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0) 4·19 혁명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092139095&code=210100
한국 사회와 같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는 전 세계에 몇 개 국가밖에 없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빠르고 효율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민주화로 대표되는 사회·정치적 발전이 그 주요 요인이다.
게다가 ‘인민의 세기(people’s century)’라고 불리는 20세기를 통해 시민사회의 힘으로 세 차례에 걸쳐 정부를 바꾼 나라는 없다.
아래로부터의 세 차례에 걸친 변화는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전쟁을 겪고 나서 30년 내에 일어났다.
정부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과대화라고 해야 하는가?
그런 연유로 외국의 학자들은 한국 사회를 분석하면서 ‘강한 국가, 논쟁적인 사회(strong state, contentious society)’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강한 정부가 있으면 시민사회는 약해야 하는데, 강한 정부와 시민사회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맨 앞에 1960년의 4·19가 있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시민사회가 제대로 자리매김하기도 전에 일어난 4·19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이 난무하자 일어난 학생과 시민들은 일주일간의 항쟁을 거쳐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산에서 아시아 최고를 자랑했던 자신의 동상이 무너지는 것을 뒤로하고 하와이로 떠나야 했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서울 시민들이 계엄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승만 대통령이 4·19 혁명 이후 하야 성명을 발표한 뒤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는 사실을 특종보도한 경향신문 1960년 5월29일자 1면.
4·19는 한국 민주주의의 꽃으로 3·1 운동과 함께 헌법 전문에 수록됐다.
한국의 민족주의적 정신은 3·1 운동으로부터, 민주주의 정신은 4·19로부터 비롯됐다. 독재정부하에서도 그 기념식을 금지하지 못할 정도로 4·19의 정신과 성과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 5·16 쿠데타 세력들도 4·19의 민족정신을 이어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 2005년 교과서포럼
그런데
2005년 교과서포럼이 조직돼 4·19에 대한 재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4·19에 대한 논란이 시작됐다.
교과서포럼은 한국사 교과서들이 4·19를 혁명, 5·16을 군사정변으로 규정한 것을 좌편향으로 보고, 4·19를 학생의거, 5·16을 혁명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19를 기념하는 단체들의 강한 반발 속에서 2006년 교과서포럼은 <새로운 한국근현대사> 편집본을 냈다. 교과서포럼은 같은 해 11월30일 <새로운 한국근현대사> 편집본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했고, 급기야 4·19 관련 단체들이 토론장에 들이닥쳐 토론회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들은 ‘혁명을 학생운동으로 폄훼’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4·19를 둘러싼 논란이 5·18 광주민중항쟁의 성격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여론이 악화되자
뉴라이트에서는
같은 해 11월30일 성명을 발표했다.
“교과서포럼은 우리들의 자매단체”라고 전제하면서,
“5·16은 결과적으로 산업화를 성공시킨 세력의 탄생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재해석될 수는 있어도 쿠데타였다는 그 집권 과정의 문제점이 가려져서는 안되며” “4·19는 헌법 전문에 그 중요성이 적시돼 있듯이 당연히 혁명으로 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아울러 교과서포럼에 의한 사태는
“교과서포럼 구성원들의 다수 의견과도 배치되는 일부 소수자들의 사견이 충분한 내부 의견수렴 과정 없이 마치 조직의 입장인 양 유포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하면서 “이번 사안은 결코 뉴라이트의 공식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발을 뺐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4·19는 4·19 혁명 또는 4월 혁명으로 규정됐다.
이 혁명이 ‘미완의 혁명’인지 아니면 ‘실패한 혁명’인지, 혁명이 본격화된 일자로 규정할 것인지, 아니면 1960년 4월에 일어났던 모든 항쟁을 묶어서 4월 혁명으로 할 것인지에 논란이 있지만,
이 사건을 ‘혁명’으로 규정하는 데 있어서는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고 있다.
혁명이라는 것이 단기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1960년 4월의 항쟁을 혁명이라고 규정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승만 정부 붕괴의 가장 중요한 원인에 대한 논쟁.
큰 틀에서 봤을 때 이승만 대통령 하야의 가장 큰 요인이 3·15 부정선거 이후 김주열 사망 사건, 대구 학생시위, 그리고 4·18에서 4·19로 이어지는 학생들의 항거와 이에 대한 시민의 지지에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미국의 개입이 미쳤던 영향에 대한 평가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물러나겠다고 선언하기 전에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시민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의 경무대 방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과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은
전자의 만남을 강조한다. 주변의 ‘간신’들로 인해 4월19일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점차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됐고, 시민·학생 대표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결국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미국의 개입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판단은 다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기 전날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와이로 망명한 이후에도 1960년 3월과 4월에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정부의 발표와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모든 시위는 공산주의자들이 조종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정부는 경찰과 군을 동원해 ‘피의 4월’을 만들었다.
경찰과 달리 군은 시민의 편에 섰지만, 경무대에 남아 있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편지를 보면 4월19일 이후에도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미 국무부의 문서를 보면
매카나기 대사는 미국이 당시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이것이 곧 대통령 하야의 결정적 요인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면, 이승만 정부의 붕괴는 어쩌면 1952년 부산 정치파동부터 계속됐던 ‘이승만 제거계획’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도 있다.
미국과의 환율논쟁이 결국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 4·19 정신은 한국 사회의 하나의 소중한 자산
불의를 참지 못했던 한국 전통의 선비정신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조금씩 사그라들었던 민주주의의 소중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헌법 전문에 규정되어 있는 4·19 정신은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5·18과 6·10을 거쳐 지금도 4·19 혁명이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1950년대 한·미 간 환율논쟁
미, 원조 감축 위해 원화 평가절하 요구
1950년대 한·미 간의 가장 큰 불화는 환율논쟁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원조를 얻고자 했던 이승만 정부와 원조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아이젠하워 정부 사이에 환율을 어떻게 정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인위적으로 환화의 평가절상을 통해 저환율을 유지하려고 했고, 미국 정부는 시장에서의 실질환율을 적용해 평가절하를 통해 고환율을 적용하고자 했다.
미국은 1954년 한·미합의의사록에 근거해 한국군 유지를 위한 비용을 한국 정부에 제공해야 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넘겨주는 대신 한국 정부에 약속한 것이었다. 그런데 환율이 낮게 책정된다면 미국은 한국 정부에 더 많은 원조를 주어야만 했다. 만약 한국군 유지비용으로 100억환이 든다고 가정할 때 환율이 1달러 대 500환이면 2000만달러 상당의 원조를 주어야 했지만, 1달러 대 1000환인 경우 1000만달러 상당의 원조만 해주면 됐다.
당시 아이젠하워 정부의 정책 기조는 긴축을 통한 재정의 합리화였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원조를 감축시키는 것이 중요했고, 이로 인해 한·미 간에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1953년 한국 정부가 통화개혁을 단행한 것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환율을 고정화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로 인해 1959년 신임 주한미국 대사로 매카나기가 부임할 때 가장 중요한 임무가 환율을 인상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스티븐 휴 리 교수).
매카나기 대사 부임 후 이승만 정부에서 환율을 올렸지만, 4·19 혁명 직전에 작은 폭으로 했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한·미 간의 환율에 대한 합의는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에 가서야 해결됐다.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이 시작된 1960년대 이후에는 고환율 정책이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한·미 간에 더 이상 환율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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