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8) 맥아더 재평가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5262151195&code=210100&med_id=khan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
최소한 1990년대 중반 옛 소련 문서가 공개될 때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정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남침론과 북침론(북한과 중국, 옛 소련), 남침유도론(일부 수정주의자)이 제기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을 전달받았다.
여기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의 대화록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리고 위장평화 공세 후 남침을 개시할 것이며, 북한이 남침을 시작할 경우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남한 정부가 자체적으로 몰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들의 예상은 어느 하나도 들어맞은 것이 없었다.
이 자료는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자료였고, 이후 한국전쟁 발발과 관련된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해졌다.
■ 1951년 봄에 끝났어야 하는 전쟁이 왜 2년간 더 계속되었는가?
맥아더는 왜 해임되었는가?
포로교환을 둘러싼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의 공방은 왜 1년6개월이나 계속되었는가?
미국 정부의 문서를 이용한 해외에서의 연구가 선구적 역할을 했다면,
한국 연구자들은 미국의 문서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옛 소련의 문서들도 이용해 한국전쟁의 쟁점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렇게 연구가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적지 않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직후 38선 이북으로의 북진과 중국의 참전, 이 과정에서의 맥아더 장군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2005년 7월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둘러싼 논쟁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 맥아더 장군에 대한 비판은 2005년까지 50여년간 금기 사항 중 하나였다.
이승만 대통령을 지원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을 이끌고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원,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통해 멸공 통일에 다가갔던 맥아더의 공헌에 대해 누가 감히 비판의 칼을 들이대겠는가?
1992년 윤금이 사건과 2002년 미선·효순이 사건은 주한미군뿐만 아니라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한반도에 원자탄을 사용하려 했던,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하려고 했던 점령군의 사령관’이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맥아더 동상 철거와 철거 반대 세력이 인천 자유공원에서 부딪쳤고, 이는 급기야 맥아더 장군에 대해 비판적 글을 썼던 강정구 교수에 대한 친북논란으로 이어졌다.
당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검찰에 대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해 검찰총장에게 불구속 수사를 하게 함으로써 김종빈 검찰총장이 이에 반발해 사임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2005년 9월11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를 놓고 통일운동단체와 보수단체 회원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명장인가, 명령 무시한 군인인가
논쟁의 핵심은
첫째로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이 올바른 결정이었는가의 문제이다.
1950년 유엔이 결정한 유엔군의 임무는 38선 이북으로 북한군을 돌려놓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북한이 더 이상 침략을 하지 못하도록 북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북진이 곧 중국군의 개입을 부를 것이고, 이는 곧 또 다른 세계대전을 부를 것이기 때문에 유엔군이 38선을 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엔군이 38선을 넘은 지 열흘 만에 중국이 참전했다.
둘째로 맥아더의 전술에 대한 평가이다.
한국 사회에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최고의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맥아더를 몸신으로 모시는 무당도 있다.
그러나 1978년 미국의 합동참모본부에서 발간한 합동참모본부사 3권 <한국전쟁>(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1990년에 번역)의 평가는 다르다.
이 책에서 맥아더는 미국의 군 통수권자(트루먼 대통령)나 군 지휘계통에서 상부기관(합동참모본부)의 명령계통을 무시하는 군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취소하지 못하도록 구체적인 계획을 너무 늦게 본국에 보낸 것이 “군의 명령계통을 무시한 첫 번째 사례”였고,
워싱턴의 결정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유엔군이 국경선까지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압록강 근처에 대한 폭격을 지시한 것 역시 “합동참모본부 훈령의 범위를 벗어나 왜곡하여 내린 명령의 마지막이 아니었다”.(290쪽)
또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결정한 정책들을 벗어나는 성명들을 발표했다.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 군 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416쪽)으로 간주했다.
“합동참모본부의 모든 구성원들은 군은 항상 민정당국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종종 피력해왔다. 그들은 이번 경우에 있어서도 모두, 만일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지 않으면 각 계층의 미국 국민이 민정당국은 이미 군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고 비난할 것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다.”(426쪽) 이 점은 맥아더 청문회를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결정적으로 맥아더의 실수는
중국군의 참전에 대한 오판이었다.
맥아더는 중국군이 대규모로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일부 후퇴를 통해 방어적 진지를 구축하라는 본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전격적인 북진을 지시했다.
이는 결국 미국에 거대한 재앙이 되었고, 합동참모본부는 플랜 B로 한반도의 포기와 대한민국 망명 임시정부의 수립까지도 고려해야 했다.
중국의 개입으로 인한 재앙은 미국에 트라우마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 시 미국은 북베트남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중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소련과 중국이 갈등을 벌일 때도 미국은 중국에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1972년까지 미국은 적의 분열을 이용하지 못한 것이다.
2013년 인천상륙작전 63주년을 앞두고 재현되기도 했던 맥아더 동상의 철거를 둘러싼 논쟁은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로부터 시작되었고, 한국 사회 집단지성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온 지 25년이 되었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도 냉전시대에 살고 있다. 맥아더를 둘러싼 논쟁은 남남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전협정 교착 빠지자 미국, 이승만 제거 계획
이승만에 대한 평가 등 비이성적 논쟁의 사례
1990년대 이후 미국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반공포로 석방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반공포로 석방을 둘러싼 논쟁은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진행됐다.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옮겨 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19 혁명, 4월혁명 (0) | 2015.07.29 |
---|---|
한국전쟁의 해석 (0) | 2015.07.29 |
1949년 농지개혁 (0) | 2015.07.29 |
해방전후사 해석 논쟁 (0) | 2015.07.29 |
영원한 금기(禁忌)는 없었다. ‘친일’ (0) | 2015.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