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9) 한국전쟁 해석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6022157495&code=210100&med_id=khan
첫째, 분단이 전쟁의 배경을 이뤘지만, 전쟁은 분단을 공고화시켰다. 냉전 분단체제는 산업화와 민주화로 이어진 우리 사회 모더니티의 구조적 조건을 형성했다.
둘째, 한국전쟁을 연구 분야로 삼은 역사학자와 사회과학자들 중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정치학), 캐스린 웨더스비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역사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의 연구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2>(1981·1990)
커밍스의 핵심 주장은 일제강점기부터 축적돼 온 계급갈등이 한국전쟁의 기원을 이뤘다
그는 식민지시대 적색농조의 투쟁, 해방 직후 지방인민위원회의 활동, 미국의 대한(對韓) 전략과 이와 연관된 냉전의 구조화 속에서 강화된 지주와 농민 간의 계급투쟁에 한국전쟁이 예비돼 있었다
한마디로 전쟁은 갑자기 ‘시작(start)된’ 게 아니라 사회변동의 결과로 ‘도래(come)했다’
커밍스의 분석은 수정주의
수정주의란 미국 국제정치학계에서 전통주의에 맞서 등장한 학파다.
전통주의가 냉전의 원인 제공자로 소련을 지목했다면, 수정주의는 미국의 책임을 주목했다.
이런 수정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커밍스는 다양한 이론적 자원들을 활용해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거시적 분석을 시도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과 폴라니의 자본주의론에 기댄 구조적 접근,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한국 농민혁명까지의 국제정치학·사회학·역사학 연구들을 아우르는 학제적 접근, 해방 전후 한국의 사회변동을 중국·베트남·일본의 사회변동과 견줘보는 비교적 접근은 커밍스 연구를 풍성하게 한 방법론이자 이론틀이었다.
커밍스의 견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원인’보다 ‘기원’에 대한 역사구조적 분석을 제시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의 질문에 대한 응답보다는 전쟁으로 다가가는 20세기 한국 사회의 예정된 진로에 대한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커밍스의 논리와 분석은 사실분석과 가치판단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의 물음은 전쟁이 가져온 비극적 참상을 돌아볼 때,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 캐스린 웨더스비의 비판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를 명확히 규명한 것은 웨더스비와 박명림이었다.
웨더스비는 우드로 윌슨 센터의 냉전국제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러시아 모스크바의 대통령문서보관소에 있던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분석했다(강규형·캐스린 웨더스비, <소련 문서를 통해 본 6·25전쟁의 기원>, 2010).
웨더스비의 핵심 주장은 1950년 6월25일 남한에 대한 대규모 군사행동을 김일성이 창안했고, 이는 소련 스탈린의 후원과 중국 마오쩌둥의 승인 아래 이뤄졌다는 데 있다.
이러한 견해는 전쟁을 내전으로 파악한 커밍스의 수정주의적 견해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은 북한·소련·중국이 함께 계획하고 집행한 국제전이었다는 게 웨더스비의 결론.
하지만 그의 연구에서 아쉬운 것은 전쟁의 결정 과정만을 주목한 나머지 전쟁의 기원·배경·원인·결과에 대한 포괄적 분석은 결여돼 있었다.
이에 박명림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1996)에서 전쟁에 대한 입체적 분석을 시도했다.
■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첫째,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그는
‘식민지 시대 기원론’과 ‘6월25일 기원론’을 모두 거부하고 1945년 ‘분단기원론’.
그는 전쟁의 기원을 길게 1945년 해방과 미·소의 분할점령으로부터, 짧게는 1948년 분단정부의 수립으로부터 설정했다.
박명림이 특히 중시한 것은
1948년부터 1950년까지의 남북갈등을 함축하는 ‘48년 질서’다.
그에 따르면 ‘48년 질서’ 속에서 북한의 리더십이 ‘급진 군사주의’에 경도돼 소련·중국의 후원 아래 한국전쟁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급진 군사주의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구조에 따른 ‘대쌍관계동학’의 결과인 동시에 북한 리더십이 독자적으로 채택한 전략이었다는 게 그의 핵심 주장.
사실판단의 측면에서 박명림의 견해는 커밍스의 견해가 갖는 한계를 넘어 전쟁에 대한 원근법적 분석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박명림은 역사적 사건에 내재한 구조와 행위의 상호관계를 주목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사회과학’에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
한국전쟁의 기원을 규명하기 위해선 전쟁으로 다가가는 사회구조의 거시적 해명이, 한국전쟁의 발발을 규명하기 위해선 그 구조 아래서 움직이는 리더십과 집합행위자 선택의 미시적 분석이 요구된다.
박명림의 연구는 전쟁의 구조적 기원과 행위적 원인을 포괄적이며 미세하게 추적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 마땅하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는 한국전쟁의 국제 논쟁에서 우리 학계의 자존심을 세워준 연구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이뤄진 반면 전쟁이 가져온 결과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정치학)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2014)에서 전쟁의 결과로 ‘반공국가의 건설, 민족의 파괴, 지주계급의 몰락과 해체, 자본가 계급의 창설, 노동자 계급운동의 쇠퇴, 자영화된 농민의 보수화, 미국·일본·주변국들의 동맹으로 이뤄진 동아시아 중추와 부챗살 안보체제의 등장’이 진행됐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한국전쟁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다층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동족상잔의 마당에 외세가 겹들어서 우리의 조국은 이제 무서운 살육과 파괴의 수라장으로 화하고 있다.” 북한이 서울을 지배하던 1950년 9월1일 역사학자 김성칠이 남긴 기록인 <역사 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일기>의 한 구절이다.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1950년대 사회변동이 갖는 일반성과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은 물론 결과와 영향에 대한 연구들이 더욱 활성화돼야 할 이유다.
▲ 한국전쟁 미시사: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
주민 증언 통해 밝힌 후방 마을 학살 갈등
최근 역사학을 중심으로 보통 사람들이 겪은 마을의 작은 전쟁들에 대한 연구들이 진행돼왔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역사학)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돌베개·2010·사진)은
한국전쟁에 대한 미시사 경향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의 갈등 구조다.
박찬승에 따르면 당시 마을에는 과거의 양반·평민 간의 신분 갈등과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 갈등, 친족 내부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종교·이념 갈등 등 복합적 갈등들이 존재했고 그 배경으로는 남북한 국가권력의 개입과 폭력이 놓여 있었다.
박찬승은 10여년간 진도·영암·부여·당진·금산의 마을들을 답사하고 구술을 채록해 연구를 수행했다.
한국전쟁 시기 후방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했다는 점을 돌아볼 때 이 연구는 전쟁에 담긴 참혹한 비극의 또 다른 측면을 생생히 증거한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북한 신천 지역 학살을 다룬 황석영의 소설 <손님>을 떠올리게 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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