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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3) ‘5·16’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6302149235&code=210100&med_id=khan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당시 박정희 소장(오른쪽)이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서 있다. | 연합뉴스
‘5·16을 쿠데타로 보느냐, 혁명으로 보느냐’
교육부에서는 역사 교과서에서 5·16을 ‘군사정변’으로 규정하고 있다. 군인들에 의해 큰 정치적 변동이 생겼다는 것이다.
1961년 5월16일에 발생한 정치적 변동이 혁명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쿠데타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규정은 없다.
사전적 의미에서
쿠데타는
‘국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력 등의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권을 빼앗기 위해 일으키는 정변’이다.
혁명은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장악하던 계층을 대신해 그 권력을 비합법적으로 탈취하는 과정’이다.
쿠데타와 혁명의 공통점은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곧 법을 넘어선 행위를 의미한다. 차이점은 목적과 과정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군사정변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5·16은 혁명의 성격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정부가 발간한 <군사혁명사>나 박정희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을 보면 사회체제 변화를 위한 의지가 충만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봉건적인 사회 관습을 없애고, 1950년대의 비효율적인 부패 구조를 개혁한다는 목표와 함께 불균형적인 한·미관계도 개혁 대상의 하나였다.
아울러 5·16이 혁명으로 규정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득권층을 대신해 새로운 계층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검증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존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세력들이 사회체제의 변화를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에서 모두 경험했던 것이다.
■ 5·16 주도세력은 하극상 장교들
5·16을 주도한 세력들은 분명 기존의 주류 세력이 아니었다.
1950년대 정부와 연결돼 부정부패를 주도했던 군인이 아니었고, 오히려 민주당 정부 시기 그러한 군인들을 몰아내자고 주장하면서 하극상을 일으켰던 장교들이었다. 물론 영관급 장교들을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고 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1962년부터 시작된 민주공화당을 창당하는 과정 역시 새로운 세력들을 흡수하는 과정이었다. 부산 지역에서 지역운동을 하다가 김종필에게 스카우트된 예춘호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1950년대의 기득권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지역에서 열심히 일하는 새로운 일꾼들이 충원되었다. 기존 정권과 관계없는 지식인, 관료들도 군사정부와 민주공화당에 충원됐다. 이 정도면 5·16을 혁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문제는 과정과 결과이다.
군사정부는 농촌의 고리채를 정리하고 중소기업을 육성하며, 이승만 정권과 결탁했던 부정축재자를 구속했다.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소위 ‘깡패’들도 모두 구속했다.
기존의 사회체제를 완전히 바꾸려는 듯이 보였다. 군사정변이 국민의 뜻과 관계없이 일어났지만, 군사정부가 하는 정책은 국민이 원하는 바였다. <군사혁명사>에서도 5·16을 민족혁명이라고 했다. 여기까지였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구악 소탕령’에 의해 검거된 폭력배들이 군인들의 인솔 아래 플래카드를 들고 줄지어 걷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리채 정리는 실패했고, 부패한 기업인들은 모두 사면했다.
농민들은 고리채를 신고하면 나중에 돈을 빌릴 곳이 없기 때문에 신고하지 않았다.
대기업을 경영하는 부정축재자들을 사면하니 중소기업 육성이 어려워졌다. 오히려 ‘4대 부정’ 사건으로 스스로가 부패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공화당과 행정부에는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 시기 기득권 세력들이 합류했다.
경제적으로 볼 때 1962년의 통화개혁이 실패하는 과정이 그랬고, 1963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수정되는 과정이 그랬다.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이집트의 나세르 정책을 벤치마킹해 새로운 체계를 만들고자 했던 군사정부의 계획은 실패했다.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라는 ‘혁명공약 6항’도 그 실행을 연기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미국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민정이양이 빨리 이어지지 않을 경우 한국에 대한 지원을 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어쩌면 암살되기 전에 동맹국 지도자에게 보낸 마지막 친서였는지도 모른다.
민정이양은 이루어졌지만,
군사정변을 주도한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민간인인 것처럼 정부에 참여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군정을 연장했다.
한일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거행함으로써 5·16이 더 이상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였다고 마침표를 찍었다.
■ 미국, 5·16 쿠데타 전 정보 건네줘
사실 5·16과 관련해 더 중요한 점은
첫째로 60만의 대군이 있는 한국에서 어떻게 3200여명만이 동원된 쿠데타가 가능했는가를 밝히는 점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미국과, 5·16 쿠데타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했던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 사이에서 누가 더 큰 책임이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전자의 입장은 쿠데타가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을 미국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5·16 한 달 전에 이미 박정희가 주도하는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장면 정부에 전달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후자는 쿠데타가 발발한 날 아침 박정희 소장과 윤보선 대통령의 만남을 강조한다. 윤보선 대통령은 불법적 쿠데타를 진압하기보다는 오히려 무너져야 할 정부가 무너졌다고 하면서 쿠데타를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쿠데타 이후에도 당분간 대통령직을 그대로 수행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의 쿠데타에 대한 입장이 애매했기 때문에 이 논쟁의 결론을 내는 것은 어렵지만, 이 논쟁은 5·16뿐만 아니라 한국현대사 전체를 해석하는 관점과 관련돼 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 외세의 규정력과 내부의 역할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 논쟁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로 신화로부터 벗어나 5·16과 군사정부를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5·16과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두 개의 극단적인 평가만이 존재하고 있다.
두 극단적인 평가는 자신들의 평가를 하나의 믿음으로 설정해 놓고, 자신의 시각과는 다른 해석에 대해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5·16과 군사정부에 대한 연구는 신화적 해석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예컨대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수출주도형 산업화 계획이 아니었고 균형성장론에 근거한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이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민주공화당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다.
1969년 삼선개헌 이후의 민주공화당은 그 이전과 다른 정당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왜 일어난 것일까?
그 변화를 이끄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성취를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비판만 하자는 것도 아니다.
사실규명을 통해 긍정과 부정 중 한 쪽으로만 치우쳐 있는 신화를 해체하자는 것이다.
신화 해체의 과정은 5·16뿐만 아니라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성격을 밝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 “5·16 군사정부, 화교 돈 끌어내려 통화 개혁”…
미국 압력으로 한 달 만에 실패로 끝나
1962년 6월 군사정부는 통화개혁을 실시했다.
통화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었다.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실시했던 1953년의 통화개혁과 달리
1962년 통화개혁의 목적은 국내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었다. 통화개혁을 하면서 모든 은행계정을 봉쇄한 것이다. 구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해주기는 했지만, 은행에 있는 돈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국이 발끈했다. 케네디 정부는 군사정부가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시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인도와 유사하게 정부가 산업공사라는 것을 만들어 국가가 직접 투자하는 정책을 실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계획을 만들고 직접 투자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압력으로 군사정부는 한달 만에 모든 은행계정을 풀어야 했다.
국내 자본을 축적하려 했던 군사정부의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통화개혁을 추진했던 군사정부 관계자들은 모두 요직에서 떠나야 했고,
이승만 정부 시기부터 활동했던 전문관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당시 경제관료의 회고에 따르면 통화개혁의 목적은 현금을 직접 보유하고 있던 화교들의 돈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막상 화교들이 신고한 자금이 얼마 되지 않아 실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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