통성은 신화나 외부로부터의 인정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오고 알에서 태어나고 두꺼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먼 옛날의 일이다. 외부의 인정만으로도 정통성을 얻고자 했던 것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만주국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을 때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정통성과 합법성은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나와야 한다.

선거를 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구성원들이 그 국가 아래에서의 삶에 만족해야만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경제번영이 중요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의 정통성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국가가 구성원들의 행복을 책임질 수 있는가에 따라 정통성이 있다가도 없을 수 있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다. 더 이상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진행되는 구시대적 논쟁이 없었으면 한다.

 

 

만약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한국 정부는 당분간 관할권을 갖지 못한다. 유엔 승인안의 국제법적 효력이 계속되는 한 유엔의 권위 아래에 다국적 국가로 구성된 기구가 수립될 가능성이 크다.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북한에 가서 부동산 투자를 해야겠다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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