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1) 전후 문학의 세대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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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논쟁이 시들해졌다.
논쟁이 없었다는 게 아니다. 논쟁은 진행돼 왔으되 그 치열함이 약화됐다는 의미다.
왜일까.
한편으론 그만큼 우리 문화가 세련되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문화 내 소통이 활기를 잃은 까닭도 있다. 사회의 제도화와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논쟁이 부드러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논쟁은 치열할 때 그 쟁점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 선명성은 생각의 넓이와 깊이를 더하게 한다.
광복 70년을 돌아보면 지금보다 과거의 논쟁이 훨씬 격렬했다.
좋게 말하면 거침이 없었고, 나쁘게 얘기하면 공격성이 두드러졌다.
초점에서 벗어나 지엽적 문제에 매몰되기도 했고, 때로는 인신공격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렇게 치열한 논쟁은 특히 그 구도가 이념과 세대에 기반을 뒀을 때 더욱 분명한 형태를 띠었다.
한국현대사에서
해방 공간의 논쟁 구도를 이룬 축이 ‘이념’이었다면,
1950년대 전후 시대의 논쟁 구도를 형성한 전선은 ‘세대’였다.
전후세대 문학 논쟁을 주도했던 김동리, 조연현, 서정주, 유종호, 김우종, 이어령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김동리와 이어령의 논쟁
1950년대 세대 논쟁의 주역은 단연 이어령이었다.
전쟁의 폐허가 복구되기 전인 1956년 <우상의 파괴>로 혜성처럼 나타난 이어령은 조연현, 염상섭, 김동리와 세대 논쟁을 벌임으로써 전후 신세대를 대변하는 존재로 부상했다.
<우상의 파괴>, <화전민 지역>(1957), <저항의 문학>(1959)이라는 패기만만한 제목들이 보여주듯 20대 청년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문단의 배덕아’이자 ‘신세대의 총아’였다.
4월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1959년에 전개된 김동리와 이어령의 논쟁은
1950년대 세대 논쟁의 대표격이었다.
이 논쟁은 두 사람이 당시 신구세대의 전형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소설가 김동리는 시인 서정주, 문학평론가 조연현과 함께 문학적 ‘권위’ 그 자체였다.
해방공간에서 그는 좌파에 맞선 우파의 대표 작가이자 이론가였던 동시에 한국전쟁 이후에는 문단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군림했다.
반면 이어령은 막 대학을 졸업한, 시적 감수성으로 빛나는 문체를 구사한 20대 중반의 신예 문학평론가였다.
구세대와 신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떠들썩하게 제대로 좌판을 벌인 논쟁이었다.
논쟁은 이렇게 진행됐다.
1959년 1월 서울신문에 김동리가 ‘본격 작품의 풍작기’라는 글을 통해 신진평론가들의 비평 태도를 비판하자,
신진평론가였던 김우종이 ‘중간소설을 비평함’이라는 글을 통해 김동리를 반비판했다.
이에 김동리가 ‘논쟁 조건과 좌표 문제’라는 글을 통해 김우종을 재비판하자,
이번에는 김동리의 글에 언급된 이어령이 2월 경향신문 지면에 ‘영원한 모순-김동리씨에게 묻는다’라는 글을 발표해 김동리를 비판했다.
여기에 김동리가 ‘좌표 이전과 모래알과-이어령씨에게 답한다’라는 글을 통해 이어령을 반비판하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치열한 논전이 오갔다.
이 과정에서 문학평론가 원형갑·이철범, 소설가 박영준 등이 가세함으로써 김동리와 이어령의 논쟁은 문학을 포함한 문화계 전반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논쟁 과정과 방식은 화려했지만,
그 쟁점과 내용은 빈곤했다.
논쟁의 핵심은 김동리가 ‘지성적’, ‘실존성’, ‘극한의식’이라고 몇몇 작품을 규정한 것이 과연 온당한가에서 시작됐다.
전체적으로 김동리는 신진평론가들의 미숙한 한국어 문장을 비판한 반면, 이어령은 지식의 정확성에 주목해 기성 작가들을 비판했다.
1976년 언론인 손세일이 편집한 <한국논쟁사 2: 문학·어학>에 실린 관련 글들을 읽어보면 논리 대결보다는 용어 해석을 둘러싼 감정 대립이 앞선 논쟁이었다.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신구세대의 일대 격돌이라기보다는 소문만 무성한 잔치에 가까운 논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이 경향신문 1959년 2월9일자 4면에 기고한 ‘영원한 모순-김동리씨에게 묻는다’.
■ 세대 논쟁의 현재적 의미
이 논쟁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어령, 김우종, 유종호 등으로 대표되는 전후 신세대의 문제제기다.
“그때 나는 22세라는 젊음의 재산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 가진 것이라고는 분노와도 같은, 자기(自棄)와도 같은, 광기(狂氣)와도 같은 젊음의 반역뿐이었다. 홀몸이었다. (…) 구세대의 작가나 비평가는 그 어려운 시절에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이 붙은 집에서 바둑을 두고 포탄이 터지는 전선에서 자장가를 노래하는 사람같이 보이기만 했다.”
이어령이 <저항의 문학>(증보판, 1965)에서 한 말이었다.
논쟁의 범위를 넓혀보면 이어령은 한국적 전통이라는 특수성을 넘어서 인류적 보편성을 위한 문학 본연의 의미와 역할을 묻고 있었다.
1950년대 당대로 돌아가면 선배세대가 모두 직무유기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황순원과 안수길의 소설, 김광섭과 김현승의 시에서 볼 수 있듯,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현실과 역사, 삶과 사회에 대한 성찰들은 계속 이뤄지고 있었다.
이어령의 비판이 겨냥했던 것은 권력화된 문단, 무엇보다 기성세대의 빈곤한 문학적 통찰과 상상력이었다.
한국전쟁은 세계적 시간과 한국적 시간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했고,
시인 김수영이 고백했듯 ‘거미처럼 까맣게 타버린 설움’을 느끼게 했다(<거미>, 1954).
폐허와 절망의 현실에서 후배세대가 선배세대의 문화 권력을 비판하고 새 문학적 꿈과 힘을 치열하게 모색하려 했던 것은 자연스럽고 소망스러운 일이었다.
세대 논쟁의 이중적 의미
첫째, 세대 논쟁은 본디 ‘인정투쟁(recognition struggle)’의 성격을 갖는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학문이든 이른바 체계화된 지식은 사회 변화에 대응하며 발전한다. 이 발전은 새로운 논리로 무장된 후배세대가 낡은 논리에 사로잡힌 선배세대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다시 말해 인정을 요구하는 방식을 취한다. 선배세대의 논리가 언제나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세대 논쟁은 결과적으로 그 사회의 문화적 사유와 상상력을 풍요롭게 했다.
둘째, 과거의 논쟁에 비교해 오늘날의 세대 논쟁은 그 활력을 크게 잃은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초반에 진행된 ‘신세대 논쟁’ 이후 사회적 관심을 크게 모은 세대 논쟁은 거의 없었다.
그 일차적인 까닭은, 젊은 세대가 앞선 세대에 도전하기에는 기성 권력과 구조에 과도하게 포위되고 속박돼 있다는 데 놓여 있다.
구조화된 청년 실업과 한층 제도화된 문화 권력의 현실은 1950년대 전후세대처럼 젊은 패기를 발휘하라고 선뜻 말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역사 발전이 도전과 응전으로 이뤄지듯, 문화적 성숙은 젊은 세대의 도전과 앞선 세대의 응전을 통해 성취된다. 바람직한 세대 논쟁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이런 포위되고 속박된 젊음을 기성세대가 먼저 풀어줘야 할 것이다.
▲ 최인훈의 소설 ‘광장’
서문에 “새 공화국 사는 보람”… 4·19 혁명 경험, 전후세대의 문제의식 표출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
<광장>은 1960년 10월 이어령이 편집을 맡고 있던 잡지 ‘새벽’에 발표된 중편소설이다.
그가 <광장> 초판 서문에 쓴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구(舊)정권하에서라면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라는 진술은 당시 전후세대의 문제의식을 집약한다.
‘구정권’은 이승만 정권을, ‘빛나는 4월’은 4월혁명을 뜻한다.
최인훈은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에서, 이후에는 남한에서 살아온 그는 분단 상황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체험했고, 이를 고스란히 <광장>에 담았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사멸했습니다. (…)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명준이 북한에서 발견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명준을 통해 진술된 남과 북의 모습은 광복 이후 한반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광장 없는 밀실’(남한)과 ‘밀실 없는 광장’(북한)은 광복 이후 1950년대까지 한반도에 존재한 두 자화상이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명준은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중립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자살을 감행한다.
이런 소설의 결말은 1950년대 우리 사회에서 중도의 비극을 함의한다.
최인훈은 현실의 좌파와 우파로부터 모두 벗어나려는 자유주의를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의 전후 현실에서 이 자유주의는 그 어디에도 닻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젊은 세대의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고통스러운 열망의 끝에 최인훈이 ‘빛나는 4월’이라고 부른 1960년 4월혁명이 존재했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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