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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13 육도삼략(六韜三略)
- 2013.03.12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 2013.03.01 을미사변(乙未事變)--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보고서
- 2013.03.01 경교장
육도삼략(六韜三略)
고대 중국에서 전쟁은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가 부득이하게 선택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군주로서는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백성의 믿음을 받지 못한 군주는 일개 도적에 불과하여 축출되었다. 백성은 물이고 군주는 배로서,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군주는 ‘도(道), 덕(德), 인(仁), 의(義), 예(禮)’의 덕목을 갖추라했다. 전쟁에서도 위와 같은 가치가 뒷받침이 되어야 하지만, 눈앞의 이해득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역사적 평가도 포함된 ‘이(利)’의 관점이 보다 강조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국 고대 병서들은 우주론이고 인생론이며 처세론이라 할 수 있다.
『육도삼략(六韜三略)』에서 『육도(六韜)』는 주(周) 문왕 및 무왕과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의 대화체로 기술되어 있다.
태공망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면서 소일하다가 80세가 넘은 이후에 문왕에 발탁되었고, 무왕을 도와 은(殷)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주나라를 건국했다. 그리고 제(齊)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는데, 제나라는 환공에 이르러 최초의 춘추오패가 되었다.
‘육도’는 여섯 가지 비결(秘訣)이란 의미로서 문(文)․무(武)․용(龍)․호(虎)․표(豹)․견(犬)도의 여섯 권으로 되어 있다.
『삼략(三略)』은 세 책략을 뜻하며, 태공망이 저술한 것으로서 한(漢) 고조 유방을 도와 항우(項羽)를 제압하고 한을 건국한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이라는 은군자로부터 전수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태공망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보기 어렵고 후대에 저술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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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er cuts the Gordian Knot by Jean-Simon Berthélemy (1743–1811)
심히 풀기 어려운 문제를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한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칼로 잘랐다고 하는 전설 속의 매듭이다.
요즈음은 '대담한 방법, 파격적 해법을 써야만 풀 수 있는 문제'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고대 소아시아의 프리기아의 왕인 고르디우스는 자신의 마차를 신에게 바치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매듭으로 신전에 묶어놓았다.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를 정복하는 왕이 될 거라는 예언를 곁들여.
수많은 사람들이 매듭을 푸는데 도전했으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동쪽으로 원정하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 매듭을 푸는데 도전.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풀리지 않자, 그는 칼을 뽑아 매듭을 잘라 버렸다고.
그러나 그는 인더스강은 넘어섰으나 결국 기원 324년 페르시아로 회군. 결국 말라리아에 걸려 32세에 요절했다 전한다.
고르디우스의 예언이 맞았는지는 지금도 ...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대응해서, 동양에는 쾌도난마(快刀亂麻)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어지럽게 헝클어진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내려 애쓰기보다, 날랜 칼로 베어내는 것이 좋을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사는 이야기는 때로 즐거운 것도 있지만, 갈등, 불안, 당황, 고뇌, 후회, 자책,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적인 사건들이 대부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매우 난처한 처지, 소위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지기도.. 세상사를 풀어가는 뾰쪽한 비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매듭을 푸는 묘수를 찾지 못해 안타까웠던 기억들...
복잡하게 뒤얽힌 일 일수록,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공허해서 그 해법에 공리공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순하게 처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어쩌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자 아시아정복'이라는 논제가 알렉산더가 매듭을 칼로 자른 후 사라지고 그 것이 옳은 해법이었느냐라는 문제로 모습을 바꾸었듯이 또 새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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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7332>
불행한 역사의 회상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망각과 방치로 결코 치유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일본 낭인 중 한 명이 작성해 일본 본국으로 비밀리에 보낸 보고서가 있었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 존재만 알려져 있었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다.
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한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 최초로 공개된 '에조(英臟) 보고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전모>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군인, 외교관, 언론인, 거류민, 낭인 등으로 구성된 암살단은 경복궁에서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비밀작전 '여우사냥'을 수행하고 있었다.
광화문 등을 통해 궁내로 난입한 그들은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세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후려치는 행패를 부렸다. 그들의 행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뒤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한 장의 전문(電文)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보고서'>
1895년 10월 9일.
을미사변이 터진 바로 다음날 작성된 또 한 건의 보고서가 일본 본국으로 날아왔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였다.
그렇다면 이시즈카 에조는 어떤 인물인가. 오랜 추적 끝에 '에조 보고서' 전문을 입수한 작가 김진명씨는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에조가 갖고 있던 조선 정부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다. 그가 조선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거나 관복을 입고 등청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때라 낭인들이 명목상 하나씩 그런 직책을 얻어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도 자신의 저서에서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에조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발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에조가 스에마쓰에게 별도의 보고서를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에조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법제국 참사관"을 지냈다는 후사코 여사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에조는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전직 상사에게 보고서를 보낸 것이다. 이와 관련, 다시 김진명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에조는 미우라 공사 몰래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실제로 사건의 원인에서부터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돼 있는 이 보고서에는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따라서 '에조 보고서'는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재판한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보고서의 존재는 어떻게 알려졌나>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70여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 健太郞, 1905∼1977). 그는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바로 그후 국내 역사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한편 그는 이보다 앞선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일한병합소사>의 기본 골격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일한병합소사>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은 16년이 흐른 뒤인 1982년 6월이다. 신학자 고 안병무 선생이 <한일합병사>(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했는데, 문제의 '능욕설' 대목을 이 책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이 대목이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그는 이 책에서 보고서의 존재는 거론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1966년 9월 발간한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이었다. 친북 계열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결국 겐타로는 7개월의 시차를 두고 두 권의 책을 발간한 셈인데, 그나마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언급하고 일부 내용을 소개한 두 번째 책은 국내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야마베 겐타로의 언급 이후 '능욕설'은 재일 사학자 박종근, 나카쓰라 아키라 등에 의해서도 거론된 바 있기는 하다. 그러나 '능욕설'의 전적(典籍)이라 할 수 있는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저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보고서를 찾아 헤맸던 김진명씨의 설명이다.
'에조 보고서'가 다시 언급된 것은 22년이 흐른 뒤였다. 앞에서 거론했던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에 잠시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은 1988년 발간되고 몇 달 후 조선일보사에 의해 번역됐는데(번역자 김은숙 한국교원대 교수), '능욕설' 관련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전 법제국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실제 보고서에는 '고문'이라고 적혀 있음-기자주)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쓰노다 여사는 이 책에서 '구체적인 그 행위'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았다.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에조의 심정에 동감한 것일까.
한편 국내에서 명성황후 능욕설이 제기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앞에서 거론했던 야마베 겐타로의 첫 번째 책이 <일한합병사>로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온 후부터로 보인다. 그러나 기자가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된 국내 기록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능욕설의 근거가 된 '에조 보고서' 전문을 직접 찾아보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다수가 야마베 겐타로의 소개와 해석에 그대로 의존하고 있었을 뿐이다.
3. 보고서 전문을 어떻게 찾아냈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 헤매던 김진명씨는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을 정독하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을 온통 헤집었지만 그는 도저히 문제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낼 수 없었다. 마침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며 한 발짝 물러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김진명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씨에게 보고서를 찾아줄 것을 부탁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권씨가 몇 권의 책과 자료를 보내왔다. 그 중에는 앞에서 기자가 거론한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다. 김진명씨는 이 책을 읽다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문제의 '능욕' 장면 중 일부가 소개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보고서의 일부가 아니라 전문(全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씨는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의 한국병합>을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가 언급돼 있는 이 책의 223쪽을 보자 주석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주석 번호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출전이 밝혀져 있었다.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
역사학계에서 수없이 거론됐지만 정작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던 '에조 보고서'가 역사학자가 아닌 한 작가의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적인 추적을 거친 끝에 '우연히' 발견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진명씨는 이 문서를 즉각 찾지는 않았다. 문서를 찾으면 공개해야 하고, 이 문서의 공개가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둔 한일 양국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다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 공개를 늦출 수 없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권용석씨에게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가서 이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장 107년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4. 보고서엔 어떤 내용 들어 있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기자는 이 보고서를 김진명씨로부터 입수한 뒤 일본어에 정통한 전문가에게 번역을 맡겼다. 그러나 주로 고어(古語)와 사어(死語)로 쓰여 있어 도저히 완벽한 번역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만 보고서에 한자로 표기된 '부덕의(不德義)' '경솔천만(輕率千萬)' '직무상 책임(職務上 責任)' '주모자(主謀者)는 미우라 공사(三浦 公使)' 등의 표현이,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는 김진명씨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기자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겐타로보다 좀더 자세하게 '에조 보고서' 내용을 인용한 서적을 발견하는 의외의 성과를 얻었다. 친일문제전문가인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일본 서적들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뒤지던 중 찾아낸 <외교문서로 말하는 일한병합>(합동출판, 1996)이 바로 그것이다.
재일 사학자 김응룡씨가 쓴 이 책은 '에조 보고서' 전문 중 10분의 1 정도만 인용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나온 어떤 저술보다도 풍부하게 보고서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다음은 이 책에 서술된, '에조 보고서'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에조는 법제국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 안에서, 왕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고서 머리에 적고 있다. 왕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고 말하고, 일본의 수비대가 주력이었던 일, 왕비 살해와 사체에 대한 능욕의 상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외국인들에게 보인 데다, 이 외국인들과 언쟁까지 벌인 일과 대궐에서 난동을 끝내고, 보기 흉한 몰골로 대궐에서 철수하는 것을 대궐 앞 광장에 몰려든 조선인 군중들과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는 러시아 공사에게도 보이고 말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체에 대한 능욕"이란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 역시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보고서에 담긴 진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한편 김진명씨는 '에조 보고서'와 관련해 기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발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 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된 걸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런 기존의 해석에 따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다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 에조 보고서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에조 보고서'에서 능욕 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고서에서 실제로 그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주요 한자 표기 그대로 살렸음-기자주).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그는 이 부분을 소리 내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뒤 이렇게 주장했다.
"보고서 어디에도 살해한 뒤 능욕을 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겐타로는 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욕했다'고 해석해 버렸고, 이것이 한국에서까지 그대로 정설로 통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였을 때는 반드시 '살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궁내부 대신 살해'라는 대목이 결정적인 방증이다."
실제로 시해 장면을 묘사한 '에조 보고서'를 뒷받침하는 증언과 자료들은 많다. "일본인 흉한들은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왕세자 이척의 증언)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그들은 명성황후가 그렇게 칼에 찔려 즉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김진명씨는 이렇게 반론을 펼쳤다.
"그들은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인 명성황후와 가해자인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죽었고, 일본인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조작했다. 가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도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 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창밖을 응시하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마침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간한 것이 아니라 강간한 것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마베 겐타로조차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끔찍한 만행에 놀라 보고서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사체 능욕'이라고 축소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한 주권 국가의 왕비에게 만행을 저지른 것과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한국인들 역시 처참하게 능욕 당하면서 죽어간 명성황후의 원혼을 풀어줘야 할 책임이 있다."
한일 월드컵이 열리는 오늘, 우리는 "나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말라"는 명성황후의 단말마적 외침을 가슴으로 생생히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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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94주년을 앞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인 경교장(사적 465호)이 복원 공사를 마치고 공개됐다,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1876~1949)의 집무실이자 정부 요인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인 경교장은 1938년 서울 중구 평동에 지하1층, 지상2층 구조의 양옥주택으로 지어진 1930년대 건축술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국가 사적으로 승격됐다.
경교장은 백범 서거 이후 대사관과 미군 특수부대 주둔 용도 등으로 활용되다가, 1967년 삼성재단이 매입해 경교장 후면에 고려병원을 신축해 운영해왔다. 고려병원은 1995년 현재의 강북삼성병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2010년까지 병원시설로 사용했다. 서울시는 지난 2011년 3월 원형 훼손된 벽제 철거를 시작으로 복원에 들어가 1년여 복원 공사를 마쳤다.
병원 원무과와 약국 등으로 사용되어 오던 지상1층은 임시정부 시절 국무회의 장소로 사용되던 귀빈응접실, 선전부 사무실 등으로 복원되었고, 통증클리닉과 창고 등으로 사용되던 지상2층은 원래 모습인 백범의 집무실과 서재, 각료들의 숙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지하1층은 백범과 임시정부 요인들과 관련된 유물 전시관으로 활용된다.
공사 관계자는 내부에 부분적인 변형이 있지만 건물 모습과 기본적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되던 시기의 경교장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되었다고 밝혔다. 경교장은 다음달 2일 시민들에게 공개되고 무료개방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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