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0. 15:00

뉴욕 타임스

1889년 6월4일 ‘왕비는 허수아비가 아니다’라는 기사에서 “왕비는 조선의 가장 힘센 권력층의 하나이고 왕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공공연히 전달한다. 궁안에 자신의 지지 기반이 있다”고 전했다.

명성황후가 애연가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왕비는 한복을 입고 아름다운 다이아가 달린 비단옷을 입는다. 역시 다이아가 박힌 허리띠 장식을 하고 미국산 담배를 즐겨 피운다.”


명성황후는 한반도를 병탄하려는 일본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고종은 유약했고 명성황후와 권력 쟁탈전을 벌이던 대원군도 결국은 일본에 이용당한 것이었다. 


더 헤럴드는 1894년 8월3일 ‘한국 황후 중국과 일본의 전쟁 원인 제공’이라는 기사를 실으며 


궁중복 차림의 명성황후 전신 삽화를 곁들였다.





1894년 8월3일자 더헤럴드 보도. 











조선의 내정을 장악하려는 일본의 기도는 명성황후에 의해 번번이 좌절됐다. 일본이 당시 얼마나 명성황후에 골머리를 앓았는가는 워싱턴에서 발행된 이브닝 스타의 보도에서도 잘 확인된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엿새가 지난 1895년 10월14일 이브닝 스타는 조선을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일본에서 파견된 외교관들이 명성황후에 꼼짝없이 당하고 만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전했다. 아직 명성황후의 죽음이 공식 확인된 상황이 아니었고 궁궐 피습도 대원군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본이 배후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보도였다.

이브닝 스타는 “일본의 계획은 늘 왕비로 인해 좌절됐다. 가장 판단력이 좋은 일본의 외교관들이 한국에 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첫 번째 공사는 정력적이었지만 6개월 간 소득이 없었다. 두 번째 공사도 마찬가지였고 마침내 일본의 가장 유능한 정치인이자 내무대신 출신 이노우에 백작이 왔다”고 말했다.

명성황후는 외국 여성들과 교분이 별로 없지만 러시아의 장관 부인과는 아주 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으로선 러시아가 한반도의 라이벌인만큼 이런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마침 이노우에 공사는 그 방면에 탁월한 명성이 있는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외교관이었고 특히 여성들을 설득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이브닝 스타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이노우에가 명성황후에 대해 털어놓은 평가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왕비는 조선인들가운데서도 드물게 총명하다. 적들을 길들여서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하는 기발한 재주는 그 누구도 당할 재간이 없다.”


이브닝 스타는 “왕비가 일본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었다”며 “심약한 왕은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해서 왕비에 의해 조종됐다. 왕비가 살았다면 일본은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10월30일 ‘애버빌프레스앤배너’는 ‘한국 황후의 운명, 왕의 아버지 서울 궁궐 공격’이라는 보도에서 “한국에서 일어난 돌발 사건은 일본 군대의 전면적인 주둔을 불러왔다. 한국의 황후는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으로 이동하는 일본 전함의 명령은 취소되었으며 더 이상 추가적인 진주는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1895년 10월30일자 애버빌프레스앤배너 보도. 

또한 “사건 이후 어떠한 국제적 문제도 제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일본의 개입이 이뤄졌다. 반란은 황후에게 오랜 적개심을 갖고 있는 대원군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대원군을 수 개월 전 섭정하는 위치에 올렸고, 황후는 일본을 강력히 견제하는 중국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낭인배들이 시신을 불태우는 바람에 명성황후는 한동안 실종 상태에 있었다. 이날 애버빌은 1단 기사로 “서울의 언론에 따르면 살해된 황후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보도했으나 시신 상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았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관련, 미국 여성 선교사의 생생한 육성이 11월20일 뉴욕 타임스에 의해 보도됐다. 타임스는 ‘일본, 황후 살해 확실’ 제하의 기사에서 메인 종합병원의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서울에 파송된 제이콥슨의 증언을 보도했다.


제이콥슨은 선교사들 역시 두려움 속에 있었으며 바람 앞의 등불인 조선의 처지를 전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명성황후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낭인 무뢰배들이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궁에서 ‘네 명의 지체높은 여성들을’ 살해했다고 증언해 눈길을 끈다.

“이곳이 두렵다. 지난 2주 간 낮엔 거리에 나가도 되지만 밤에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황궁은 일본인들이 접수했고 황제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황제의 아버지는 이 문제를 만든 사람 중 하나다. 황후는 살해돼 이불에 말린채 불에 태워졌다. 일본인들은 말을 하지 않지만 진실은 그들이 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네 명의 지체높은 여성들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10∼13명의 관리들도 죽었다. 두려움에 빠진 황제는 외국인들이 가져오는 봉인된 식사 외엔 먹지 않는다. 왕자는 이곳에 온 선교사 중 한 명인 언더우드 선교사와 같이 지내고 있다. 선교사들은 왕자를 미국에 보내려고 한다. 대원군은 왕자도 죽이려고 하지만 미국인 집에 있기 때문에 들어오지 못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미국 공사관에 피신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러시아까지 이 나라에 들어오면 더욱 상황이 나빠질 것이다.”


‘황후 시해’라는 엄청난 사건 이전부터 명성황후에 대한 서방 언론의 관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주변 강국의 파워게임이 벌어지는 ‘은둔의 왕국’ 조선에 대한 호기심, 한 나라의 국모라는 조선에서 가장 높은 여성, 유약한 황제를 조종하는 실질적인 통치자, 그리고 시아버지와의 지독한 권력 투쟁까지 언론의 관심을 끄는 요소들이 다분했다.

이 시절 언론들은 삽화를 통해 사진의 효과를 대신했다. 더 헤럴드는 1894년 8월3일 ‘한국 황후 중국과 일본의 전쟁 원인 제공’이라는 기사를 실으며 궁중복 차림의 명성황후 전신 삽화를 곁들였다.

1894년 8월31일 하와이안 가제트는 1면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삽화를 나란히 게재했다. ‘리 한국의 왕(Li, The King of Korea)’이라는 톱 제목과 함께 ‘중국과 일본 여전히 싸움’ ‘한국의 왕 스스로 황제 독립 선포’ 등 조선의 어지러운 정세를 분석하는 장문의 기사였다.

고종과 명성황후 삽화를 게재한 하와이안가제트 보도.



1894년 9월20일 제임스타운 위클리는 귀걸이를 한 화려한 의복의 명성황후와 시녀(원문엔 노비라고 명기)의 삽화를 나란히 실어 독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한국의 황후’라는 큰 제목 아래 “황후는 잘 생겼고(handsome) 재주가 많으며 패션 감각이 있다”는 작은 제목이 달린 기사였다.


1894년 9월20일자 명성황후와 시녀 삽화를 게재한 제임스타운 위클리. 


대원군과 십수년 간 헤게모니 싸움을 한 명성황후는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기를 꺼렸다. 명성황후의 사진 혹은 초상화라고 알려진 자료도 현재까지도 진위 여부가 가려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타운 위클리는 상세한 묘사로 눈길을 끈다.

“활달한 성품의 왕비는 코가 긴 편이고 단호한 턱선과 광대뼈가 도드라진 모습이다. 머리칼은 부드러운 갈색이고 눈도 그렇다. 입은 약간 큰 편이지만 풍부한 대화를 할 때는 최고의 경주마들이 달릴 때처럼 콧구멍이 넓어지기도 한다…”

명성황후 시해를 최초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1895년 11월10일 ‘조선 황후의 캐릭터’라는 기사에서 암살의 위협에 노출돼 침소마저 베일에 가린 이야기들을 전하기도 했다. 웨스트민스터 가제트를 인용보도한 것이었다.

“최근 시해된 조선의 황후는 아주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녀는 자격이 없었다. 왕을 심하게 다루고 돈을 받고 비싼 값에 매관매직했다. 황후는 사람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암살의 두려움에 떨었고 밤을 꼬박 새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는 오전 5시나 6시까지 침소에 들지 않았고 몇 개의 침실이 있었기 때문에 측근 외에는 어디서 자는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침실엔 비밀문이 있어서 비상통로로 나가면 곧바로 달아날 수 있는 운송수단이 있었다. 그러나 (시해로 인해)이 모든 예방책이 소용없게 되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1008_0013218013&cID=10104&pID=10100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