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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9 베트남전 파병
- 2015.07.29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
- 2015.07.29 5·16이 더 이상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였다
- 2015.07.29 1965년의 한일협정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5) 베트남전 파병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7142205275&code=210100&med_id=khan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평가는 전투병 파병이 시작된 1965년부터 현재까지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논란이 이뤄지는 이슈다.
현재의 논란은 전쟁특수를 통한 경제적 이득과 참전으로 인한 한국군과 베트남 민간인들의 피해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지만,
파병 당시에는 베트남 파병이 한국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의 문제였다.
■ 파병 당시엔 논쟁 확산되지 않아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고, 불과 10여년 전까지도 한국전쟁이라는 전면전이 진행됐으며, 정전협정으로 전면전은 중단됐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한국의 상황에서 전투병의 파병이 가져올 안보적 효과가 논란의 초점이었던 것이다.
한쪽에서는 베트남 파병이 안보 공백을 가져올 것이며, 스스로의 안보를 지키지 못해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파병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정부와 여당은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역할과 규모에 변동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관점에서 파병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만약 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하지 않는다면, 주한미군의 일부 또는 전부가 베트남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의 도발을 막는 억지력으로서 미군의 역할과 규모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 점을 강조했는데, 실상 파병 시점에서 한국군 파병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반전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한국전쟁 때 도와줬던 미국에 보은해야 한다는 것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여기에 더해 1964년부터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인해 위수령이 선포될 정도로 사회적 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으로 확산되지 않았다.
반대 의견이 너무 나오지 않아서일까? 반대 의견이 강해야만 파병을 요구한 미국에 무언가 더 큰 요구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국회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반대한 사람은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의 옆에 서 있었던 차지철이다. 그는 남베트남 정부가 외국군의 지원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파병에 반대했으며, 정규군 대신 의용군을 파병할 것을 주장했다(경향신문 1965년 1월16·19일자). 상임위 표결에서는 찬성표를 던졌지만.
1965년 1월 1차 전투부대 파병 당시 국회 표결에서 야당은 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을 미국이 약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권했고, 2차 증파 논의에서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지만, 야당의 중진인 김준연과 조윤형은 찬성표를 던졌다. 여당인 공화당의 당론은 찬성이었지만, 공화당 박종태 의원은 가장 강력하게 파병을 반대했다.
그는 “자유 진영 가운데도 영국·프랑스 등 많은 나라들이 월남 파병을 반대하고 있으며, 월남 파병으로 결정적인 손실을 입고 있으면서도 자체의 강력한 국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미국의 입장과 중립국 등 국제여론을 중시해야 할 한국의 입장은 다르다”고 주장했다(경향신문 1965년 8월7일자).
베트남전 파병을 둘러싼 찬반 양론을 다룬 경향신문 1965년 1월16일자 기사.
■ 장준하 국회 질의로 파병 쟁점화
베트남 파병이 다시 도마에 오른 것은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정전협상을 제안했고, 철군을 공약으로 내건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에
장준하가 1968년과 1969년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 문제에 대해 질의했다.
미국의 베트남 정책이 변화하는 시점에서 한국군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베트남에서 다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후 1985년 리영희의 <베트남 전쟁>이 출간될 때까지, 그리고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기까지 베트남 파병은 한국 사회에서 잊혀졌다.
1990년 김민웅이 미국 자료에 근거해 월간지 ‘말’에 쓴 민간인 학살에 대한 문제제기, 1992년 9월26일 고엽제 피해자들이 정부의 대책 마련을 주장하면서 고속도로에서 벌인 시위, 1993년 드라마로 방영된 <머나먼 쏭바강>으로 인해 베트남 파병 문제는 다시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전쟁특수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지만, 전쟁기간 발생했던 민간인 학살에 대한 논쟁은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당시 미국 자료와 베트남 현지 증언을 통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음을 주장하는 반면,
참전 군인들은 자신들이 죽인 것은 민간인이 아니라 베트콩이었으며, 북한군이 한국군으로 변장해 민간인들을 죽인 경우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논쟁은 폭력적인 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2000년 구수정과 고경태 기자의 민간인 학살 보도에 반발하는 참전군인들이 한겨레신문사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민간인 학살을 언급한 교과서 대표필자의 학교에 보수단체 회원들이 몰려가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맹호부대 장병들이 1967년 1월 베트콩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베트남 파병에 대한 논의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던 원래의 목적, 즉 한·미동맹과 안보를 위한 목적은 달성되었는가?
1970년대 한국군의 현대화 작업이 긍정적인 답변의 근거가 된다면,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과 울진·삼척 사건으로 대표되는 남북 간 안보위기,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그리고 1970년대 한·미관계의 악화는 부정적 답변의 근거가 될 것이다.
파병의 군사적 효과에 대해서도 논쟁이 필요하다.
이세호 사령관은 실전 경험, 현대전의 최신 전술과 전투장비, 외국군과의 연합작전 능력 등을 들어 군사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야전 소대장의 평가는 다르다.
베트남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공비 토벌’이었으며, 막대한 물량 지원하에 일방적으로 벌인 전투는 전력 증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쟁특수와 유신 선포, 고엽제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전쟁특수가 그렇게 컸다면 왜 196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부실기업 위기가 발생했을까?
그럼에도 전쟁특수가 없었다면 1973년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이 가능했을까? 베트남 파병을 통한 물적 토대의 구축이 없었다면, 유신체제 선포가 가능했을까?
미군과 호주군의 고엽제 환자를 위한 기금은 마련됐는데, 한국에서는 참전군인과 고엽제 환자들에 대한 조사와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베트남에 파병됐던 한국군은 1973년 모두 귀환했지만, 그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과 평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특수에 대한 기억과 기대는 지금도 해외파병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과 파병에 대한 객관적 연구와 그 평가를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 ‘같고도 다른’
미국 주도의 분단 후… 한국은 ‘남침 전면전’,
남베트남은 ‘내부 시민전쟁’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은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성격의 전쟁으로 보인다.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한 남쪽의 저항. 그러나 베트남전쟁은 한국전쟁과 기본적 성격부터 달랐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침략에 의한 전쟁이었지만, 베트남전쟁은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베트콩들의 전쟁이었다. 북베트남의 지원이 없었다면 베트콩이 20년이 넘도록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지만, 전쟁의 본질은 시민전쟁이었다. 그러나 두 전쟁은 서로 연결돼 있었다. 17도선을 중심으로 베트남이 분단된 것은 1954년의 제네바회담이었고, 이 회담은 본래 한국에서 정전협정 직후 평화협정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열린 고위급 정치회담이었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대신 베트남 분단을 결정해 베트남전쟁의 기원이 됐다.
베트남의 분단 자체도 1953년 7월 한국의 정전협정과 인과관계가 있다.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중단되자 중국의 지원이 북베트남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로 인해 1954년 초 북베트남 공산당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에 승리했고, 프랑스는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결정했다. 베트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미국은 제네바회담을 제안했고, 결과적으로 베트남 분단을 결정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이 본격적인 개입을 결정한 것은 중국이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1964년이었고, 전쟁 기간 중 북베트남 폭격을 계속했지만, 지상군이 17도선을 넘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 북진이 중국군을 초래했고, 이것이 미군에 재앙이 되었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은 1975년 남베트남 정부의 패망으로 끝났지만, 한국전쟁은 정전체제가 계속되고 있다. 베트남과 달리 남한이 북한을 압도하고 있음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 언제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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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4) 민족적 민주주의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7072209035&code=210100&med_id=khan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물리적 시간에서 박정희 시대는 1979년에 끝났지만, 사회적 시간에서 박정희 시대는 현재진행형이다.
발전국가, 권위주의, 군사문화 등 박정희 시대를 이룬 구성물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담론의 측면에서
첫번째로 만나는 박정희 시대의 뜨거운 쟁점은 ‘민족적 민주주의’였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1964년 5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당시 서울대 학생이었던 시인 김지하가 쓴 장례식 조사(弔詞)인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의 첫 부분이다.
1964년 5월20일 서울대 학생들이 문리대(현재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주창한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비서구사회에서 민족주의, 민주주의, 발전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을 이끌었던 3대 이념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시킨 말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주도했던 1960년 4월 혁명의 핵심 이념을
1964년 당시 대학생들은 왜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을까.
민족적 민주주의 논쟁은 1960년대의 박정희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한 통로를 제공한다.
■ 논쟁의 진행 과정
민족적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제시한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1963년 10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에 대항해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정치학자 강정인(서강대 교수·정치학)에 따르면,
박정희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변형한 ‘행정적 민주주의’(군정 단계), ‘민족적 민주주의’(제3공화국), ‘한국적 민주주의’(유신체제)로 이어지는 담론을 제시했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가는
1963년 대선은 민족적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일대 격돌한 선거였다.
역사학자 오제연(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박정희와 김종필이 제시한 민족적 민주주의가 자주와 자립 지향의 강력한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였다면,
윤보선과 야당이 제시한 자유민주주의는 순수한 자유민주주의였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불투명하고 이질적인 민주주의라고 비판한 반면, 윤보선은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해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민주주의라고 비판했다.
선거 과정이 치열해지면서 서로에 대한 비판 수위도 높아졌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윤보선을 ‘민족 이념이 결핍된 사대주의자’로 공격했고, 윤보선과 야당은 박정희를 ‘중립주의자·반미주의자·공산주의자’라고 반격했다.
박정희·윤보선·김종필(왼쪽부터)
주목할 것은 당시 여론의 흐름이었다.
논쟁이 진행되면서 박정희는 민족적 민주주의자로 인식됐고, 민족주의에 호감을 갖고 있던 적지 않은 이들은 박정희를 지지하게 됐다.
1960년대 초반이라는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민족주의는 대체로 진보적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20세기 전반의 식민지 경험을 돌아볼 때 민족주의는 강렬한 유토피아적 에너지를 갖고 있던 이념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오른 것은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서였다.
특히 학생운동을 주도한 대학생들은 한일협정 체결 추진에 반대했고, 나아가 민족적 민주주의를 비판했다.
1964년 5월20일 서울대생을 포함한 3000명의 대학생들은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앞서 말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반정부운동으로 바뀌었고, 6월3일 1만여명의 대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자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6·3항쟁은 이렇게 일어났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다시 한 번 민족적 민주주의를 언급했다. 하지만 이때의 민족적 민주주의는 경제개발에 따른 자립을 중시하는 언설로 나타났다.
1960년대를 통틀어 볼 때, 민족적 민주주의는 조국 근대화, 새역사 창조, 민족중흥, 자립경제 등의 의미를 담은 ‘산업화 민족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민주화보다 산업화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7년 대선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는 다시 부상하지 않았다.
■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
역사적으로 근대 사회에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내적인 긴장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민족주의에 담긴 특징, 즉 대외적 민족자결을 부각시키는 이념이자 대내적 체제유지를 위한 헤게모니 장치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민족주의는, 한편에서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국가 간 경쟁을 고려할 때 유용한 담론의 의미를 갖지만, 다른 한편에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부의 민족적 민주주의는 당시 국민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민족적 민주주의를 앞세운 1963년과 1967년 두 번의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된 사실을 돌아볼 때, 민족적 민주주의는 그 나름의 헤게모니를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서구사회에서 민족주의의 대중적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던 까닭은 물질적 생활에서 서구에 대한 모방이 성공적일수록 정신적 문화에 대한 보존의 욕구는 되레 강화된다는 점에 있었다.
단일 민족으로서의 오랜 역사와 일제 강점기의 민족해방 투쟁에 대한 기억은 민족주의에 배타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했다. 이 민족주의가 1960년대에 발전주의와 결합해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화 민족주의로 나타났다면, 민주주의와 결합해서는 민족적 민주주의로 담론화된 셈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두 이념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라기보다 민족주의였고, 광복을 이룬 지 20년이 채 되지 않은 1960년대 초반의 상황은 이 민족주의에 유리한 시대적 환경을 제공했다.
문제는 담론과 현실의 긴장에 있었다.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했음에도 한일협정 체결을 목격하면서 대중들은 박정희 정부의 민족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에게 승리한 것은 민족적 민주주의에 있었다기보다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가시적인 성과에 있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3선 개헌을 거쳐 10월 유신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로 변질됐으며, 결국 절차적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반민주주의의 공고화로 귀결됐다.
▲ 박정희 정권 비판자에서 박근혜 지지자로… 김지하의 아이러니
1960~70년대 시인 김지하의 삶은 박정희 시대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한다.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그는 1960년 4월 혁명 후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64년 5월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거행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는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를 작성했고,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지명수배자가 돼 은신생활을 하기도 했다.
김지하가 시인으로 알려진 것은
1969년 시 전문지 ‘시인’에 문학평론가 김현의 소개로 <녹두꽃> 등 5편이 ‘지하’라는 필명으로 게재된 이후였다. 1970년대에 들어 그는 주목할 만한 시를 계속 발표했다. 특히 1970년 월간지 ‘사상계’ 4월호에 <오적>을 발표함으로써 큰 관심을 모았다.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로 시작하는, 특권층의 권력형 비리와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비판한 <오적>은 그의 시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었다.
<오적>이 1970년 6월1일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다시 게재되자, 경찰이 신민당사를 수색해 ‘민주전선’ 10만부를 압수함으로써 <오적>은 필화사건을 넘어 정치적 사건으로 커졌다.
또 6월26일 일본 ‘슈칸아사히(週刊朝日)’에 소개돼 김지하라는 이름은 일본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이 해에 그는 ‘시인’ 6·7월호에 시인 김수영이 구사한 풍자의 의의와 한계를 밝히는 평론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하기도 했다.
1970년 <오적>으로 구속된 이후 그는 1974년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0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80년대 이후 그는 민중시인·민주투사에서 생명사상가로 전환했다.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기고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2012년 12월 대선에선 박근혜 후보를 지지해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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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3) ‘5·16’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6302149235&code=210100&med_id=khan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당시 박정희 소장(오른쪽)이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서 있다. | 연합뉴스
‘5·16을 쿠데타로 보느냐, 혁명으로 보느냐’
교육부에서는 역사 교과서에서 5·16을 ‘군사정변’으로 규정하고 있다. 군인들에 의해 큰 정치적 변동이 생겼다는 것이다.
1961년 5월16일에 발생한 정치적 변동이 혁명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쿠데타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규정은 없다.
사전적 의미에서
쿠데타는
‘국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력 등의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권을 빼앗기 위해 일으키는 정변’이다.
혁명은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장악하던 계층을 대신해 그 권력을 비합법적으로 탈취하는 과정’이다.
쿠데타와 혁명의 공통점은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곧 법을 넘어선 행위를 의미한다. 차이점은 목적과 과정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군사정변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5·16은 혁명의 성격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정부가 발간한 <군사혁명사>나 박정희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을 보면 사회체제 변화를 위한 의지가 충만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봉건적인 사회 관습을 없애고, 1950년대의 비효율적인 부패 구조를 개혁한다는 목표와 함께 불균형적인 한·미관계도 개혁 대상의 하나였다.
아울러 5·16이 혁명으로 규정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득권층을 대신해 새로운 계층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검증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존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세력들이 사회체제의 변화를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에서 모두 경험했던 것이다.
■ 5·16 주도세력은 하극상 장교들
5·16을 주도한 세력들은 분명 기존의 주류 세력이 아니었다.
1950년대 정부와 연결돼 부정부패를 주도했던 군인이 아니었고, 오히려 민주당 정부 시기 그러한 군인들을 몰아내자고 주장하면서 하극상을 일으켰던 장교들이었다. 물론 영관급 장교들을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고 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1962년부터 시작된 민주공화당을 창당하는 과정 역시 새로운 세력들을 흡수하는 과정이었다. 부산 지역에서 지역운동을 하다가 김종필에게 스카우트된 예춘호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1950년대의 기득권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지역에서 열심히 일하는 새로운 일꾼들이 충원되었다. 기존 정권과 관계없는 지식인, 관료들도 군사정부와 민주공화당에 충원됐다. 이 정도면 5·16을 혁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문제는 과정과 결과이다.
군사정부는 농촌의 고리채를 정리하고 중소기업을 육성하며, 이승만 정권과 결탁했던 부정축재자를 구속했다.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소위 ‘깡패’들도 모두 구속했다.
기존의 사회체제를 완전히 바꾸려는 듯이 보였다. 군사정변이 국민의 뜻과 관계없이 일어났지만, 군사정부가 하는 정책은 국민이 원하는 바였다. <군사혁명사>에서도 5·16을 민족혁명이라고 했다. 여기까지였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구악 소탕령’에 의해 검거된 폭력배들이 군인들의 인솔 아래 플래카드를 들고 줄지어 걷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리채 정리는 실패했고, 부패한 기업인들은 모두 사면했다.
농민들은 고리채를 신고하면 나중에 돈을 빌릴 곳이 없기 때문에 신고하지 않았다.
대기업을 경영하는 부정축재자들을 사면하니 중소기업 육성이 어려워졌다. 오히려 ‘4대 부정’ 사건으로 스스로가 부패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공화당과 행정부에는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 시기 기득권 세력들이 합류했다.
경제적으로 볼 때 1962년의 통화개혁이 실패하는 과정이 그랬고, 1963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수정되는 과정이 그랬다.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이집트의 나세르 정책을 벤치마킹해 새로운 체계를 만들고자 했던 군사정부의 계획은 실패했다.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라는 ‘혁명공약 6항’도 그 실행을 연기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미국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민정이양이 빨리 이어지지 않을 경우 한국에 대한 지원을 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어쩌면 암살되기 전에 동맹국 지도자에게 보낸 마지막 친서였는지도 모른다.
민정이양은 이루어졌지만,
군사정변을 주도한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민간인인 것처럼 정부에 참여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군정을 연장했다.
한일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거행함으로써 5·16이 더 이상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였다고 마침표를 찍었다.
■ 미국, 5·16 쿠데타 전 정보 건네줘
사실 5·16과 관련해 더 중요한 점은
첫째로 60만의 대군이 있는 한국에서 어떻게 3200여명만이 동원된 쿠데타가 가능했는가를 밝히는 점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미국과, 5·16 쿠데타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했던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 사이에서 누가 더 큰 책임이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전자의 입장은 쿠데타가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을 미국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5·16 한 달 전에 이미 박정희가 주도하는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장면 정부에 전달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후자는 쿠데타가 발발한 날 아침 박정희 소장과 윤보선 대통령의 만남을 강조한다. 윤보선 대통령은 불법적 쿠데타를 진압하기보다는 오히려 무너져야 할 정부가 무너졌다고 하면서 쿠데타를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쿠데타 이후에도 당분간 대통령직을 그대로 수행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의 쿠데타에 대한 입장이 애매했기 때문에 이 논쟁의 결론을 내는 것은 어렵지만, 이 논쟁은 5·16뿐만 아니라 한국현대사 전체를 해석하는 관점과 관련돼 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 외세의 규정력과 내부의 역할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 논쟁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로 신화로부터 벗어나 5·16과 군사정부를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5·16과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두 개의 극단적인 평가만이 존재하고 있다.
두 극단적인 평가는 자신들의 평가를 하나의 믿음으로 설정해 놓고, 자신의 시각과는 다른 해석에 대해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5·16과 군사정부에 대한 연구는 신화적 해석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예컨대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수출주도형 산업화 계획이 아니었고 균형성장론에 근거한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이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민주공화당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다.
1969년 삼선개헌 이후의 민주공화당은 그 이전과 다른 정당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왜 일어난 것일까?
그 변화를 이끄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성취를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비판만 하자는 것도 아니다.
사실규명을 통해 긍정과 부정 중 한 쪽으로만 치우쳐 있는 신화를 해체하자는 것이다.
신화 해체의 과정은 5·16뿐만 아니라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성격을 밝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 “5·16 군사정부, 화교 돈 끌어내려 통화 개혁”…
미국 압력으로 한 달 만에 실패로 끝나
1962년 6월 군사정부는 통화개혁을 실시했다.
통화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었다.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실시했던 1953년의 통화개혁과 달리
1962년 통화개혁의 목적은 국내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었다. 통화개혁을 하면서 모든 은행계정을 봉쇄한 것이다. 구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해주기는 했지만, 은행에 있는 돈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국이 발끈했다. 케네디 정부는 군사정부가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시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인도와 유사하게 정부가 산업공사라는 것을 만들어 국가가 직접 투자하는 정책을 실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계획을 만들고 직접 투자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압력으로 군사정부는 한달 만에 모든 은행계정을 풀어야 했다.
국내 자본을 축적하려 했던 군사정부의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통화개혁을 추진했던 군사정부 관계자들은 모두 요직에서 떠나야 했고,
이승만 정부 시기부터 활동했던 전문관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당시 경제관료의 회고에 따르면 통화개혁의 목적은 현금을 직접 보유하고 있던 화교들의 돈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막상 화교들이 신고한 자금이 얼마 되지 않아 실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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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2)한·일 국교정상화 청구권 자금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6222227565&code=210100&med_id=khan
한·일 양국 대표가 1965년 6월22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국교정상화 조인식을 갖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ㆍ일본 ‘독립축하금’·한국 ‘청구권 자금’…결국 ‘배상’은 하지 않았다
ㆍ1945년 이전 협약 “무효 시점 각각 해석” 두루뭉술 합의
ㆍ일 “종전 이전 무효…한일협정 자금은 배상금 아니다”
ㆍ배상 문제 불거지자 “한국이 유일 정부 아니다” 발빼기
35년간 식민지였던 한국이 제국주의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식민지와는 달리
이웃 나라에 식민지화되었으며, 수천년 동안 독립된 왕조를 유지하고 있다가 무력을 동원한 강제에 의한 조약으로 식민지가 된 한국으로서는 35년간의 박탈감이 너무나 클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함께 시작된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체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안보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재건을 위해서도 한·일관계의 정상화가 필요했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에서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에 대한 양국 간의 인식 차가 너무나 컸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시기의 피해에 대해 배상받고자 했다. 이승만 정부는 일본에 의해 입은 피해를 목록으로 꼼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도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미군정이 압수한 일본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보상이었다.
게다가
일본 측 협상 대표였던 구보다는 식민지 시기에 한국에 투자도 하고 근대화도 시켜주었는데, 왜 배상을 해야 하느냐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 아베 총리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일본 극우 세력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 을사늑약·한일합방조약은 무효
배상을 둘러싼 논란은 이렇게 식민지 시기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1945년 이전에 있었던 조약의 해석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나타났다.
1965년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있었던 조약들을 무효로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양국의 견해가 달랐던 것이다.
문제가 된 조약은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이었다.
한국 정부는 두 조약이 모두 체결 당시부터 무효라고 주장했다.
두 조약이 모두 자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무력 시위 속에서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국제법적으로 자의가 아닌 강제에 의해 조약이 맺어질 경우에 이는 모두 무효였다. 을사늑약은 1963년 유엔의 국제법위원회에서 ‘국가 대표에 대한 개별적 압박’에 의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조약’의 하나로 규정되었다.
일본의 입장은 달랐다.
두 조약은 그 자체로서는 무효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측에서 모두 자발적으로 서명을 했기 때문에 무효가 아니고, 그렇다면 일본에 의한 보호통치(1905~1910년)와 식민지 지배(1910~1945년)는 모두 유효한 조치가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일본에 의한 한국의 지배는 국제법적으로 합법적인 것이 된다.
1945년 이전 조약의 해석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약 그 조약들이 자체로서 무효일 경우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요청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배상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제국주의 본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던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은 식민지 시기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은 영연방(Commonwealth Countries)을 결성해 지금까지도 그 틀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이 배상한 국가들은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이 5년여를 점령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었다.
하지만 한국뿐 아니라 이웃 국가에 의해 폭력적으로 식민지 지배나 점령 통치를 경험한 국가들은
식민지 시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아일랜드, 알제리, 폴란드, 핀란드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 한·일, 기가 막힌 묘수
조약 해석에 대한 한·일 정부 사이의 논쟁에서 기가 막힌 묘수가 나왔다.
양국 정부가 각각 자신의 의견대로 해석하기로 한 것이다.
즉, 한국 정부는 조약이 맺어지는 순간부터 무효로,
일본 정부는 일본 제국이 해체되는 1945년부터 무효로 해석하자고 한 것이다.
그래서 조약의 원문에서는 1945년 이전의 조약을 ‘이미(already) 무효’라고 규정하면서 특별한 시기적 조항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배상금 대신 독립축하금을 주었고, 한국은 ‘청구권 자금’이라고 명명하면서 배상금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1965년의 시점에서 본다면 청구권 자금이 배상금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입장이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배상금이 아님으로 인해 현재 일본 정부도 입장이 곤란해졌다.
왜냐하면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이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청구권 자금은 배상을 위한 자금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과 사과의 뜻을 밝히면서도, ‘합법이었지만, 잘못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법적 책임은 없다’는 애매한 입장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2011년과 2012년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배상 판결은 청구권 자금의 애매한 성격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대한민국의 지위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해달라고 한 반면, 일본 정부는 유엔 승인안에 근거해 유일한 정부로 인정하겠다고 주장했다.
즉, 1948년 5월10일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에서만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주장이다.
이것도 결국은 일본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는 모두 한일협정에 반대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굴욕적인 협정에 반대한 것이고,
일본에서는 북한과도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국의 경우 한일협정 반대 시위는 정권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큰 규모로 일어났다. 주한미군사령관의 허가 아래 군대를 동원해 위수령을 선포(6·3사태)해서야 진압이 이루어졌다.
한일협정에 반대했던 야당뿐만 아니라 위수령에 찬성했던 미국도 이 시위로 인해 박정희 정부가 붕괴할 수도 있다고 판단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였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가 모두 동북아시아의 발전과 협력을 위해 한·일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럼에도 반대 시위가 일어났던 것은 그 협정을 통해 풀어야 할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국에서의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서는 한일협정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 밖에도 한일협정은 한·일 간에 풀어야 할 문제들이 모두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조인됐다.
한일협정은 기본관계 조약 외에 재일동포, 문화재, 해상분계선, 경제협력에 대한 조약이 함께 체결되었는데,
1965년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일협정에서 합의한 모든 이슈에 대해 양국 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해상분계선 문제로 1995년 일본은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으며,
1998년 잠정공동수역안이 체결되었지만, 해상분계선과 독도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경제개발이 시급했던 시기에 청구권 자금으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은 소중하게 사용됐다.
그러나 눈앞의 긴급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정작 한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논쟁이 되는 이슈들에 대해 합의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50년이 지난 지금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라 있고 후유증도 계속되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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