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312216475&code=210100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분단 내인론을 위한 연구를 촉발
식민지 시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한반도에서의 지주와 소작인 간의 계급적 갈등은 해방 후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한반도는 ‘점화만 하면 폭발할 화약통’이었다
이후 분단에 대한 연구는 주로 내적 요인에 집중되었고,
<남로당 연구>나 서중석의 연구는 국내에서 나온 내인론
이를 전후해 찬반탁 논쟁, 좌우합작운동, 남북협상 등에 대한 연구.
또 금기시되었던 1946년 가을의 소위 9월 총파업과 추수폭동, 4·3 항쟁이 활자화돼 나오기 시작했다.
정작 커밍스는 외인론에 기반을 둔 연구자였다.
그는 세계체제론에 기반을 둬 연구를 진행했다. 세계 중심부의 냉전 상황이 한반도에 내재화하였다는 주장이다. 한반도 내부 상황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 군정의 통치정책은 그 혁명적 힘을 주저앉혔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1945년 이후 동북아시아의 재편은 그 이전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부활하는 과정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분단 외인론은 한국의 모든 역사교과서에서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수정주의와 뉴라이트에서 모두 수용하고 있다.
그 본질적인 책임의 당사자가 미국인지, 아니면 소련인지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 미·소 간의 냉전이 한반도에 내재화되면서 분단이 형성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물론 평가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수정주의는 분단국가 수립에 기여한 미국과 국내 보수세력을 비판하는 반면, 뉴라이트는 냉전이 내재화되는 것은 ‘필연적’ 과정이었기 때문에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이나 남북협상과 같은 정치인들의 노력은 무의미하거나 좌익의 전술에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내인론과 외인론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답보상태
일부에서는 내인론과 외인론을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두 원인이 실제로 어떻게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중 어떠한 측면이 더 결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은 결여돼 있다.
분단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먼저 비교사적 연구로
전범국이 분할점령된 유럽과는 달리 왜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분단되었는가? 일본의 패망 이후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국가들은 바로 독립을 얻지 못했던 반면 유독 왜 한국만 곧바로 독립이 되었는가?
한국의 독립은 1943년 12월의 카이로 선언을 통해서 처음 제기됐다.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미국은 일국을 분할점령하는 유럽 방식과는 달리 제국을 분할함으로써 일본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아시아에서 추구했다. 한국의 독립과 대만이 중국으로 복귀한 것은 그것을 의미했다. 소련이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아시아의 상황은 미국이 소련의 참전을 요구하면서 급변했다. 미국은 태평양에서의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스탈린에게 참전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만주에 대한 이권을 노리면서 일본이 항복하기 일주일 전 참전을 결정했다. 참전하자마자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의 북부로 진격했다. 일본의 관동군은 예상과 달리 급격하게 무너졌다.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진격을 막아야 했고, 이것이 일반명령 1호로 합의되었다. 한반도보다는 만주와 홋카이도 점령에 더 관심이 있었던 소련은 38선에서 진군을 멈추는 데 합의했다. 한반도의 분할점령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던 미국과 조금이라도 더 이권을 얻어내고자 했던 소련의 잔머리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 분단의 시점 문제
1945년의 분할점령을 곧 분단으로 보아야 하는가? ‘일반명령 1호’에 따라 미·소에 의한 분할점령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인 조치였다. 일반명령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의 분할, 특히 중국·만주와 인도차이나 지역(16도선)의 분할을 규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지역들이 모두 분단된 것은 아니다.
■ 한국에서만 아직까지 분단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데 대한 원인을 분석
이는 분단의 원인과 해법을 동시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단을 극복한 다른 나라에서 외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동했다면,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한국에서는 분명 외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한반도에서 작동하고 있다. 남북갈등뿐만 아니라 남남갈등조차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쟁범죄자들이 제대로 처리되었던 지역과 그러지 못했던 지역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범들이 처리된 지역에는 극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극우가 없으면 극좌도 공존이 불가능하다. 좌와 우, 중도만이 있다.
그러나 전범이 부활한 지역에서는 극우와 극좌가 적대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진정한 좌우나 중도가 힘을 얻기 어려운 구도다.
중국의 존재도 한국의 분단 문제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와는 달리 완벽한 공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북·중관계 역시 분단 문제 고찰의 핵심적 내용이다.
지금도 한반도의 분단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적인 역학관계는 내부와 외부의 요인들이 서로 결합하고 있기에 70년 전과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에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연구와 논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 카이로 회담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
카이로 선언의 ‘적절한 과정을 거쳐’가 그것이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인지,
또 38선은 언제 확정되었는지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첫째로 다른 나라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음에도, 한국은 길지 않은 선언문 속에 직접 언급되었다는 점,
둘째로 일본이 ‘탐욕’으로 차지한 영토에 대해서는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킨다는 점이었다.
한국에 대한 언급은 장개석이 한반도에서 자신과 가까운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의도와 관련이 있다. 또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식민지 시기에 계속해온 독립운동의 결과이기도 했다.
1945년의 시점에서 두 번째 내용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미래를 규정했다.
원래의 위치로 복귀시킨다는 것은 독립이 아니라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복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영국과 미국이 과거 식민지 지역으로 복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그들의 식민지를 유지했던 것과 같은 논리였다. 이로 인해 1945년 이후 한국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는 옛 제국주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독립전쟁이 계속됐다. 베트남 전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1945년 9월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 군함 미주리호에서 우메즈 요시지로 일본군 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왼쪽부터)는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카이로 선언’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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