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27. 01:57

누구나 삶이 괴롭다는 것을 한번도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삶 자체를 오토-데스트뤽시옹(Auto-destruction), 즉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는 작업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오토-데스트뤽시옹의 터널을 빠져나오거나 그 수렁을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드나들면서도 꿋꿋이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베르나로스의 말처럼 '인간적인 신음소리'를 내면서 끝내 자살로 마무리 진 사람들도 있다.

사연이야 어떻든 연예인의 자살이 입방아에 한동안 오르더니 일반적인 '자살'을 신문 방송이 경쟁적으로 쏟아 놓는다.

'인터넷 포탈'만 문제 삼지 그 구체적 원인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가 없는 것도 특징이다.

문제가 되었던 젊은 연예인의 자살도 같은 맥락에서 보라는 것인지 씁쓸하기만하다.

자살의 어원은 라틴어의 sui(자기 자신을)와 cædo(죽이다)의 두 낱말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자살이란 그 원인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당사자가 자유의사()에 의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말한다.

자살의 시비()에 관한 윤리관과 종교관에 따라 다르다.

과거 일본 군대의 ‘가미카제[] 특공대’나 이른바 ‘육탄용사()’, 전태일의 분신 처럼 자진해서 죽음으로 뛰어드는 경우를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칭송하는 경우도 있다.

자살긍정론자()는,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의 생명에 관해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윤리적 입장에서 긍정해왔다.

자살부정론자는, 자살은 신과 국왕에 대한 의무를 포기하는 행위로서 비난한다.

종교적 관습에서도 긍정론과 부정론이 엇갈린다.

인도의 사티(satī)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편을 잃은 아내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여 뒤따라 자살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국에도 옛날에는 임금의 죽음에 대하여 신하가 순사()하는 관습이 있었으며, 근세 이후의 문예작품이나 연극 중에는, 자살을 동정하고 정사()를 미화하는 사상이 드러나는 작품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자살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 하여 이를 죄악시하고, 종교적 제재를 가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오늘날에도 자살을 죄악시하는 사상이 강하다.

불교에서는 열반사상()의 입장에서 자살을 경계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종교자살이 없지는 않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은 자살의 원인을

이기적 자살()·애타적 자살(아노미(anomie:)적 자살로 분류한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결합하는 양식()서 과도한 개인화를 보일 경우, 즉 개인과 사회의 결합력이 약할 때의 자살이다.

애타적 자살은 그 반대로 과도한 집단화를 보일 경우, 즉 사회적 의무감이 지나치게 강할 때의 자살이다.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정세의 변화라든가 사회환경의 차이 또는 도덕적 통제의 결여()에 의한 자살이다.

말장난은 그만두고

통계에 의하면 신경쇠약·실연·병고()·생활고·가정불화·장래에 대한 고민·사업실패·염세() 등 을 자살의 원인으로 들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염세·병고·신경쇠약·실연·가정불화가 두드러지게 많다.

개인과 사회, 실추된 명예와 암울한 미래, 과거의 영예로운 삶과 중압감에 시달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해 극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결국 역경의 고통에 순응하고 곤경을 참아내는 능력이 '자살의 충동'을 억제 할 수 있는 열쇄이다.

그 능력은 한동안 유행하던 극기훈련으로 길러지는 것은 아니다.

그 것도 못참느냐고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희망이다. 미래에 대한 꿈이 있고 실현의 가능성이 보일 때 참을 수 있는 것이다.

희망을 주려 노력하자.

도와 주지는 못해도

내가 살기 위해, 내 즐거움을 위해서, 내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남의 삶을 파괴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자.

'우리는 은연 중에 남의 자살을 권하고 잇지 않은지를.....'

죽음 이후를 경험해 본자는 없다.

이승보다 저승이 더 나은 세상이라고 누가 말하던가?

하루 두끼 먹어도, 좁은 방에 끼어 살더라도 사는데까지 구차한 삶이라도 내 스스로 연명해보자.

사지육신 움직이지 못해 남을 괴롭힌다 생각될 때 그 때가서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해 보자.

자살도 삶의 한 방편이며 극히 인간적인 행위이며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법정에서 주장했던 프랑수와즈 사강의 생각에

'인간적인 행위'임은 동조하지만,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는 결코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는 경우가 없을 것이기에

자살은 극히 이기적임을 스스로 드러 내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이 글을 쓴 중에 '연예인이 직접 마약 밀반입해 투약 '이란 기사가 신문 방송에 보도되고 있다.

연예인들 한동안 숨죽이고 살아야겠다. 입조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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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9. 4. 27. 00:36
죽을권리는
'뇌사자나 식물인간, 말기암 환자 등 회복할 가망이 전혀 없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환자 또는 가족이 원하지 않는 생명유지장치를 거부하고 안락사를 요구할 권리.'라고 말한다.
권리이니 누구도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그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그 권리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뇌사자나 식물인간, 말기암 환자 등 회복할 가망이 전혀 없는 환자'에게만 주어지는 권리이다. '자살'의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간다(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파괴자다). 삶은 어느 순간 결국 끝난다. 그 뒤에 기다리는 건 암흑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여기는 데엔 미지(未知)에 따른 두려움이 한 몫 한다. 공포는 금기를 낳는다. 삶의 동반자인 죽음을 애써 없는 셈 치려 하는 건 그래서다.

1981년 세계의사총회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환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유지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고 천명한 '리스본 선언'을 채택했다. 이른바 '존엄사(尊嚴死)'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존엄사는 치명적인 병에 걸린 환자가 자신의 의사(意思)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포기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는 경우를 뜻한다.

미국연방대법원은 1990년 6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여성의 부모가 낸 소송에서 처음으로 헌법상의 권리로서 죽을 권리를 인정했으나,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부모의 소송 자체는 기각되었다.
미국에서는 1990년 7월 현재 41개주에서 안락사법이 제정되어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유언 또는 사망희망서(living will)를 남겨 놓을 경우 안락사가 인정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2002년 불치의 신경질환을 앓던 여성이 자신의 자살을 남편이 돕더라도 기소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법원에 냈으나 기각당하자 유럽 인권법원에 항소했고 유럽 인권법원은 이에 대해 "자살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고통스런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는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제3자나 당국의 지원에 의해 죽을 권리를 인정할 수는 없다"며 다시 기각했다.
한편 네덜란드는 2002년 4월부터 특정한 상황에서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시행해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국가가 되었으며, 벨기에 역시 제한된 조건에서 죽을 권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명의 윤리와 인권의 개념과 범위, 그리고 자살방조 문제 등이 복잡하고 민감하게 얽혀 있어 대다수 국가에서는 입법화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작년 12월 영국 스카이TV는 불치병에 걸린 영국인 크레이그 유어트의 안락사 장면을 방영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 그는 "인생의 나머지를 살아 있는 무덤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며 외국인의 안락사까지 허용하는 스위스로 '죽을 권리'를 찾아 떠났다. "죽음에 대한 관음증이 소름 끼친다"는 비난이 일었지만 '죽음은 개인이 선택하는 문제'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존엄사'라는 고상한 이름을 달고 한참 논쟁 중이다.

그러니 지금도 '죽을 권리'를 돕고자 하는 사람은 살인방조, 자살방조죄로 교도소행을 각오하고 도와야한다.

문제는 우리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는 거리가 먼 '병원 치료비'가 짐이 되는 경우가 .....

'뇌사자나 식물인간, 말기암 환자 등 회복할 가망이 전혀 없는 환자'의 치료비를 국가 등 제3자가 부담한다면 어떤 논의가 전개될까?


http://images.google.co.kr/imgres?imgurl=http://karenknowsbest.com/wp-content/uploads/2009/03/right-to-die.jpg&imgrefurl=http://karenknowsbest.com/2009/03/11/euthanasia-are-you-for-it-or-against-it/&usg=__sNvrLtfJQyTbIfZo7pCyKqsowZ4=&h=527&w=400&sz=41&hl=ko&start=1&um=1&tbnid=ybnS7yArEBAqbM:&tbnh=132&tbnw=100&prev=/images%3Fq%3Dright%2Bto%2Bdie%26complete%3D1%26hl%3Dko%26lr%3D%26safe%3Doff%26um%3D1

Posted by qlstnfp
2009. 4. 26. 01:08


이상훈 전 국방장관이 공개석상에서 검찰의 '박연차 비리' 수사와 관련,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삼족(三族)을 멸해야 한다"

는 '연좌제적 극한 발언'을 해 파문이 일고 있다.

이상훈 "盧의 삼족을 멸해야"

이 전 장관은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린 '사학법 폐지 국민운동본부 출범식'에 참석해 행한 기념사에서 "사학법 개정은 지난 좌파 정권의 책임”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참석자들은 이 발언에 뜨거운 박수로 호응했다.

이 전장관은 과거 노태우 정권시절에 진로건설과 현대정공 등으로부터 군납과 관련해 억대의 금품을 받는 등 율곡사업 비리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이날 발족한 사학법 폐지 국민운동본부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기독교사회책임 등 보수성향의 종교계 및 시민단체 250여개와 전국 사립학교 및 법인 3천여개가 참여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 전 국방장관외에 손병두 서강대 총장과 한나라당 이군현 국회의원, 이상주 전 교육부장관, 정기승 전 대법관 등이 참석했고, 운동본부는 공동상임대표로 박홍 전 서강대 총장, 김병묵 전 경희대 총장, 조용기 한국대학법인협의회 회장, 이광선 목사 등 4명을 선임했다. 이들은 사학법 폐지와 사학진흥법 제정 등을 요구했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code=NCB&seq=49545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18830&CMPT_CD=P0000








개성 억류자 문제는 언급이 없군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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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9. 4. 25. 14:46

측정은 같은 종류의 알려진 측정량과 비교하여 이루어진다

. 도량형(Weights and measures)은 이런 비교를 하기 위한 표준량들을 표시한다. 표준량들은 임의로 또는 어떤 일반 상수를 기준으로 하여 설정될 수 있다. 종류가 다른 양에 대한 표준은 분리하거나 논리 있는 단위 체계로 통합하거나 한다.

비교의 의미는 같은 도량형을 사용할 때이다. m법 yard법의 비교는 그렇다치자.

같은 m법을 사용하면서도, 같은 크기를

0.0017, 1.7, 170, 17000.

내것을 측정할 때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mm로 부끄러운 것은 km, 뒤의 단위는 슬쩍 얼버무린다.

남의 것을 측정 할 때는 그 반대의 측정도구를 디민다.

나의 눈물은 연민과 사랑이 깃든 눈물이요, 남의 눈물은 회한이나 속마음을 숨기는 악어의 눈물이다.

나의 한숨은 내 충정을 몰라주는 야속함의 표시이고, 남의 한숨은 잘못을 뉘우치는 괴로움의 표현이다.

나의 잘못은 10이요, 남의 잘못은 6,000g이다.

나의 공적은 1000mg 너의 공은 0.1kg

나 약간의 뇌병변, 중추신경계의 이상은 있어. 그러나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그러나 의 손톱 발톱에 수백만 마리의 세균이있어.

시절이 참으로 수상하다.

오랜 기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혹은 ‘상식’이분해되고 있다.

요사이 새로운? 행동과 그에 따라 재편되는 현실은 이른바 막장 드라마 속의 풍경보다 더 일그러져 있는 듯하다.

global standard 작년에 참 많이 들었던 말인데 요즈음 듣기 힘들다.

비상시국?이니 그렇다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제도와 과정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그 것이 알고 싶다. 거기가 어디인지만 알면 선악을 가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알 수 있을 터이니.........





Posted by qlstnfp