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7) 농지개혁 평가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5192154125&code=210100&med_id=khan
1949년 6월21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됐다.
1950년 3월10일 개정법이, 3월25일에는 시행령이, 같은 해 4월28일에는 시행규칙이 공포됐다. 전쟁 중이었던
1951년 피란 국회에서
농림부 관계자는 시행규칙이 공포되기도 전인 1950년 4월15일 이미 농지개혁이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
농지개혁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현실화된 것이다.
수천년 동안 계속되어 온 지주-소작 관계도 청산됐다. 자기 땅을 자기가 경작해서 수확한 쌀을 스스로 소비할 수 있는, 농민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도 농지개혁은 필수적이었다. 땅에 묶여 있는 자본과 노동력을 산업화 과정으로 전이해야 했다.
1980년대 초까지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는 인색했다.
북한에서의 토지개혁(1946년)이 지주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고 소작인과 빈농에게 무상으로 분배했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았던 반면,
남한에서의 농지개혁은 유상으로 몰수하고 유상으로 분배했기 때문에 농지개혁 이후에도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땅을 분배받은 농민들은 땅값을 상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수확량의 30%를 5년 동안 국가에 내야 했다. 총 120%만 상환하고 나머지 30%는 국가가 보상하자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안은 기각되었다.
여기에 더해 한국전쟁 기간에 ‘임시토지수득세’라는 현물세가 등장해 농민들은 매년 수확량의 50%를 내야 했다.
또한 기대와는 달리 농지개혁 이후에 농업생산성도 높아지지 않았다.
녹색혁명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고, 홍수와 가뭄 피해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매년 봄이면 보릿고개에 시달려야 했고, 가을에도 저곡가 정책 때문에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없었다. 정부의 추곡수매에 의지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던 것이 농촌의 현실이었다.
■ 농지개혁, 실패냐 성공이냐
농지개혁을 통한 산업자본의 축적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국가는 지주에게 수확량의 150%에 달하는 지가증권을 땅값으로 주고 땅을 매입했는데, 계획대로 되었다면 지가증권을 받은 구지주들은 산업자본가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기간에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지가증권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게다가 농지개혁법에 따르면 분배받은 토지를 다시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비공개적으로 땅을 축적하거나 명의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지주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박현채와 황한식은 농지개혁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개혁의 주체가 농민이 아닌 지주와 보수적인 정치인들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소작지 중 20%만이 분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더 영세해졌고, 소작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농지개혁의 실패로 농촌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바뀌기 시작했다.
1989년에 출간된 <농지개혁사 연구>는 그 출발점이었다. 농지개혁은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대체로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보상과 등기는 훨씬 더 시간이 지나 이뤄졌지만, ‘분배 예정지 통지’가 나간 시점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장상환과 김성호의 연구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농지개혁 이전에 이미 농지분배가 이루어졌다는 점도 중요했다.
미군정은 일제 총독부 소유의 농지를 신한공사 아래 두었는데, 신한공사는 1947년 이미 농지를 소작인들에게 분배하였다. 또한 정부수립 이후 농지개혁의 실시가 확실해지면서 지주들이 제값을 받기 위해 개혁 이전에 이미 농지를 방매(放賣)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소작지가 분배되었고, 경자유전 원칙이 관철되었다는 것이 장상환의 주장이었다.
한국의 농지개혁은 북한과는 달리 성공적인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개혁’이었다는 것이다.(장상환, ‘토지개혁과 농지개혁’)
김성호 역시 ‘농지분배 일람표의 공고’가 완료된 시점(1950년 3월24일)에서 농지개혁이 완료되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장상환의 주장과 맥을 같이 했다.
농지개혁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김일영 교수에 의해 정치적 평가로 이어졌다.
즉, 한국전쟁 직전에 있었던 1950년 5·30선거에서 야당이 패배한 것은 농지개혁의 결과였으며, 이미 전쟁 이전에 농지개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쟁 발발 직후 북한이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했을 때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명백한 ‘부정선거’, ‘관권개입’과 관계없이 1954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승리한 것까지도 농지개혁의 결과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후 경제학계에서는 <농지개혁사 연구>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지만, 역사학계에서 다시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특히 정병준의 ‘한국 농지개혁의 재검토’는 반론을 제기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병준은 ‘분배 예정지 통지’가 나간 시점을 농지개혁이 완료된 시점으로 봐야 한다는 장상환의 주장이 농민들의 심리적 상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분배된 시점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농지개혁이 완료되는 시점을 농민들에게 상환증서가, 지주들에게 지가증권 교부가 완료되는 때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 농지개혁 논쟁은 현재진행형
당시 신문을 보면 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7월 중순에 가서야 상환증서 발급이 완료될 예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주들은 농지개혁에 반발해 전업대책과 보상신청서 제출을 의도적으로 지연하고자 했기 때문에 지가증권의 발급이 어려웠고, 당시 한국 정부의 행정 능력을 고려할 때 농지분배 사업을 빨리 끝내기도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이 농림부 장관에게 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10월의 시점에서 “농지개혁법안의 실시가 시급히 필요하다”, 서울 수복 이후에는 “농지개혁 실시를 연기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린 것 역시 농지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제시되었다.
오히려 그는 농지개혁은 정책결정자가 의도했던 바가 아니라 전쟁의 부산물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농지개혁 논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왜냐하면 사례 연구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해석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즉, 남한에서의 농지개혁 실시라는 사실을 통해 이승만 정부의 농민 친화적 성격을 주장한다거나, 남한 자본주의의 성공이라는 결과, 또는 그 반대로 농촌과 농업의 포기라는 서로 다른 현실을 근거로 농지개혁을 결과론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이다.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던 개발도상국에 비해 농지개혁을 실시했던 한국과 대만이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농지개혁이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농지개혁 평가에서 중요한 점은 개혁 자체가 한국 사회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다.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지주들이 산업자본가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는가?
농지분배로 받은 대금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었는가?
농지개혁의 결과로 농업 분야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충분한 사례 연구가 진행되기 전에 이루어지는 성급한 평가는 농지개혁에 대한 논쟁이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 될 것이다.
농지개혁은 성공과 실패의 여부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적 질서와 산업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장상환의 지적에 주목해야 한다.
연구가 다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성급한 정치적 평가는 현대사 연구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
한국전쟁 중의 현물세… 세금 낼 사람 사라지자 농민 수확량 절반 거둬
정부는 ‘임시토지수득세’를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걷기 시작했다.
만만한 게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농지개혁으로 인한 지가 상환, 그리고 토지수득세로 인해 수확량의 45~60%를 세금으로 내야 했다.
임시토지수득세는 4·19혁명 직후인 1960년에야 폐지됐지만, 수득세를 내지 못해 연체된 세금은 1962년에 면제됐다.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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