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7) 유신체제 논쟁
■ ‘유신 체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유신에 대한 첫 논쟁은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1972년 10월17일 유신체제를 선포하기 하루 전 미국 정부에 이를 통고했다. 원래 선포문에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희생시키고 흥정의 제물을 삼는 이기적 행태를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해 항의했고, 결국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듭해 6개 문단이 삭제되고 4개 문단이 수정된 채 발표(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됐다.
미국으로서는 유신과 같은 극단적인 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미 1년 전인 1971년 12월 박정희 정부에 의해 비상사태 선포가 이루어지자, 미국과 중국 사이의 데탕트, 남북한의 적십자 회담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비상사태 선포가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던 미국으로서는 동맹국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가 달갑지 않았다.
미국 언론이 독재정부를 지지한다고 비판할 수 있고, 의회가 동맹국에 대한 원조를 승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2년 12월27일 서울 중앙청 중앙홀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그해 11월21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5%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국의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있는 상황에서 존슨 대통령이 약속했던 주한미군의 감축이 없을 것이라는 공약을 파기했기 때문이었다. 196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와 만났던 닉슨은 주한미군 감축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1970년 사전 협의 없이 주한미군 1개 사단(제7사단)의 감축을 통보했다. 1952년과 1961년 독재자에게 압력을 가했던 미국으로서도 섭섭해 하는 한국 정부에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논란은
1974년초부터 장준하와 백기완이 유신헌법 반대 및 개헌을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살기등등한 유신의 권력 앞에서 1년여간 침묵했던 시민사회가 움직인 것이다.
유신 정부는 1974년 1월8일 오후 5시를 기해 긴급조치 1호를 발표했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으며,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이 가능하며, 15년 이하의 징역,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긴급조치 1호로 장준하와 백기완이 구속됐으며, 일주일 후 두 사람에게 최고형인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는 끊이지 않았고, 야당이 주도하는 개헌청원운동으로 이어졌다. 1974년 김영삼은 야당 총재로 당선되면서 독재에 반대하는 선명 야당노선을 내세웠다. 유신헌법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유신정부는 정면돌파를 선언했다. 1975년 1월 유신헌법에 대한 신임투표를 제안한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당시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신헌법에 대한 신임투표는 같은 해 2월12일에 있었다. 투표율 80%에 찬성 73%, 반대 25%의 결과가 나와 유신헌법에 대한 재신임이 이뤄졌다. 당시 한국사회가 철저하게 통제돼 있었던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낮은 투표율과 25%의 반대라는 결과는 역설적으로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공유돼 있었음을 의미한다.
■ 경제성장과 개발독재라는 차원에서 유신체제가 필요했는가
이후 유신에 대한 논쟁은 학문 영역에서 이뤄졌다.
필요했다는 주장은
1960년대의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구조 개편이 필요한 상황과 주한미군 감축과 데탕트로 인한 위협이라는 상황에 근거(김일영)하고 있다.
반면 필요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유신은 개인적 장기집권욕에 의해 만들어진 체제였으며, 만약 민주주의 체제에서 경제성장이 이뤄졌다면 더 바람직했을 것이라는 주장(한완상, 임혁백)이다.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유신 시대에도 정부·여당을 제외하고 옹호하는 사람이 없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집권해 ‘유신 아류’라고 비판받았던 신군부마저도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민주화와 함께 사회적 공감대에 균열이 발생했다.
한국이 러시아보다 일본의 식민지가 돼 다행이었다는 글을 써 논란이 되었던 한승조 교수는 “독재체제가 있었기에 한국이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단기간에 면모를 일신할 수 있었다”고 주장(경향신문 1989년 10월25일자)했고, 조갑제는 ‘월간조선’ 1993년 11월호에 ‘박정희와 김영삼의 화해’라는 기사를 통해 “민주화 이전에 있었던 산업화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글을 게재했다.
독재잔재를 청산하고, 독재시대의 과거사를 정리해야 하는 시점에서 왜 유신을 재평가하자는 논의가 시작됐을까.
민주화 이후 냉전시대에 기득권을 유지했던 그룹들의 위기감이 그 한 원인이었다면, 민주화 세력이 주도하는 정권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부 운영에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신자유주의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맞이했던 경제위기 역시 고성장시대를 구가했던 유신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개발독재의 유산이 경제위기의 한 원인이 됐는데도 개발독재가 그 해결책으로 대두된 것이다.
2012년 8월 홍사덕 전 의원은 “우리나라가 와이셔츠와 가발을 만들고 쥐와 다람쥐까지 잡아 팔아서 1971년까지 수출 10억달러를 달성했지만, 100억달러는 중화학공업 육성 없이는 불가능했다”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달러를 넘기기 위해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의 피요트르 황제는 사람도 많이 죽인 폭군이고, 전쟁하려고 교회 종을 녹여 철을 만들고 그랬던 인물이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진보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홍 전 의원 발언에 강력 반발했다.
유신체제는 비정상적인 체제이며, 정권 연장을 위한 개인적인 권력욕에서 나온 것이지, 불가피한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부의 기득권 세력들이 공모한 결과가 유신체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유신에 대한 논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정신의 잣대가 아닌 경제성장으로 평가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인식과 유신을 평가하는 인식이 같은 맥락에 있다는 점, 산업화와 민주화는 지속적으로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유신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됐던 1962년부터 1992년까지의 평균 경제성장률을 보면 민주화가 된 1987년부터의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았던 점 역시 고려돼야 할 것이다.
1972년은 격동의 한 해였다.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한 해를 열었다면,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릴 즈음 7·4 공동성명이 전격 발표됐다. 또 남북 간의 대화를 위해 민주주의를 포기한다는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 사채 동결 ‘8·3조치’
1972년 8월3일 당시 태완선 경제기획원 장관(가운데)이 사채동결 긴급 재정명령(8·3조치)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2년의 중심에는 ‘8·3 조치’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한국전쟁 때에만 있었던 긴급명령을 발동해 모든 사채를 동결시켰다. 자본주의의 기본인 사적 소유권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혁명적 조치였다. 왜 이런 조치가 필요했을까.
1960년대 말 부실 기업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차관에 대한 지불보증제가 실시되면서 기업들은 무분별하게 차관을 들여왔다. 그런데 도입된 차관들은 수출을 위해서만 사용되지 않았고, 1968년부터 기업의 부동산 투자 등에 사용됐다. 부동산 투자로는 즉각 이익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기업들은 사채에 손을 댔다.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던 은행의 문턱은 높았고, 기업의 건전성은 악화됐다.
청와대에 부실기업을 정리하기 위한 특별 기구를 설치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기업의 사채를 동결시켰다.
시장논리대로 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결국 모든 부실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한 것이다. 게다가 자기 회사에 위장으로 사채를 주고 더 높은 금리를 취해 이득을 보았던 부도덕한 기업가들에게도 면죄부를 줬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에서 젊은이들의 피를 대가로 거둬들인 그 많던 외화는 어디로 간 것인가.
‘8·3조치’로 구제된 기업가들이 ‘올바른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다면 1970년대 후반의 외환위기와 1980년대 초반 외채위기가 발생했을까.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사회에서 왜 정상적인 시장논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까.
경제성장의 신화에 갇혀 있는 박정희 정부 시기뿐 아니라 한국 재벌의 성장과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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