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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9 1945년 8월 15일
- 2014.12.08 1897년 명성황후(1851~1895) 국장(國葬) 사진
- 2014.12.07 ‘충성서약의 장’ 청와대 터
- 2014.12.07 ‘벌주 삼배’ 전통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의 숨넘어가는 듯한 항복 옥음방송(玉音放送)과 함께 찾아온 해방에 대해 어느 지식인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사실 대다수 한국민들은 당시 너무 급작스럽게 도래한 해방의 감격보다는 ‘아,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을 더 크게 느꼈다고 한다. 분명히 한국민도 일본이 말하는 ‘종전’을 경험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해방은 징병, 징용 등 각종 전시동원의 종언 이상이었다. 해방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배로부터의 전면적인 자유, 그야말로 광복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해방국’ 한국은 강제적인 전쟁동원에 따른 피해만이 아니라 식민통치 35년간 일제가 저지른 온갖 수탈과 불법행위에 대해 준엄한 배상과 사죄를 추궁할 터였다.
● 한국, 대일협상서 식민 보상 요구 안 해
그러나 한국민이 갈구한 해방은 온전하지 않았다. 지금껏 일본은 1910년 한일 병합조약의 불법성을 인정한 적이 없고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거부해왔다. 역대 일본 정부의 언급 가운데 가장 진전된 내용으로 평가 받는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村山) 담화조차 식민지배로 고통을 줬다면서도 식민지 병합과정의 강제성과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같은 의미에서 종주국-식민지 관계를 청산하고 정상적인 국제관계를 열고자 하는 탈식민화의 과제는 ‘미완’이며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아직도 ‘해방 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 일은 1951년 이후의 대일 협상에서 한국 정부마저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을 일본에 공식적으로 요구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것이다. 왜 한국 정부는 일제 식민지배가 ‘처음부터’ 무효라고 주장하면서도 무효에 따른 피해 보상을 요구하지 않은 것일까. 도대체 한국 정부는 일제 식민지배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주지하듯이 한국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일본과의 전쟁을 종결하는 강화조약에 서명국으로 참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근년 우리 외교부가 공개한 외교문서 가운데 1950년 10월 주일대표부 대일강화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대일강화조약에 관한 기본태도와 그 법적 근거’라는 제목의 외교문서는 1910년 병합조약과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한국측의 법리적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여기서 한국 정부는 우선 병합조약과 관련해 “전쟁을 전제로 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국가의 기능을, 특히 외교권과 사법·경찰권을 무력으로 박탈한 후에 국가전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국가기관을 협박”함으로써 체결된 만큼 ‘무효’라고 단정했다. 즉 한일 병합조약은 강제와 폭력에 의해 성립됐으므로 소급하여 원천적으로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측이 이후 전개한 병합조약 무효의 효력에 대한 판단은 한국민 일반의 예상을 비켜간다.
● “식민통치 전체가 무효는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 정부는 이 외교문서에서 일제의 식민통치행위 전체가 무효는 아니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가령 ‘선의의 제3자의 이익’, 즉 일제강점기에 ‘선의’의 제3국이 합법적으로 조선에서 얻은 이익은 국제관례에 따라 “무효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조선총독의 일반행정 가운데 조선은행권의 발행, ‘집단생활자의 최저의무범위 내’의 징세, 한국민의 복리를 위한 공채의 발행, 일본과의 무역은 ‘유효’라고 판단했다. 여기에 도의적 책임위반 등 반사회적 범죄자에 대한 사법적 판결, 사회질서 유지에 필요한 입법행위 등도 무효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요컨대 한국정부는 일제 식민지배라는 ‘기정사실’ 가운데 “계승적 질서유지를 지속한 선의의 관리자의 행동까지 무효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다. 다시 말하면 대한제국의 황제가 계속해서 조선을 통치했더라도 징세나 치안 등 국가유지를 위한 일을 했을 것이므로 조선총독이 대신 행한 이런 종류의 식민지배 행위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제의 식민지배 행위 전체를 무효라고 주장하지 않는 법적 근거로서 한국 정부는 ‘무권대리’(無權代理)라는 법률개념을 제시했다. 근대 사법의 소산으로 민법에서 통용되어온 이 개념은 대리권이 없는 자가 행한 대리행위를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이런 행위는 무효이지만 대리권의 외관이 존재하는 경우 그 무권대리 행위에 대해 무효를 주장할 수 없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대한제국(조선)이라는 ‘금치산자’를 일제가 권한 없이 관리했는데, 이는 불법이지만 무효는 아니라는 것이다.
● 미국은 배상보다 전후복구 우선
이처럼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초기 한국 정부의 인식은 모호했지만, 그것이 이후 한일관계에 미친 파장은 컸다. 이승만 정부는 겉으로는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전쟁 배상’을 주창했으나 실제로는 일찌감치 이를 포기하고 민사상의 ‘청구권’ 요구로 물러섰다. 한국이 정부수립 직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대일배상요구조서’는 서문에서부터 ‘배상’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이를 모두 불문에 부치는 바”라며 선을 그었다.
실제 이 조서와 이를 토대로 작성되어 일본측에 제시된 ‘한국의 대일청구요강(안)’은 1910년부터 45년까지의 일제 식민지배 자체에 대한 피해보상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1952년 2월 열린 제1차 재산 및 청구권 문제 분과위원회에서 한국측 임송본 대표는 “대한민국은 36년간의 일본의 점령으로 발생한 불쾌한 과거의 기억에 의해 촉구되는 모든 청구권의 충족을 요구할 의도는 없으며, 단지 한국에 합법적으로 속하고 장래의 한국의 생존을 위해 충족되어야 할 재산에 대해서만 그 청구권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 스스로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보상 요구를 접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일본 패전 후 도래한 냉전의 영향으로 미국이 일본에 대해 배상보다는 전후복구를 우선시한 점을 우선 지적한다. 실제로 대일 승전국이면서도 각각 식민지 보유국이기도 했던 미국 등 연합국은 일제의 과거청산에 대해선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법학자로 대일 협상의 전면에서 활약한 유진오(兪鎭午)는 “해방국은 노예적 지위를 뚫고 일어선 만큼 승전국에 우선한다”면서 ‘해방의 논리’를 전개했지만, 미국은 한국에 전승국은커녕 ‘해방국’ 지위도 부여하지 않았다. 스스로 제국주의적 속성을 짙게 간직한 식민지 종주국들에게 일제의 유산 청산을 기대한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 한국은 ‘해방’ 아니라 ‘분리’돼
탈식민화 문제에 대한 미국의 방침은 ‘분리’(separation)라는 단어로 정리된다. 대일강화조약 제2조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recognizing),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규정했다. 독도가 일본이 ‘포기한’ 지역에 포함되지 않아 오늘날 영유권 논쟁의 빌미가 제공된 점이 우선 눈에 띈다.
그러나 이 조항에서 더 주목할 대목은 한국의 독립이 일본의 승인 후에야 이뤄졌다고 명시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종주국’ 일본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라고 시사한 점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한일 병합조약은 합법적이었고 일제 식민지배는 정당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분리’된 한국에 대해 ‘전후’ 일본이 배상하거나 사과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분리’의 논리에 서게 되면 대한민국이라는 국체의 확립 시기도 1948년 8월 15일이 아니라 대일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로 미뤄야 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실제 1945년 8월 및 11월에 미 국무부가 생산한 ‘한국에 대한 권원의 이양’ 등의 외교문서는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만으로는 한국의 주권이 한국에 이양되지 않으며 일본 왕의 포기선언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여기에 일본 정부는 전쟁배상을 회피할 목적으로 과거 식민지 통치를 목적으로 제정한 외지관계법 등을 강화조약 발효 전까지 유지하면서 한국에 대한 영토주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민이 기대한 ‘해방’은 시작부터 제국주의의 잔재인 ‘분리’의 논리에 의해 크게 훼손됐던 것이다.
서울 시민들이 길가에 모여 1945년 9월 일본군의 안내를 받아 시내로 들어오는 미군을 바라보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자료
http://www.hankookilbo.com/v/26c84cd8e1b54de9a45e24187146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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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1월 대한제국 국장으로 치른 명성황후 장례식입니다.
곡하는 궁인들을 태운 조랑말이 광화문 육조거리를 줄지어 따라갑니다.
경운궁 대안문을 나선 상여가 그 뒤를 따릅니다.
종로를 지나는 장례행렬 선두에 신백 神魄, 고인의 넋을 모신 '신주 가마'가 보입니다.
http://www.ytn.co.kr/_ln/0106_20141208191007645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2072234235&code=9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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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정권교체의 공신들이 혈맹을 맺은 저 곳.
백성은 나몰라라 하고, 그들이 모시는 주군에게만 충성을 다짐하기 일쑤였던…
청와대 본관 터는 조선시대 때 공신들이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충성서약의 장’ ‘공신회맹 터’
1770년(영조 46)에 제작된 지도(‘한양도성’)
회맹(會盟)은 중국 주나라 때 여러 제후가 한자리에 모여 특정한 약속을 지킬 것을 다짐했던 의식을 의미한다. 반독립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각 제후국들에 회맹은 외교적 대결의 장이었다.
회맹을 주도한 나라의 제후는 그 권위를 널리 공인받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반대로 힘이 약한 제후국들에는 주변 강국들에게 시달리는 시련의 장이기도 했다.
후한이 멸망하기 직전 실력자 동탁에 반대하는 조조·원소 등 여러 인물이 모여 ‘동탁 토벌’을 결의한 사건도 소설 삼국지에서는 ‘18제후들의 회맹’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의미에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중국에서 회맹은 동물의 피를 서로 나눠 마시며 약속을 지킬 것을 다짐하는 의식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피는 죽음을 상징하므로 죽음 앞에서도 변하지 않을 강한 약속을 나누는 것이 회맹인 것이다.
조선 왕조의 ‘회맹’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렀다. 왕과 공신들은 제단 앞에서 4번의 절을 올렸다. 천지신명의 신주 앞에서 향불을 태웠다. 그런 뒤 ‘삽혈(삽血)동맹’을 펼쳤다. 제물의 피를 입에 바르는 의식이었다. 임금을 배신한다면 천지신명의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것을 맹세했다. 서로를 ‘혈맹’이라 했다.
조선조 태종은 개국과정에서, 그리고 1·2차 왕자의 난에서 엄청난 피를 뿌렸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안개정국이 이어졌다. 최측근 공신이라도 언제 배신할지 몰랐다. 태종은 5차례나 공신회맹제를 열었다. 틈만 나면 부하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은 것이다. 이로써 극도의 공포심을 떨치려 했다.
1417년 4월의 회맹은 특별했다. “(공신의) 자손도 맹세를 바꾼다면 귀신이 책임을 물을 것이다. …반드시 후손에게도 미칠 것이다.”(<태종실록>)
공신과 그들의 적장자까지 죄다 모여 무릎을 꿇은 것이다
1604년 10월 28일
임진왜란 공신들의 회맹은 태평회맹이라고 불린다. 당시 회맹 의식의 모습을 담은 공식 기록화가 ‘태평회맹도’(太平會盟圖·다. 가로 104㎝·세로 220㎝의 비단 4폭 병풍 위에는 회맹에 참석한 공신들의 직함과 생년월일, 본관과 함께 회맹 의식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국왕 선조와 훗날 광해군이 된 왕세자와 호성공신인 완평부원군 이원익, 오성부원군 이항복, 선무공신 권응수·이운룡 등이 태평회맹에 참석한 이들의 면면이다.공신 회맹에는 새로 공신이 된 인물들 뿐만 아니라 조선 건국 이래 정식 공신으로 임명된 모든 이들이 참석하는 것이 관례였다. 공신으로 임명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나 당사자가 생존하지 않을 경우 공신의 장손이라도 대신 참석했다.
임란 공신들의 태평회맹도 마찬가지여서 조선 건국 이래 당시까지 열다섯 차례에 걸쳐 임명된 공신들이나 그 후손들이 모두 참석했다. 이들 구 공신 참석자들도 함께 충성을 맹세하는 기록을 별도로 남겼는데 이는 회맹록이라고 부른다. 태평회맹 참석자들의 364명의 회맹록도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http://lod.datahub.kr/page/id/kch/Treasure-No-668-3
1625년(인조 3) 4월의 회맹에는 공신의 적장자들까지 무려 391명이나 참석했다.
“우리 동맹인들은 배신하는 일 없이 억만년토록 유지하자.”(<인조실록> 등)
인조는 이날 “(광해군 때문에) 위태로워진 나라를 구하려 신하들과 손잡고 반정을 일으켰다”고 선언했다.
“바늘을 훔친 이는 주살되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문에 인의가 있다(竊鉤者誅 竊國者侯 侯之門仁義存).”(<사기> ‘유협전’)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m/view.do?ntt_writ_date=20060621&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029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2012123315&code=990000&s_code=ao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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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주 삼배’ 전통의 뿌리는 깊다. 왕희지(王羲之·307~365) 때 시작됐다. 풍류가들이 모여 곡수(曲水)에 띄운 술잔이 돌아올 때까지 시(詩)를 짓지 못하면 ‘삼거굉(三巨굉)’의 벌주를 받은 데서 유래했다. 즉 큰 잔으로 술 석 잔을 마셔야 하는 것이다.
1974년 문무왕대(674년)에 조성된 통일신라시대 궁중연회장 경주 안압지에서 발견된 ‘14면체 주사위’는
‘벌주 삼배’ 전통이 신라에까지 이어진 것을 증명
14면체 주령구에는
삼잔일거(三盞一去)’는 술 석 잔을 ‘원샷’
자창자음(自唱自飮·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음진대소(飮盡大笑·술잔 비우고 크게 웃기
금성작무(禁聲作무·노래 없이 춤추기)는 무반주 댄스.
유범공과(有犯空過)는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참기’다.
임의청가(任意請歌),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은 밤늦게 술 먹고 노래 부르면서 휘적휘적거리며 들어오는 품새(괴래만)를 재연
양잔즉방(兩盞則放)은 술 두 잔을 한꺼번에 비우는 것
공영시과(空詠詩過·시 한 수 읊기)
중인정비(衆人鼻·여러 사람으로부터 코맞기)
농면공과(弄面孔過·얼굴에 간지럼 태워도 참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2072103055&code=990000&s_code=ao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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