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16. 14:04

189898일자 황성신문에 게재된 여권통문(女權通文)’ 중 일부분이다.

 



<여권통문>

 

물이 상하면 반드시 변하고, 병이 극하면 반드시 고치는 것이 고금의 이치다. (중략)

 

이제 우리 이천 만 동포형제가 (중략) 구습을 영영 버리고 개명한 신식을 좇아 행하는데, 일신우일신함은 영영한 소아라도 저마다 아는 바거늘, 어찌하여 우리 여인들은 일향 귀 먹고 눈 어두운 병신 모양으로 옛날식 규방만 지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그 절제만 받으리오.

 

먼저 문명개화한 나라를 보면 남녀가 일반 사람이라.

 

어려서부터 각각 학교에 다니며 제조를 다 배우고 이목을 넓혀 장성한 뒤에는 사나이와 부부지의를 정하여 평생을 사는데, 그 사나이한테 조금도 절제를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극히 공경함을 받는다.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전날을 생각하면 사나이의 위력으로 여편네를 누르고, 구설을 핑계로 여자는 안에 머물면서 밖의 일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밥하고 옷 짓는 것만 하리오.

 

어찌하여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으로 규방에 갇혀 밥과 술만 지으리오.

 

우리도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라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실시하고, 각각 여아들을 보내 재주를 배우고, 규칙과 행세하는 도리를 배워 남녀가 일반 사람이 되게 할 당장 여학교를 실시하오니 우리 동포 형제 여러 부녀 중 영웅 호걸님네들은 각각 분발한 마음을 내어 우리 학교 회원에 드시려거든 곧 칙명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116년 전인 1898

 

구월일일 여학교 설립 발기인 이소사, 김소사

 

189891일 여권통문 발표에 찬성한 사람들은 약 300명이었는데, 발표한 후에는 400~ 500명으로 늘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양반 부인들이 중심세력이었으나, 일반서민층 부인들과 기생들도 참여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여권통문의 발표는 자연히 여권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 여권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운동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찬양회(贊襄會)라는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를 조직하였다. 1898912일 북촌 부인대표들은 뜻을 같이 하는 남성들까지도 함께 하여 여학교 설립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한국인 여성들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로 순성여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이를 여성의 힘으로 운영하기 위해 후원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찬양회는 여학교 설립운동과 여성계몽사업을 펼쳤다. 매주 일요일 정기집회를 열고 연설회와 토론회를 가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립여학교 설립운동이었다. 여자도 국민의 일원이기에 당연히 국가가 관립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도 국가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남성과 동등하게 애국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관립여학교 설립은 자꾸 늦춰졌다. 이에 찬양회는 1899226일 서울에 30명 정원의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를 개교했다. 이 학교는 한국여성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로서 7, 8세에서 12, 13세 연령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등과정의 학교였다. 이 학교를 관립여학교로 만들려고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양현당의 노력으로 학교가 유지되었으나 19032월 그가 죽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순성여학교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종교교육기관과는 달리 여성들에 의해 설립된 민간 교육기관이라는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교육내용에서도 민족의 일원으로서 개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등 당시 사회의 현안을 강조하고 이에 합당한 여성인물을 키워내려 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