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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9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 2015.07.29 오보로 시작한 1945년 찬탁과 반탁
- 2015.07.29 왜 분단되었는가- 외인론(外因論)과 내인론(內因論)
- 2015.06.29 트루먼이 맥아더에 한국전쟁 무력사용 승인 비밀전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3) 좌우파 문학 논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202205255&code=210100
ㆍ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이뤄진 문학 논쟁의 핵심은 민족문학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있었다. 문학이 문화를 주도하던 당시 이 과제는 결국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의 문제와 분리되기 어려웠다. 이런 측면에서 계급문학을 주장하든 순수문학을 표방하든 문학 논쟁은 새로운 국가와 사회의 건설이라는 정치 과정과 긴밀히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광복에 담긴 의미가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의 건설
이 건설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1945년에서 1948년까지의 이른바 ‘해방 공간’ 3년 동안 진행된 미군정, 대한민국 건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분단 시대의 개막은 현대사의 구조적인 조건을 형성했다.
광복에서 한국전쟁 발발에 이르는 5년이 결코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기간에 현대 국가가 등장했고, 시민사회는 분출하고 폭발했다.
이 열정과 폭풍의 시대의 한가운데 놓인 것은 이념 논쟁이었다.
새로운 국가와 사회 건설에서 우파와 좌파는 서로 다른 기획을 제시했고, 공론장에서 치열하게 격돌했다.
이러한 이념 논쟁에서의 문학 논쟁 의의
첫째, 당시 문학은 시민사회와 문화를 주도했다.
둘째, 문학 논쟁은 우리 사회 모더니티 이해의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1949년 스물여덟 살을 맞이한 시인 김수영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에는/ 안경이 걸려 있고/ 내가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처럼/ 그의 눈은 깊이 파지어서 (…) 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소”(시 ‘아버지의 사진’)라고 고백했다. 이 진술에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전통에의 애착과 그 전통으로부터 결별하려는 의지라는 애증병존의 자의식이 담겨 있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이뤘는데,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 임화 대 김동리의 문학 논쟁
일제강점기에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주도한 시인 임화는 해방 이후 대중적 참여를 통한 민족문학의 수립을 주창했다(왼쪽 사진). 우파 쪽 문학이론의 선봉에 섰던 소설가 김동리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순수문학이 민족문학이라고 역설했다(오른쪽).
논쟁은 본디 두 차원에서 진행된다. 하나는 서로의 견해와 주장을 비판하고 반비판하는 직접적인 논쟁이라면,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논리와 세계관이 충돌하고 경쟁하는 포괄적인 논쟁이다. 후자의 의미로 논쟁을 이해할 때 광복 직후 좌우파 문학 논쟁을 주도한 이들은 임화, 이원조, 한효, 김동리, 조연현, 조지훈이었다.
먼저 포문을 연 이들은 좌파 쪽 이론가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주도했던 임화는 계급성·당파성보다 대중성·민족성을 중시했다. 그가 겨냥한 것은 광범위한 대중적 참여를 통한 민족문학의 수립에 있었다. 이육사의 동생인 이원조는 이런 좌파적 민족문학론을 인민민주주의 민족문학론으로 개념화했다.
인민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은 무산계급을 중심으로 지식인·농민·소시민이 결합해 민족의 해방, 국가의 완전독립, 토지 문제의 평민적 해결을 추구하는 온건좌파 문학론이었다.
반면 한효는 민족성보다는 계급성을 중시했다. 그는 예술을 이데올로기로 이해하고, 이데올로기는 당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광범위한 계급연합을 추구한 인민민주주의 민족문학론에 맞서 무산계급 단일독재를 주장한 한효의 견해는 급진좌파 문학론이었다.
좌파 문학계 안에서 이러한 이론적 차이는 문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당시 남로당 노선과 북로당 노선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파 쪽 문학이론의 선봉에 섰던 이는 소설가 김동리였다.
김동리는 인간성 옹호의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순수문학이 민족문학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민족문학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을 발견하고 그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생(生)의 구경적 형식’ 탐구였다.
문학평론가 조연현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문학이 정치에 예속되는 것을 비판하고, 문학과 정치의 분리를 강조했다. 특히 조지훈은 본래의 가치와 사명에 주력하는 문학의 역할을 주목했다.
우파 문학이론이 순수문학을 부각시켰다고 해서 정치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나라 만들기가 치열하게 모색됐던 당시에 문학은 처음부터 정치와 분리되기 어려웠다.
문학이론은 다양한 문학운동 조직들과 긴밀히 결합됐고,
이 조직들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을 의식하고 있었다.
좌파의 대표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 창립대회에 소련 총영사가, 우파의 대표 조직인 조선문필가협회 창립대회에 미군정관이 참석한 사실은 당시 문학의 정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좌익들이 1947년 5월1일 서울 남산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있다.
우익들이 1947년 8월15일 광주 중앙공립국민학교에서 해방 2주년 기념식을 주최하고 있다.
■ 문학 논쟁의 현재적 의미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고비로 문학계 헤게모니는 점차 우파에게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좌파 문학이론을 주도했던 임화·이원조·이태준은 이미 월북한 상태였다.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1947~1948년에 진행된 김동리와 김동석의 논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학평론가 백철로 대표되는 중간파의 활동이었다.
문학평론가 김동석은 김동리의 순수문학론이 광복이 이뤄진 상황에선 존재할 근거가 부재하다는 점을 비판하고, 인민의 생활 묘사에 주력하는 리얼리즘 문학론을 제시했다. 이에 김동리는 생활을 넘어서 삶의 본질적 의미를 추구하는 고전으로서의 민족문학론으로 맞섰다. 평론과 대담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논쟁은 당시 좌파와 우파의 논리를 반복한 채 감정적 대응으로 진행된 아쉬움을 남겼다.
중도적인 백철은 좌파의 조급함과 우파의 완고함을 모두 비판했다.
그는 중간파적 문학이론을 작가가 놓인 현실을 주목하는 ‘신현실주의파’라고 명명하고, 좌우파와 구별되는 새로운 리얼리즘과 윤리를 부각시켰다.
정부 수립 이후 우파가 문단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황에서 이러한 백철의 논리는 영향력이 크지 않았지만, 당시 중간파 작가들인 염상섭·계용묵·황순원 등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유용한 문제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직후 문학 논쟁에
국문학자 김윤식이 날카롭게 지적하듯
해방 공간은 ‘역사를 선택할 수 있는 참으로 희귀한 공간’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문학의 이념적 대결을 격화시킨 셈이었다.
7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광복 시기에 이뤄진 문학 논쟁에는 낡음과 새로움이 공존한다. 먼저 그 낡음은 광복 이후 그동안 누적된 역사의 무게로부터 비롯된다. 민족문학에서의 ‘민족’은 이제 세계화의 진전과 다문화사회의 도래를 맞이해 새롭게 재구성돼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한편 그 새로움은 문학으로 대표되는 예술의 본래적 의미에서 비롯된다. 민족문학에서의 ‘문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의 재현인가, 아니면 이상의 추구인가. 문학으로 대표되는 문화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의미는 개인 및 사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과 해명에 있다.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한 유토피아적 기획들이 치열하게 경쟁했던 광복 직후 문학 논쟁은 우리 문화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여전히 작지 않은 메시지를 안겨준다.
▲ 광복 직후 가장 주목받은 작가는 이태준과 황순원이다.
이태준, ‘해방 전후’서 좌파로의 변모 과정 담아
황순원,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이념논쟁 성찰
이태준은 일제강점기에 9인회를 이끌던 순수문학의 대표 소설가이자 문장론의 고전인 <문장강화>의 저자였다. 광복이 되자 그는 좌파로 변신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해방 전후>(1946)는 이태준의 자전적 중편소설이다.
주인공 현의 행적은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소시민적 소설가에서 이념문학을 추구하는 좌파 소설가로 변모해가는 작가 내면의식의 변화를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직후 지식사회의 현실과 풍경을 생생하게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1946년 월북한 그는 불행한 말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광복 당시 고향인 평안남도에 머물러 있던 황순원은 1946년 월남했다. 광복 직후 황순원은 중도적 입장을 견지했다. 좌파 문학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문학’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 탐구였다.
<목넘이 마을의 개>(1948)는 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황순원의 단편소설이다. 버려진 개 신둥이의 강인한 생명력과 그 새끼들을 돌보는 간난이 할아버지의 배려는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잘 보여준다.
오랫동안 전승된 겨레의 이야기를 소설화해 이념논쟁으로 뜨거웠던 광복 직후 현실을 우회적으로 성찰하려는 황순원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태준(왼쪽)·황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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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2) 찬탁과 반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072226155&code=210100
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의 1면 톱기사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란 제목의 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 1면 톱기사. 정용욱 서울대 교수는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이란 글에서 동아일보는 3상회의 결정이 나오기 전 왜곡된 보도를 했고, 미군정은 오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지적했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미국, 소련, 영국의 외상들이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에 합의했는데, 특히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오보였다
■ ‘3상’ 결정안, 신탁통치안 아니다
결정안이 곧 신탁통치안은 아니었다.
전체 4항 중 3항에 신탁통치와 관련된 내용이 있지만, 1항과 2항은 한국인들의 대표를 구성원으로 하는 단체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공동위원회를 설립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신탁통치안도 미소공동위원회와 한국인들이 구성한 단체 사이의 협의를 통해 구체적인 사항을 정하도록 규정하였다.
전체 4항 중 미국이 주장한 신탁통치안은 3항에만 포함돼 있었고, 1항과 2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소련의 주장이 수용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미국이 찬탁이고, 소련이 반탁이었던 것이다.
▲ ‘3상회의’ 결정의 본질
유럽 확보가 급한 미·소, 신탁이든 독립이든 한국에서 빨리 발을 빼야 했다
미국은 왜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했는가? 소련은 왜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이른 시간 내에 한국에 독립정부를 세우고자 했는가? 방식은 다르지만, 미국과 소련은 한국에서 가능한 한 빨리 손을 빼고 싶었다. 미국과 소련의 우선적 관심은 한반도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과 소련은 고민에 빠졌다. 과거 유럽과 일본에 의해 분할돼 있었던 세계를 미국과 소련이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세계대전을 통해 유일하게 본토가 피해를 보지 않은 국가였고, 소련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냉전 체제 아래에서 공산권의 큰 형님 역할을 해야 했다. 문제는 미국과 소련이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컨트롤타워였다고 하더라도 그 힘이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제국을 이끌어본 경험도 없었다. 식민지가 없었던 소련은 차치하더라도 미국은 1945년 이전 유일한 식민지인 필리핀마저도 직접 통치할 힘이 없어 신탁통치를 실시했다.
대외정책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냉전정책의 창시자인 케난은 미국이 세계대전을 일으킬 능력을 갖추고 있는 영국과 독일, 그리고 일본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 집중한 뒤 이들과 함께 세계를 경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7년 제출된 미 군부의 문서에서 미국이 원조해야 하는 16개 국가 중 한국의 순위는 13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미국 정부의 재정을 아껴야 했다. 소련의 우선순위는 동유럽이었다. 소련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모두 서부전선이었다.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의 스탈린그라드는 2차 대전 최고의 격전지였다. 소련으로서는 동유럽이라는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게다가 한반도는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하는 대로 두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미국과 소련의 이러한 핵심적인 정책 목표를 읽지 못해 자기들끼리 이전투구에 빠졌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인들의 몫이 됐다.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았던 당시 정치인들의 실수를 지금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80년대 이후
신탁통치안의 성격에 대한 분석이 시작된 이래 ‘역사비평’은 기존의 찬반탁 논쟁의 해석을 뒤집었다. 그 시작은 동아일보의 오보를 밝히는 것이었다. 특히 정용욱은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이라는 글을 통해 동아일보의 보도가 3상회의 결정이 나오기도 전에 왜곡된 보도를 했고, 미군정은 이러한 오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밝혔다.
여하튼 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의 1면 톱기사 이후 10일간 한반도는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동아일보의 보도가 나간 지 3일 후 동아일보 사장이자,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였던 송진우가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그가 신탁통치안을 지지한다는 소문이 난 직후 과거 자신의 경호원이었던 사람들에게 암살된 것이다.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튿날인 12월31일 임시정부는 포교령인 국자 1호, 국자 2호를 발표했다.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기 위한 총파업을 통해 정권을 접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라 전체가 마비되었다.
화가 난 미군정 사령관은 1946년 1월1일 김구를 소환했고, 총파업은 하루 만에 끝났다.
1월3일 또 하나의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은 동대문운동장에서 ‘3상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 결정을 내렸다. 신탁통치 반대 모임으로 알고 나갔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틀 후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박헌영은 이 결정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은 좌익세력에게 독(毒)이 되었다. 박헌영이 소련의 일국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있으며, 한국이 소비에트 연방의 하나로 편입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보도된 것이다.
박헌영 본인과 소련 타스 통신이 반박했음에도, 보도 내용은 사실로 각인되었다. 이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에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매판 세력이 되었다.
신탁통치가 보도된 지 열흘이 지나면서 정치권은 잠시 이성을 되찾기도 했다.
1월8일 4개 주요 정당 지도자들이 시내 모처에서 회합을 가졌다. 우파의 한국민주당과 국민당, 좌파의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의 대표가 모였다. 이들은 합의문을 발표했다.
첫째로 모스크바 3상회의의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신탁통치안은 추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둘째로 정치적 테러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송진우의 암살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합의는 이틀도 지나지 않아 무효가 되었다.
정치인들에게 합리적 선택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우파에서 합의를 깼다. 신탁통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3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반탁운동은 곧 소련을 반대하는 운동이며, 이는 곧 반공운동이 되었다. 3상 결정을 지지하는 좌파는 신탁통치를 원하는 소련의 비밀 지령을 받았다고 규정되었다.
반탁운동 진영은 3상 결정을 찬성하는 좌파를 찬탁(신탁통치 찬성) 진영이라고 불렀다.
반탁운동은 민족주의 애국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찬반탁 논쟁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명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반탁운동 세력이 대한민국의 수립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우익 중에서도 3상 결정을 지지한 인사들은 남한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야당을 이끌었던 유진산이나 이철승도 모두 반탁 청년단체 출신이었으며, 사회 원로들도 마찬가지였다. 남북분단은 좌우익 분단이 아니라 찬반탁 분단이었다.
1980년대까지 30년이 넘도록 찬반탁 논쟁에 대한 반탁운동 세력의 해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좌익은 물론 우익의 민족주의자들 중 일부도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했는데, 이들이 신탁통치를 찬성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따라서 ‘찬탁’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그렇다면 찬반탁 논쟁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으며, 찬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력은 국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내용은 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었다.
오히려 과거 반탁운동의 정통성에 반하여 반탁운동이 분단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정치운동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만약 3상 결정에 대해 국내 정치세력들이 모두 동의했다면 분단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탁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 정책에 협력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민족주의자로 포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좌익이 갖고 있던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돌려놓고자 한 정치적 시도였다고 분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완범은 좌익의 3상 결정 지지가 소련의 비밀 지령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좌익의 음모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이영훈은 1945년 10월부터 5도행정국을 만들고, 1946년 2월에는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소위 민주개혁을 한 북한이 남한보다 먼저 분단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3상 결정의 내용을 곧 신탁통치안으로 볼 수 없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1945년 12월28일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대립구도를 재편했다는 사실이다. 해방이 된 한국 사회에서 민족운동을 한 세력과 일본 제국주의와 그들의 전쟁을 지지한 세력 사이의 대립구도가 3상 결정으로 인해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재편된 것이다.
1946년 2월 38선 이남에서 민주의원(우익)과 민전(좌익)의 수립은 그 출발점이었다. 3상 결정을 둘러싼 논쟁, 즉 소위 찬반탁 논쟁은 1980년대 이후의 연구를 통해 그 실체와 성격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수정주의 역사학의 가장 큰 성과였다. 그러나 논쟁을 통해 만들어진 좌우 대립의 정치구도는 분단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미 국무부에서 파견된 윌버 장군이 1947년 3월13일 김구 반탁독립투쟁위원장(오른쪽)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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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312216475&code=210100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분단 내인론을 위한 연구를 촉발
식민지 시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한반도에서의 지주와 소작인 간의 계급적 갈등은 해방 후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한반도는 ‘점화만 하면 폭발할 화약통’이었다
이후 분단에 대한 연구는 주로 내적 요인에 집중되었고,
<남로당 연구>나 서중석의 연구는 국내에서 나온 내인론
이를 전후해 찬반탁 논쟁, 좌우합작운동, 남북협상 등에 대한 연구.
또 금기시되었던 1946년 가을의 소위 9월 총파업과 추수폭동, 4·3 항쟁이 활자화돼 나오기 시작했다.
정작 커밍스는 외인론에 기반을 둔 연구자였다.
그는 세계체제론에 기반을 둬 연구를 진행했다. 세계 중심부의 냉전 상황이 한반도에 내재화하였다는 주장이다. 한반도 내부 상황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 군정의 통치정책은 그 혁명적 힘을 주저앉혔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1945년 이후 동북아시아의 재편은 그 이전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부활하는 과정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분단 외인론은 한국의 모든 역사교과서에서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수정주의와 뉴라이트에서 모두 수용하고 있다.
그 본질적인 책임의 당사자가 미국인지, 아니면 소련인지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 미·소 간의 냉전이 한반도에 내재화되면서 분단이 형성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물론 평가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수정주의는 분단국가 수립에 기여한 미국과 국내 보수세력을 비판하는 반면, 뉴라이트는 냉전이 내재화되는 것은 ‘필연적’ 과정이었기 때문에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이나 남북협상과 같은 정치인들의 노력은 무의미하거나 좌익의 전술에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내인론과 외인론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답보상태
일부에서는 내인론과 외인론을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두 원인이 실제로 어떻게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중 어떠한 측면이 더 결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은 결여돼 있다.
분단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먼저 비교사적 연구로
전범국이 분할점령된 유럽과는 달리 왜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분단되었는가? 일본의 패망 이후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국가들은 바로 독립을 얻지 못했던 반면 유독 왜 한국만 곧바로 독립이 되었는가?
한국의 독립은 1943년 12월의 카이로 선언을 통해서 처음 제기됐다.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미국은 일국을 분할점령하는 유럽 방식과는 달리 제국을 분할함으로써 일본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아시아에서 추구했다. 한국의 독립과 대만이 중국으로 복귀한 것은 그것을 의미했다. 소련이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아시아의 상황은 미국이 소련의 참전을 요구하면서 급변했다. 미국은 태평양에서의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스탈린에게 참전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만주에 대한 이권을 노리면서 일본이 항복하기 일주일 전 참전을 결정했다. 참전하자마자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의 북부로 진격했다. 일본의 관동군은 예상과 달리 급격하게 무너졌다.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진격을 막아야 했고, 이것이 일반명령 1호로 합의되었다. 한반도보다는 만주와 홋카이도 점령에 더 관심이 있었던 소련은 38선에서 진군을 멈추는 데 합의했다. 한반도의 분할점령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던 미국과 조금이라도 더 이권을 얻어내고자 했던 소련의 잔머리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 분단의 시점 문제
1945년의 분할점령을 곧 분단으로 보아야 하는가? ‘일반명령 1호’에 따라 미·소에 의한 분할점령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인 조치였다. 일반명령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의 분할, 특히 중국·만주와 인도차이나 지역(16도선)의 분할을 규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지역들이 모두 분단된 것은 아니다.
■ 한국에서만 아직까지 분단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데 대한 원인을 분석
이는 분단의 원인과 해법을 동시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단을 극복한 다른 나라에서 외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동했다면,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한국에서는 분명 외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한반도에서 작동하고 있다. 남북갈등뿐만 아니라 남남갈등조차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쟁범죄자들이 제대로 처리되었던 지역과 그러지 못했던 지역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범들이 처리된 지역에는 극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극우가 없으면 극좌도 공존이 불가능하다. 좌와 우, 중도만이 있다.
그러나 전범이 부활한 지역에서는 극우와 극좌가 적대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진정한 좌우나 중도가 힘을 얻기 어려운 구도다.
중국의 존재도 한국의 분단 문제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와는 달리 완벽한 공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북·중관계 역시 분단 문제 고찰의 핵심적 내용이다.
지금도 한반도의 분단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적인 역학관계는 내부와 외부의 요인들이 서로 결합하고 있기에 70년 전과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에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연구와 논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 카이로 회담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
카이로 선언의 ‘적절한 과정을 거쳐’가 그것이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인지,
또 38선은 언제 확정되었는지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첫째로 다른 나라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음에도, 한국은 길지 않은 선언문 속에 직접 언급되었다는 점,
둘째로 일본이 ‘탐욕’으로 차지한 영토에 대해서는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킨다는 점이었다.
한국에 대한 언급은 장개석이 한반도에서 자신과 가까운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의도와 관련이 있다. 또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식민지 시기에 계속해온 독립운동의 결과이기도 했다.
1945년의 시점에서 두 번째 내용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미래를 규정했다.
원래의 위치로 복귀시킨다는 것은 독립이 아니라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복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영국과 미국이 과거 식민지 지역으로 복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그들의 식민지를 유지했던 것과 같은 논리였다. 이로 인해 1945년 이후 한국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는 옛 제국주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독립전쟁이 계속됐다. 베트남 전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1945년 9월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 군함 미주리호에서 우메즈 요시지로 일본군 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왼쪽부터)는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카이로 선언’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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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의 무력 공격을 격퇴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한국에 제공할 것을 회원국에 권고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한 직후
트루먼이 맥아더에 한국전쟁 무력사용 승인 비밀전문
극동사령부 미국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Group·KMAG)의 보고내용은
"북한이 24시간 이내에, 예를 들어 화요일(27일)이나 수요일(28일) 서울을 함락할 능력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군 참모장은 서울의 함락이 한국의 함락이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일본 도쿄시각으로 (27일) 오전 10시 한국군 3사단과 5사단이 서울 북쪽에서 소규모 작전을 전개했지만, 이것으로 침략을 막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지난 이틀간 서울을 함락하려고 했던 북한의 탱크가 서울 교외로 들어오고 있다"며 "한국은 정부를 남쪽으로 이전했고 군사고문단의 통신은 대구에 개설됐다"
"한국군이 북한군의 공세에 저항할 수 없는 상태"
트루먼 대통령이
유엔 안보리 결의를 준수해 한국군을 지원하기위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하달할 것을 지시했다.
극동사령부 예하 해군과 공군 전개에 대한 모든 제한이 없어진다. 한국군에 대해 가장 완전하고 가능한 지원을 제공할 것"
38선 이남의 모든 북한 탱크와 화기, 군 병력들, 그리도 다른 군사목표들이 극동사령부 예하 공군의 공격 대상이 된다
목적은 한국 내에서 북한군을 정리하려는 것
해군은 "38선 이남의 연안과 바닷가에서 제한 없이 전력을 사용할 수 있다"
"모든 가용한 수단을 동원해 존 무치오 주한 미국대사와 한국군 지도자들, 그리고 한국 민간 관리들에게 이 같은 결정사항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6/29/0200000000AKR20150629005500071.HTML?input=119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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